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조선후기 위항인과 위항시
- 시사(詩社) 형성을 중심으로 -
<목 차>
Ⅰ. 서론
Ⅱ. 살펴보기
1. 위항인의 개념
2. 위항문학의 발생 배경
3. 위항문학의 특징
4. 위항문학의 흐름
Ⅲ. 결론
<참고문헌>
- 시사(詩社) 형성을 중심으로 -
<목 차>
Ⅰ. 서론
Ⅱ. 살펴보기
1. 위항인의 개념
2. 위항문학의 발생 배경
3. 위항문학의 특징
4. 위항문학의 흐름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하였다. 하지만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사대부들의 반발이 너무 거세어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772년(영조48)에 삼천여명의 서얼들이 상소를 할 정도로 그 세력이 확대되었고, 1777년 ‘丁西節目(정서절목)’을 정하여 이덕무유득공박제가서리수 등의 서얼들을 5품의 서검서(檢書官)에 임명하였다. 결국 1851년(철종2)에 서얼들도 벼슬에 등용한다는 조치가 내려졌다. 이에 자극을 받은 기술직 중인들은 통문을 만들고 각 관청의 유사를 뽑았다. 장지완은 율학의 유사로, 다시 상소문을 지을 제술유사였다. 서얼들의 통청운동은 성공하였지만, 힘없는 기술직 중인들의 통청운동은 묵살되었다.
③ 서원시사(西園詩社)
김낙서의 아들인 김희령을 중심으로 모인 이 시사(詩社)는 박윤묵(朴允)의 격려로 모였다. 박윤묵은 <西園諸見訪(서편제견방)>이라는 시에서 지석관박기열조경식 등을 서원시사의 동인으로 들었다. 그는 서원시사에 자주 참석하여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모습을 회상하면서 시를 지어 후배들을 격려하였다.
④ 직하시사(稷下詩社)
최경흠(崔景欽)을 중심으로 모였던 직하시사(稷下詩社)는 자기들의 시 창작보다도 선배들의 생애와 업적을 정리한 공로가 더 높이 평가받고 있다. 계속해서 위항시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인물들이 나타나자, 양반들도 이들을 예전처럼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함께 시를 지으면 놀기도 하고, 위항인들의 시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러한 교우관계 속에서 사대부들이 남다르게 살았던 위항인들의 전(傳)을 지어주기도 하고, 위항의 후배들이 자랑스러운 선배의 전기를 지어주기도 하였다.
200여년 동안 수많은 위항시인들이 활동했는데 그들의 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으므로, 그냥 두었다가는 없어질 위험도 있었기에 선배들의 전집(傳集)을 엮어냈다. 조희룡이 1844년 42명의 정을 싣은『壺山外記(호산외기)』를 지었다. 20년 뒤인 1862년에 유재건이 자기 글과 함께『里鄕見聞錄(이향견문록)』을 엮어냈으며, 이경민은 1866년 모두 남의 글만으로『熙朝事(희조질사)』를 엮어냈다.
최경흠은 유재건과 더불어 1875년까지 활동한 위항시인들의 시를 모아서『풍요삼선(風謠三選)』을 간행하였다.
2) 육교시사(六橋詩社)
1866년 프랑스 군함이 강화도를 침범하고 1871년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일시 점령하자, 외국과의 연락을 위해 위항인 가운데 특히 역관(譯官)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자연히 역관들이 정치외교의 실무자로 등장하면서 여론을 형성하는 집단이 되었다. 청계천의 여섯 번째 다리인 광교(橋橋) 부근에 모여 살았던 이들의 모임인 육교시사(六橋詩社)는 조선조 최후의 위항시사이다.
이 시사(詩社)의 중심인물은 강위(姜瑋)로, 그가 개화운동에 앞장서면서 제자들도 나서게 되었다. 육교시사는 중국을 여러 차례 드나들었던 역관들이 중심으로 모였으므로, 당시 폐쇄적이었던 조선사회에서 가장 앞선 지식인들의 모임이었다. 그래서 시를 짓는 것도 중요한 목적이었지만, 그동안 알지 못했던 넓은 세상이 돌아가는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 중국을 다녀오는 동인을 통하여 새로운 책이나 문물을 받아보는 것도 중요한 목적이었다.
(4) 위항시의 소멸
1894년 갑오경장에서 신분제가 철폐되어 더 이상 양반과 중인을 나눌 필요가 없어졌으며, 오히려 중국어와 일본어에 능통하여 외국을 자주 드나들었던 이들이 사회의 주역으로 나섰다. 그래서 이들만의 모임을 가질 필요가 사라졌고, 1917년『풍요사선(風謠四選)』을 편집하자던 논의도 타당성을 잃게 되었다.
Ⅲ. 결론
위항시는 18세기 낭만적현실적 방법을 통해 중세사회의 모순을 지적비판하고 탈규범적 형식을 획득함으로써 중세문학의 제한을 벗어났으나, 그 여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19세기에 이르러 쇠퇴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위항문학은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시기에 성장한, 중간계층의 지적 성장 및 교양의 획득을 의미하며, 이것은 우리 문학이 근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생산된 것이다. 위항인의 지적성장, 교양의 획득은 사대부들의 권력의 생산처였던 지식의 독점을 해체하였으며, 이는 곧 중세사회의 해체이자 근대로의 지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참고문헌>
강명관,『조선후기 위항문학 연구』, 창작과비평사, 2007
조동일,『한국문학통사 3』, 지식산업사, 2005
허경진,『조선위항문학사』, 태학사, 2007
편집부,『창작과 비평 98호』, 창작과 비평사, 1997
황패강 외, 『한국문학작가론 3』, 집문당, 2002
③ 서원시사(西園詩社)
김낙서의 아들인 김희령을 중심으로 모인 이 시사(詩社)는 박윤묵(朴允)의 격려로 모였다. 박윤묵은 <西園諸見訪(서편제견방)>이라는 시에서 지석관박기열조경식 등을 서원시사의 동인으로 들었다. 그는 서원시사에 자주 참석하여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모습을 회상하면서 시를 지어 후배들을 격려하였다.
④ 직하시사(稷下詩社)
최경흠(崔景欽)을 중심으로 모였던 직하시사(稷下詩社)는 자기들의 시 창작보다도 선배들의 생애와 업적을 정리한 공로가 더 높이 평가받고 있다. 계속해서 위항시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인물들이 나타나자, 양반들도 이들을 예전처럼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함께 시를 지으면 놀기도 하고, 위항인들의 시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러한 교우관계 속에서 사대부들이 남다르게 살았던 위항인들의 전(傳)을 지어주기도 하고, 위항의 후배들이 자랑스러운 선배의 전기를 지어주기도 하였다.
200여년 동안 수많은 위항시인들이 활동했는데 그들의 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으므로, 그냥 두었다가는 없어질 위험도 있었기에 선배들의 전집(傳集)을 엮어냈다. 조희룡이 1844년 42명의 정을 싣은『壺山外記(호산외기)』를 지었다. 20년 뒤인 1862년에 유재건이 자기 글과 함께『里鄕見聞錄(이향견문록)』을 엮어냈으며, 이경민은 1866년 모두 남의 글만으로『熙朝事(희조질사)』를 엮어냈다.
최경흠은 유재건과 더불어 1875년까지 활동한 위항시인들의 시를 모아서『풍요삼선(風謠三選)』을 간행하였다.
2) 육교시사(六橋詩社)
1866년 프랑스 군함이 강화도를 침범하고 1871년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일시 점령하자, 외국과의 연락을 위해 위항인 가운데 특히 역관(譯官)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자연히 역관들이 정치외교의 실무자로 등장하면서 여론을 형성하는 집단이 되었다. 청계천의 여섯 번째 다리인 광교(橋橋) 부근에 모여 살았던 이들의 모임인 육교시사(六橋詩社)는 조선조 최후의 위항시사이다.
이 시사(詩社)의 중심인물은 강위(姜瑋)로, 그가 개화운동에 앞장서면서 제자들도 나서게 되었다. 육교시사는 중국을 여러 차례 드나들었던 역관들이 중심으로 모였으므로, 당시 폐쇄적이었던 조선사회에서 가장 앞선 지식인들의 모임이었다. 그래서 시를 짓는 것도 중요한 목적이었지만, 그동안 알지 못했던 넓은 세상이 돌아가는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 중국을 다녀오는 동인을 통하여 새로운 책이나 문물을 받아보는 것도 중요한 목적이었다.
(4) 위항시의 소멸
1894년 갑오경장에서 신분제가 철폐되어 더 이상 양반과 중인을 나눌 필요가 없어졌으며, 오히려 중국어와 일본어에 능통하여 외국을 자주 드나들었던 이들이 사회의 주역으로 나섰다. 그래서 이들만의 모임을 가질 필요가 사라졌고, 1917년『풍요사선(風謠四選)』을 편집하자던 논의도 타당성을 잃게 되었다.
Ⅲ. 결론
위항시는 18세기 낭만적현실적 방법을 통해 중세사회의 모순을 지적비판하고 탈규범적 형식을 획득함으로써 중세문학의 제한을 벗어났으나, 그 여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19세기에 이르러 쇠퇴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위항문학은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시기에 성장한, 중간계층의 지적 성장 및 교양의 획득을 의미하며, 이것은 우리 문학이 근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생산된 것이다. 위항인의 지적성장, 교양의 획득은 사대부들의 권력의 생산처였던 지식의 독점을 해체하였으며, 이는 곧 중세사회의 해체이자 근대로의 지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참고문헌>
강명관,『조선후기 위항문학 연구』, 창작과비평사, 2007
조동일,『한국문학통사 3』, 지식산업사, 2005
허경진,『조선위항문학사』, 태학사, 2007
편집부,『창작과 비평 98호』, 창작과 비평사, 1997
황패강 외, 『한국문학작가론 3』, 집문당,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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