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 론
2. 비시 정부
2-1) 비시 정부의 수립
2-2) 비시 정부의 진행 과정
3. 해방 후(後)의 과거청산
3-1) 초법적 숙청
3-2) 사법적 숙청
4. 현재까지 이어지는 과거청산
5. 결 론
# 첨부 : 드골과 레지스탕스
2. 비시 정부
2-1) 비시 정부의 수립
2-2) 비시 정부의 진행 과정
3. 해방 후(後)의 과거청산
3-1) 초법적 숙청
3-2) 사법적 숙청
4. 현재까지 이어지는 과거청산
5. 결 론
# 첨부 : 드골과 레지스탕스
본문내용
만 아니라 작전항명죄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기에 이르는 것이다. 드골의 위기는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드골에게 호의적이던 영국마저 아무런 군대가 없는 드골에게 냉대를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드골이 주창했던 자유프랑스의 정신은 어느 정도 프랑스국민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했고 항전파들이 드골을 중심으로 결집시키는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유프랑스라는 정신이 프랑스가 역사적으로 이룩했던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결국 드골만이 자유프랑스의 유일한 대안이 되어버렸고 이에 따라 영국은 정부와 민간차원에서 성원의 손길이 줄을 이었다. 사실 비시정권을 나치독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게 하고, 프랑스령 아프리카와 프랑스 보유의 군대와 자원을 독일에게 넘겨주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력에서 영국정부가 벌인 비시정권과의 접촉은 수포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그럴수록 '자유프랑스'의 도덕적, 실질적 가치는 높아갔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43년 6월 3일 알지에에서 수립된 ‘프랑스전국해방위원회’는 드골이 주재한 ‘자유프랑스’의 정부기구로서 유일한 합법적인 권력으로 규정되었다. 이 위원회는 영국 미국 소련 등 연합국의 공식승인을 받았으며 해외영토와 나치점령하의 프랑스 영토도 당연히 그 주권이 미치는 영토로 규정되었다.
1944년 마침내 망명의 세월이 끝나고 드골은 영웅이 되어 그리던 고국의 땅을 밟았다. 단지 패배한 국가의 망명군인이 당당한 연합국의 일원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해방이 단순히 드골의 신화만으로 설명될 수는 없다. 드골과 그의 ‘자유 프랑스’만이 프랑스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싸운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1941년 독일의 러시아 침공 이후 프랑스 공산당이 대독무장전투에 전면적으로 나섰고 그 대열에 기독교민주당, 신부, 군인, 중소기업인 등이 합류하였다. 이들 모두가 드골을 지도자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상당수는 안전한 런던에서 싸우는 드골을 비난하기 조차 하였다.
② 레지스탕스의 활약과 공헌
해외에서 드골의 활약이 두드러졌다면 그와 함께 또는 그와는 별도로 국내에서 싸웠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른바 레지스탕스.
레지스탕스는 전쟁 초기부터 등장한 것은 아니며 또한 프랑스에서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가 본격적으로 조직되고 활약하게 된 것은 두 가지 특별한 계기에 의해서였다. 그 첫째 계기는 1942년에 시작된 비시정권의 ‘강제동원체제’였다. 처음에는 자원에 의해 시작된 이 제도가 점차 강제적으로 프랑스의 젊은이들을 독일의 공장노동자를 비롯한 전쟁수요에 응하는 시설로 징용하는 방향으로 진전되자 이를 피해 레지스탕스에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1943년 2월부터는 독일 공장에서 일하도록 모든 연배의 프랑스 청년들을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젊은이들은 독일 공장 행 기차를 타거나 또는 레지스탕스가 되기 위해 산으로 가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둘째 계기는 민병대(Milice)의 설치였다. 나치에 의해 고무되고 비시정권에 의해 창설된 이 민병대는 결국 자신의 동족인 레지스탕스를 섬멸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오히려 레지스탕스 강화의 계기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민병대는 레지스탕스와 무고한 민간인들을 아무런 사법 절차 없이 마구 처형하면서 그 잔학성을 보였다. 1942년 여름 유태인의 강제수용이 시작되면서 카톨릭이 비시에 대한 반대 입장을 보이기 시작했다. 1943년 초가 되면서 나치의 패배가 보다 명확해 지면서 나치는 서유럽의 점령지역에서의 공출과 징집을 강화하였고 이것이 레지스탕스의 대중적 활동의 물적, 인적, 심리적 기초가 되었다.
레지스탕스가 벌인 활동은 눈부신 것이었지만 '성급한 폭력'에 대해서는 내부적으로도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드골은 1941년 당장의 성과도 없이 젊은 생명들의 소모를 개탄하기도 하였다. 최종의 결전을 준비하여야 한다는 준비론과 당장의 행동을 중시하는 결행론 사이의 분열이 언제나 있었다. 또한 독일 군의 축출에만 관심을 둔 측과 프랑스 사회의 근간을 청소하려는 측과의 갈등도 심각하였다. 정규군 출신의 무장병력과 빨치산 활동세력 사이의 '보이지 않는 내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전자는 독일 군에 저항하지만 사회의 기득권을 보존하려 하였고 후자는 사회의 변혁을 갈구하였기 때문이다 . 대체로 프랑스의 일반 국민들은 독일 군으로부터의 자유를 희구했지만 동시에 그것은 혁명의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레지스탕스의 규모는 한계가 있었다. 이 가운데 10만명이 그 활동 가운에 목숨을 잃었다. 또한 비시정권 당국자들과 나치 게쉬타포는 이러한 레지스탕스 활동을 볼쉐비키와 연결시키려 하였다. 레지스탕스를 공산주의자들과 동일시함으로써 프랑스 국민의 반감을 조장하려 하였던 것이다. 나치독일에 못지않게 공산주의자들에게 위협을 느끼고 있던 다수의 프랑스 국민들은 이러한 선전에 쉽게 현혹되었다. 이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비시정권을 지지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정통성을 주장하는 두 정권 아래에서 프랑스 국민은 많은 혼란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지스탕스운동을 벌인 프랑스인은 엄청난 숫자였다. 전쟁이 끝난 후 30만명이 공식적으로 레지스탕스 경력자로 인정받았다. 이 숫자는 당시 성년 남자의 2%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레지스탕스의 활동은 군사적으로도 독일점령군과 비시정권에게 타격을 입혔지만 사회 문화적 영향은 더욱 큰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이들 레지스탕스는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보상과 응답을 받았다. 즉, 이들은 1944년부터 1947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정계의 다수를 이루었던 것이다. 반면에 우익 정치세력의 경향이 짙었던 이들은 비시정권의 영향으로 회복불능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비시정권에 협력했던 사람들이나 참여했던 정치인들 모두 피선거권을 잃었는데 이들 중 대부분이 중도 또는 우익이었던 것이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또는 레지스탕스 신문들의 전체 일간신문 구독율도 반 이상을 차지했고 특히 공산주의 계열의 신문 구독자수는 전쟁 전보다 네 배 이상의 구독율을 보이기도 했다. 언론이나 정계 등에서 국민들로부터 눈에 띄는 보상을 받은 셈이다.
그러나 드골이 주창했던 자유프랑스의 정신은 어느 정도 프랑스국민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했고 항전파들이 드골을 중심으로 결집시키는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유프랑스라는 정신이 프랑스가 역사적으로 이룩했던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결국 드골만이 자유프랑스의 유일한 대안이 되어버렸고 이에 따라 영국은 정부와 민간차원에서 성원의 손길이 줄을 이었다. 사실 비시정권을 나치독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게 하고, 프랑스령 아프리카와 프랑스 보유의 군대와 자원을 독일에게 넘겨주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력에서 영국정부가 벌인 비시정권과의 접촉은 수포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그럴수록 '자유프랑스'의 도덕적, 실질적 가치는 높아갔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43년 6월 3일 알지에에서 수립된 ‘프랑스전국해방위원회’는 드골이 주재한 ‘자유프랑스’의 정부기구로서 유일한 합법적인 권력으로 규정되었다. 이 위원회는 영국 미국 소련 등 연합국의 공식승인을 받았으며 해외영토와 나치점령하의 프랑스 영토도 당연히 그 주권이 미치는 영토로 규정되었다.
1944년 마침내 망명의 세월이 끝나고 드골은 영웅이 되어 그리던 고국의 땅을 밟았다. 단지 패배한 국가의 망명군인이 당당한 연합국의 일원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해방이 단순히 드골의 신화만으로 설명될 수는 없다. 드골과 그의 ‘자유 프랑스’만이 프랑스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싸운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1941년 독일의 러시아 침공 이후 프랑스 공산당이 대독무장전투에 전면적으로 나섰고 그 대열에 기독교민주당, 신부, 군인, 중소기업인 등이 합류하였다. 이들 모두가 드골을 지도자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상당수는 안전한 런던에서 싸우는 드골을 비난하기 조차 하였다.
② 레지스탕스의 활약과 공헌
해외에서 드골의 활약이 두드러졌다면 그와 함께 또는 그와는 별도로 국내에서 싸웠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른바 레지스탕스.
레지스탕스는 전쟁 초기부터 등장한 것은 아니며 또한 프랑스에서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가 본격적으로 조직되고 활약하게 된 것은 두 가지 특별한 계기에 의해서였다. 그 첫째 계기는 1942년에 시작된 비시정권의 ‘강제동원체제’였다. 처음에는 자원에 의해 시작된 이 제도가 점차 강제적으로 프랑스의 젊은이들을 독일의 공장노동자를 비롯한 전쟁수요에 응하는 시설로 징용하는 방향으로 진전되자 이를 피해 레지스탕스에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1943년 2월부터는 독일 공장에서 일하도록 모든 연배의 프랑스 청년들을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젊은이들은 독일 공장 행 기차를 타거나 또는 레지스탕스가 되기 위해 산으로 가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둘째 계기는 민병대(Milice)의 설치였다. 나치에 의해 고무되고 비시정권에 의해 창설된 이 민병대는 결국 자신의 동족인 레지스탕스를 섬멸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오히려 레지스탕스 강화의 계기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민병대는 레지스탕스와 무고한 민간인들을 아무런 사법 절차 없이 마구 처형하면서 그 잔학성을 보였다. 1942년 여름 유태인의 강제수용이 시작되면서 카톨릭이 비시에 대한 반대 입장을 보이기 시작했다. 1943년 초가 되면서 나치의 패배가 보다 명확해 지면서 나치는 서유럽의 점령지역에서의 공출과 징집을 강화하였고 이것이 레지스탕스의 대중적 활동의 물적, 인적, 심리적 기초가 되었다.
레지스탕스가 벌인 활동은 눈부신 것이었지만 '성급한 폭력'에 대해서는 내부적으로도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드골은 1941년 당장의 성과도 없이 젊은 생명들의 소모를 개탄하기도 하였다. 최종의 결전을 준비하여야 한다는 준비론과 당장의 행동을 중시하는 결행론 사이의 분열이 언제나 있었다. 또한 독일 군의 축출에만 관심을 둔 측과 프랑스 사회의 근간을 청소하려는 측과의 갈등도 심각하였다. 정규군 출신의 무장병력과 빨치산 활동세력 사이의 '보이지 않는 내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전자는 독일 군에 저항하지만 사회의 기득권을 보존하려 하였고 후자는 사회의 변혁을 갈구하였기 때문이다 . 대체로 프랑스의 일반 국민들은 독일 군으로부터의 자유를 희구했지만 동시에 그것은 혁명의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레지스탕스의 규모는 한계가 있었다. 이 가운데 10만명이 그 활동 가운에 목숨을 잃었다. 또한 비시정권 당국자들과 나치 게쉬타포는 이러한 레지스탕스 활동을 볼쉐비키와 연결시키려 하였다. 레지스탕스를 공산주의자들과 동일시함으로써 프랑스 국민의 반감을 조장하려 하였던 것이다. 나치독일에 못지않게 공산주의자들에게 위협을 느끼고 있던 다수의 프랑스 국민들은 이러한 선전에 쉽게 현혹되었다. 이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비시정권을 지지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정통성을 주장하는 두 정권 아래에서 프랑스 국민은 많은 혼란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지스탕스운동을 벌인 프랑스인은 엄청난 숫자였다. 전쟁이 끝난 후 30만명이 공식적으로 레지스탕스 경력자로 인정받았다. 이 숫자는 당시 성년 남자의 2%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레지스탕스의 활동은 군사적으로도 독일점령군과 비시정권에게 타격을 입혔지만 사회 문화적 영향은 더욱 큰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이들 레지스탕스는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보상과 응답을 받았다. 즉, 이들은 1944년부터 1947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정계의 다수를 이루었던 것이다. 반면에 우익 정치세력의 경향이 짙었던 이들은 비시정권의 영향으로 회복불능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비시정권에 협력했던 사람들이나 참여했던 정치인들 모두 피선거권을 잃었는데 이들 중 대부분이 중도 또는 우익이었던 것이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또는 레지스탕스 신문들의 전체 일간신문 구독율도 반 이상을 차지했고 특히 공산주의 계열의 신문 구독자수는 전쟁 전보다 네 배 이상의 구독율을 보이기도 했다. 언론이나 정계 등에서 국민들로부터 눈에 띄는 보상을 받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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