서대문 형무소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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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대문 형무소를 다녀와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사전조사
(1) 서대문 형무소의 변천사
(2) 해방이후 남겨진 일제 시대의 감옥에 대한 용도와 그 변천과정
(3) 감옥의 수용실태

2 기행문

본문내용

역사를 바르게 알고, 대처해 나가야 한다며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래. 아마도 갈피를 못 잡는 일부 가십거리의 정치인들로 우리 스스로 이 나라가 언제까지 존재할 수 있느냐는 푸념들을 우리 스스로 가지면서도 이렇듯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결코 작지 않은 국가로 남아 있음은 아마도 저렇게 소리 없이 열심히 살아가는 이름 없는 저런 분들이 아직도 어디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 강연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채 맨 뒷 구석 초라하게 있는 작은 옥사를 계단으로 올라갔다. 바로 ‘나병사‘였는데 문이 굳게 잠겨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안내문에 의하면 이 건물은 1923년에 지은 독립옥사로 투옥자 중 나병 환자나 다른 전염환자와 불치환자들을 격리하여 수용하던 것이다. 면적은 총 23㎡이며 3개의 감방이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죽어서도 감옥 안에서 죽어야 했던 그 고통은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곳을 다시 계단으로 내려가고 나면 바로 사형장이 나왔다.
이 사형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을 것이다. 사진에서 보는 저 계단을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시신을 끌어 내리려 갔을 일제 경찰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 사람의 목숨을 그것도 그저 자신의 잃어버린 최소한의 기본권을 찾으려했을 그들의 염원과 함께 너무나도 쉽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권리는 누가 부여했는가? 이 사형장의 입구 앞에는 미루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이것을 당시에는 ‘통곡의 미루나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당시 사형장에 끌려가기 전에 사형수들이 이곳에서 통곡을 하였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들이 그렇게 통곡을 하여도 아무 말 없이 미루나무는 침묵을 지켰을 것이다. 수 십 년 전에 통곡을 했던 수많은 사형수들이나 그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던 나 또한 미루나무는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사형장 옆에 바로 굴이 하나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죽은 사형수들의 시체를 몰래 버리기 위해 파 놓은 것이라고 한다. 그 굴속을 들여 보았지만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너무나도 캄캄하고 어두웠다. 죽어서도 빛이 없는 아득한 굴속으로 이렇듯 암암리에 내버려져야 하는 현실 속에서 죽은 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마저도 없는 일제의 잔인함을 알 수 있는 곳이었다. 막 입구로 다시 돌아올 때 처음에 보았던 ‘유관순 굴’이 저 너머 보이면서 그 가운데 푸른 잔디밭이 펼쳐졌다. 그런데 듬성듬성 빨간 벽돌이 잇몸처럼 드러나 있었다. 알고 보니 그 곳은 제13옥사로 일명 ‘공작사’라고 했다. 1923년에 지은 옥사로 투옥자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일을 시켰던 작업장 터였다. 이곳에서는 형무소, 군부대, 관공서 등에서 필요한 관용 물품을 만들어 공급하였다. 그리고 일제가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뒤에는 군수용품을 생산하여 조달하는데 강제 동원한 곳이기도 하다. 이제 다 둘러보고 돌아갈 때가 되었다. 과거의 13개 옥사 중에 4개 옥사만을 남겨두어서 그런지 그다지 크지 않은 규모였지만 이곳은 나에게 마치 긴 시간여행을 한 것과 같은 여운을 남겨 주었다.때마침 출구로 나오려는 차에 키다리 광대 한명이 풍선인형을 만들어주며 아이들을 즐겁게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꼬마 아이들 또한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또한 그 이유를 잊은 채 나도 저기 보이는 아이들도 자유로이 봄기운을 맞이하며 살고 있다. 일제시대에 참혹히 죽어갔던 그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당신들로 인해 지금 내가 밟고 있는 이 자리에 웃음이 가득하다고. 당신들의 죽음과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내 맘속에는 그저 그들에 대한 고마움의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다음에 이곳을 또 한 번 들를 기회가 생긴다면 그 때는 꼭 꽃 한송이를 들고 와서 추모비 앞에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또 한 번 감사할 것이다. 이곳을 나오면서 여느 대학생들처럼 취직과 같은 내 앞가림이나 걱정해야 하는 어리석은 나에게 또 다른 그 무언가를 가르쳐 주었다. 만약 지금의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과거의 일제시대를 거치지 않았다면 저들로 인해 태어났을 수많은 생명들이 지금 나와 함께 존재했을 것이다. ‘역사’란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과거에 어떠한 사건들이 자랑스러웠건 또는 치욕스러웠건 간에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제시해 준다면 그 자체로도 소중할 것이다. 불과 내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에 일어났던 그 모습들을 생각해보며 지금 나의 존재 또한 그러한 역사로 인해 가능케 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지금의 나를 비롯하여 우리는 너무 ‘역사’를 얼마나 가벼이 여기어 왔는가? 내가 고등학교 때 배웠던 도식적인 역사를 문득 떠올리며 곰곰이 생각하게 하였다. (지금은 그나마 나아지긴 했지만) 흑백사진에 국정 교과서로 나온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이런 현장을 조금이라도 설명하기엔 너무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저 우리들의 역사, 즉 ‘국사’과목은 그저 대학 입시의 8문제에 나오는 그런 가치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 게다가 고위 공무원을 비롯한 각종 시험에서도 ‘국사’는 제외되었다. 과거 뼈아픈 조선의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 불과 300년이 채 안 되는 시점에서 구한 말 우리는 역사로부터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더 큰 시련을 겪지 아니했는가? 어쩌면 지금의 우리도 그러한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른다. 물론 지금의 대한민국은 과거 조선 말기에 비해 이제 어느 국가도 쉽게 침탈하기 어려울 만큼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불과 3해리에 불과한 곳에 과거 일본의 우익 세력들은 역사의 죄 값을 치르지 않고, 여전히 바로잡아야 할 역사를 난도질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란 일본인이 좋아하는 벚꽃을 냇가에 흘려버릴 만큼 그렇게 가벼운 성질의 것은 아닐 것이다. 설사 우리의 수 천년 역사가 송두리째 저들에게 유린당하였다고 하더라도 역사는 배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과거에 이름 없이 이곳, 서대문 형무소에서 이름 없이 희생당한 독립 운동가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을 뿐 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것임을 역사는 우리 앞에 증명해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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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7.05.14
  • 저작시기2007.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09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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