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성립기의 무신정권
2. 확립기의 무신정권
3. 붕괴기의 무신정권
4.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1) 중 방
(2) 도 방
(3) 교정도감
(4) 정 방
(5) 서 방
(6) 삼별초∙마별초
5. 전시과체제의 붕괴와 농장의 성립
6. 농민∙천민의 난
7. 무신정권기의 사상과 문화
(1) 불교계의 새 동향
(2) 문 화
8. 몽고와의 전쟁
Ⅲ. 결 론
Ⅱ. 본 론
1. 성립기의 무신정권
2. 확립기의 무신정권
3. 붕괴기의 무신정권
4.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1) 중 방
(2) 도 방
(3) 교정도감
(4) 정 방
(5) 서 방
(6) 삼별초∙마별초
5. 전시과체제의 붕괴와 농장의 성립
6. 농민∙천민의 난
7. 무신정권기의 사상과 문화
(1) 불교계의 새 동향
(2) 문 화
8. 몽고와의 전쟁
Ⅲ. 결 론
본문내용
려 하자 문신 유승단이 몽고에 사대할 것을 주장하여 이에 반대하였던 것이다. 전쟁 초기에는 최씨 정권의 세력이 매우 강력하였으므로 이러한 의견은 묵살될 수박에 없었다.
이후 몽고와의 전쟁이 오랫동안 계속되면서 문신들의 사대강화론은 점차 설득력을 얻어갔고, 실제로 국왕과 문신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을 만큼 정치적 지위를 신장시켰다. 즉, 전쟁 중에도 몽고군의 철수를 조건으로 강화가 추진되었는데, 그때마다 몽고 측에서 제시한 조건은 국왕의 친조 또는 왕자를 인질로 보낼 것 등이었고, 실제로 고려 측에서는 왕족을 몽고에 인질로 보내는 대가로 몽고군을 철수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러한 왕실의 역할 증대는 곧 정치적 영향력의 확대로 이어졌다. 이러한 외교활동을 직접 담당한 사람들이 바로 문신관료들이었으므로 이 과정에서 문신들의 발언권 역시 강화되었다. 이에 반하여 무신정권의 세력기반은 점차 축소되어 갔다. 최충헌으로부터 최우, 최항, 최의로 무신집정의 자리가 세습되는 과정에서 최씨 정권의 사병집단이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254년부터는 몽고의 전례 없는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어 고려가 막심한 피해를 입게 되었고, 이것과 때맞추어 각지에서 일반인들이 지방관을 죽이고 몽고에 투항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이는 곧 더 이상의 전쟁이 어려워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국왕과 문신들에게 강화론의 명분이 되었다. 한편 이때 몽고에서도 강화의 조건을 국왕의 친조와 개경환도에서 태자의 입조로 완화함으로써 고려의 강화론자들을 지원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몽고에서도 헌종이 죽고 내전 끝에 세조가 즉위하여 국내의 안정을 기하려 하였으므로 고려와의 강화를 서두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최자등 문신들에 의해 강화론이 적극적으로 개진되기 시작하였으며, 1258년에는 항전을 고집하던 최씨 정권이 무너지고 몽고와의 강화가 성립되었다.
몽고와의 강화는 필연적으로 이를 주장하고 또 실현시킨 국왕과 문신관료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다. 그러나 무신정권이 완전히 붕괴된 것은 아니어서 곧 무신 김준이 권력을 장악하고 개경환도를 늦추면서 세력기반을 확충하려 하였다. 이에 몽고에서는 개경환도를 재촉하면서 그 지연의 책임을 물어 김준을 소환하는 등 압박을 가하여 왔다. 그러자 무신정권 내에서 몽고와 재대결하여야 한다는 강경론이 대두하여 임연이 김준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뒤 원종을 폐위한 비상수단을 강구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왕실이 외교활동과 몽고의 압력으로 패배하였고, 원종은 몽고의 순가를 이끌고 고려에 돌아와 강화도의 무신정권에 대하여 개경환도를 명하였다. 이때 지방관으로 나가 있던 문신관료들이 이에 호응하였고, 강화도에서는 홍문계, 송송례등이 무신집정 임유무를 제거함으로써 무신정권은 완전히 종식되었다.
국왕 및 문신관료들의 외교활동과 몽고의 군사개입으로 무신정권이 종식되자 무신정권의 무력기반이었던 삼별초가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강화도에서 시작하여 진도, 제주 등지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4년동안 고려정부에 대항하였다. 그런데 이때 각지에서 일반민들이 삼별초에 호응하여 봉기한 사례가 있어 주목된다. 즉, 1271년에 밀성군에서 방도, 계년등이 진도의 삼별초에 호응하여 지방관을 죽이고 봉기하였고, 개경에서도 관노인 숭겸, 공덕 등이 역시 삼별초에 호응하였다. 이러한 예는 이밖에도 많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면, 이것이 삼별초가 전라, 경상도 지역에까지 세력을 뻗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삼별초가 민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몽고와의 전쟁기간에 몽고의 침략과 지배층의 수탈에 대항해왔던 일반민들이 몽고와 고려지배층의 결탁에 의하여 강화가 이루어지는 국면에서 이를 반대하여 저항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것이 역시 강화를 반대하는 삼별초의 입장과 합치되었으므로 삼별초에 호응하는 형태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와 몽고의 연합에 의한 삼별초의 진압은 제주를 근거로 하는 삼별초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민의 저항을 억누르는 것이었다. 그 결과 고려의 항몽세력이 모두 제거됨으로써 이후 반원적인 움직임이 나타나지 못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지배층에 대한 민의 저항 역시 소극적인 유망으로 저하되었다.
Ⅲ. 결 론
이렇게 하여 100년에 걸친 무신정권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무신난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앞에서 언급하였 듯이 고려양반사회의 지나친 문신우대정책이 무반천시가 그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문신들의 지나친 부의 축적, 외척세력의 지나친 정치간섭과 문신들(개경파, 서경파)간의 세력 다툼으로 인한 정치사회적 혼란은 일반 백성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고 농민과 천민의 봉기가 각지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있어서 무신난의 발생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처음 무신들이 정권을 잡을 때 농민들은 문신집권기 보다는 나은 생활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졌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무신들 역시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세력 다툼을 벌였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도방, 삼별초, 마별초 등이 나타나게 되었고, 이러한 사병조직을 운영하기 위하여 농장이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생활은 그 전과 다를바 없었고 무신정권하에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각지에서 대대적인 농민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농민봉기에 뒤이어 일어난 몽고의 침입은 고려 무신정권을 붕괴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무신정권은 고려사회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계기가 될 정도로 커다란 사건이었다. 한국사에 있어서 문무반 사이의 정권교체라는 정치적 변동의 의미만이 아니라 여기에 사회경제문화 등 모든 면에 걸쳐 일대 변혁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하겠다.
*** 참 고 문 헌 ***
변태섭 - 한국사통론 - 삼영사 - 1994
박용운 - 고려시대사(하) - 일지사 - 1994
이기백 - 고려의 무신정권(한국사 시민강좌 제8집) - 일조각 - 1991
서경헌 - 고려 의종대 무신난 발생의 요인에 대한 고찰
- 경남대학교교육대학원 - 1987
이후 몽고와의 전쟁이 오랫동안 계속되면서 문신들의 사대강화론은 점차 설득력을 얻어갔고, 실제로 국왕과 문신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을 만큼 정치적 지위를 신장시켰다. 즉, 전쟁 중에도 몽고군의 철수를 조건으로 강화가 추진되었는데, 그때마다 몽고 측에서 제시한 조건은 국왕의 친조 또는 왕자를 인질로 보낼 것 등이었고, 실제로 고려 측에서는 왕족을 몽고에 인질로 보내는 대가로 몽고군을 철수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러한 왕실의 역할 증대는 곧 정치적 영향력의 확대로 이어졌다. 이러한 외교활동을 직접 담당한 사람들이 바로 문신관료들이었으므로 이 과정에서 문신들의 발언권 역시 강화되었다. 이에 반하여 무신정권의 세력기반은 점차 축소되어 갔다. 최충헌으로부터 최우, 최항, 최의로 무신집정의 자리가 세습되는 과정에서 최씨 정권의 사병집단이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254년부터는 몽고의 전례 없는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어 고려가 막심한 피해를 입게 되었고, 이것과 때맞추어 각지에서 일반인들이 지방관을 죽이고 몽고에 투항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이는 곧 더 이상의 전쟁이 어려워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국왕과 문신들에게 강화론의 명분이 되었다. 한편 이때 몽고에서도 강화의 조건을 국왕의 친조와 개경환도에서 태자의 입조로 완화함으로써 고려의 강화론자들을 지원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몽고에서도 헌종이 죽고 내전 끝에 세조가 즉위하여 국내의 안정을 기하려 하였으므로 고려와의 강화를 서두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최자등 문신들에 의해 강화론이 적극적으로 개진되기 시작하였으며, 1258년에는 항전을 고집하던 최씨 정권이 무너지고 몽고와의 강화가 성립되었다.
몽고와의 강화는 필연적으로 이를 주장하고 또 실현시킨 국왕과 문신관료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다. 그러나 무신정권이 완전히 붕괴된 것은 아니어서 곧 무신 김준이 권력을 장악하고 개경환도를 늦추면서 세력기반을 확충하려 하였다. 이에 몽고에서는 개경환도를 재촉하면서 그 지연의 책임을 물어 김준을 소환하는 등 압박을 가하여 왔다. 그러자 무신정권 내에서 몽고와 재대결하여야 한다는 강경론이 대두하여 임연이 김준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뒤 원종을 폐위한 비상수단을 강구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왕실이 외교활동과 몽고의 압력으로 패배하였고, 원종은 몽고의 순가를 이끌고 고려에 돌아와 강화도의 무신정권에 대하여 개경환도를 명하였다. 이때 지방관으로 나가 있던 문신관료들이 이에 호응하였고, 강화도에서는 홍문계, 송송례등이 무신집정 임유무를 제거함으로써 무신정권은 완전히 종식되었다.
국왕 및 문신관료들의 외교활동과 몽고의 군사개입으로 무신정권이 종식되자 무신정권의 무력기반이었던 삼별초가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강화도에서 시작하여 진도, 제주 등지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4년동안 고려정부에 대항하였다. 그런데 이때 각지에서 일반민들이 삼별초에 호응하여 봉기한 사례가 있어 주목된다. 즉, 1271년에 밀성군에서 방도, 계년등이 진도의 삼별초에 호응하여 지방관을 죽이고 봉기하였고, 개경에서도 관노인 숭겸, 공덕 등이 역시 삼별초에 호응하였다. 이러한 예는 이밖에도 많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면, 이것이 삼별초가 전라, 경상도 지역에까지 세력을 뻗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삼별초가 민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몽고와의 전쟁기간에 몽고의 침략과 지배층의 수탈에 대항해왔던 일반민들이 몽고와 고려지배층의 결탁에 의하여 강화가 이루어지는 국면에서 이를 반대하여 저항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것이 역시 강화를 반대하는 삼별초의 입장과 합치되었으므로 삼별초에 호응하는 형태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와 몽고의 연합에 의한 삼별초의 진압은 제주를 근거로 하는 삼별초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민의 저항을 억누르는 것이었다. 그 결과 고려의 항몽세력이 모두 제거됨으로써 이후 반원적인 움직임이 나타나지 못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지배층에 대한 민의 저항 역시 소극적인 유망으로 저하되었다.
Ⅲ. 결 론
이렇게 하여 100년에 걸친 무신정권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무신난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앞에서 언급하였 듯이 고려양반사회의 지나친 문신우대정책이 무반천시가 그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문신들의 지나친 부의 축적, 외척세력의 지나친 정치간섭과 문신들(개경파, 서경파)간의 세력 다툼으로 인한 정치사회적 혼란은 일반 백성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고 농민과 천민의 봉기가 각지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있어서 무신난의 발생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처음 무신들이 정권을 잡을 때 농민들은 문신집권기 보다는 나은 생활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졌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무신들 역시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세력 다툼을 벌였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도방, 삼별초, 마별초 등이 나타나게 되었고, 이러한 사병조직을 운영하기 위하여 농장이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생활은 그 전과 다를바 없었고 무신정권하에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각지에서 대대적인 농민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농민봉기에 뒤이어 일어난 몽고의 침입은 고려 무신정권을 붕괴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무신정권은 고려사회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계기가 될 정도로 커다란 사건이었다. 한국사에 있어서 문무반 사이의 정권교체라는 정치적 변동의 의미만이 아니라 여기에 사회경제문화 등 모든 면에 걸쳐 일대 변혁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하겠다.
*** 참 고 문 헌 ***
변태섭 - 한국사통론 - 삼영사 - 1994
박용운 - 고려시대사(하) - 일지사 - 1994
이기백 - 고려의 무신정권(한국사 시민강좌 제8집) - 일조각 - 1991
서경헌 - 고려 의종대 무신난 발생의 요인에 대한 고찰
- 경남대학교교육대학원 -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