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序論
Ⅱ. 1920년代 상황
ⅰ. 사회적 배경
ⅱ. 근우회 이전의 여성계
Ⅲ. 근우회
ⅰ. 근우회 본부의 결성과정
ⅱ. 근우회 지회의 결성과정
ⅲ. 조직체제와 활동
ⅳ. 해체와 역사적 성격
Ⅳ. 結論
Ⅱ. 1920년代 상황
ⅰ. 사회적 배경
ⅱ. 근우회 이전의 여성계
Ⅲ. 근우회
ⅰ. 근우회 본부의 결성과정
ⅱ. 근우회 지회의 결성과정
ⅲ. 조직체제와 활동
ⅳ. 해체와 역사적 성격
Ⅳ. 結論
본문내용
, 여성계몽운동을 통한 여성의 의식 제고라는 본래의 목적에 따른 선전계몽운동을 강화하여 지방순회강연을 하고, 선전일(음력 9월 9일)을 정하여 전국적으로 근우회운동의 기치를 드높였으며, 근우회운동에 대한 會內의 인식 통일에 큰 역할을 할 기관지 <근우> 창간호를 발간하고, 일반여성을 위해 전국의 지회에 야학을 설치할 계획을 세웠다. 또 이러한 활동을 위해서는 여성운동가의 양성이 절실히 필요했으므로 본부는 1주일에 걸친 운동가양성, 목적의 부인강좌를 개최했다.
둘째, 노동여성 조직화에 노력하여 1929년 전국대회에서 노농부의 설치를 보았으며, 노동여성을 주된 대상으로 한 경동지회를 설립(1930.4.15)하고, 노동부인에 대한 통계 작성 보고를 전국의 지회에 요구하는 한편 광주제사분규와 부산맹파사건을 당지 지회에 조사케 하는 등 노동운동 조사 지원활동도 전개했다. 셋째로는 여학생 운동에 큰 관심을 쏟아 조사지원은 물론 1930년 1월의 경성여학생 시위에 깊숙이 개입하여 간부가 대거 검거된 일도 있었다. 실상 근우회가 가장 투쟁성을 발휘한 분야가 바로 이 여학생운동이었는데 그것은 당시의 여성운동이 여학생층에 의지하는 바가 크며, 여학생들이 투쟁력이 상대적으로 강하고 근우회가 학생부를 두어 그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던 데서 비롯된 현상이었다.
ⅳ. 해체와 역사적 성격
신간회와 더불어 좌우합작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창설된 근우회는 해체도 역시 신간회와 연관성을 가지게 되었다.
근우회 해소는 단순히 근우회라고 하는 한 단체의 해체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근우회가 가지는 전술적, 조직적 오류를 시정하는 하나의 과도적 운동이었다.
전국적으로 볼 때 근우회 해소론이 나타나는 시기는 1931년 2월부터이다. 근우회 해소론은 근우회가 소부르주아 여성들이 모인 소부르주아적 단체이고, 노동여성을 조직화해 내는 데 실패했으며, 투쟁성을 보유하지 못하여 창립 후 아무런 역할도 해오지 못했다는 것, 따라서 근우회의 존재는 오히려 운동에 방해가 될 뿐이며, 근우회를 해체하고 노동조합, 농민조합 여성운동에 매진하는 것이 옳다는 입장이었다.
해소는 전국대회에 회부되어 지회의 총의에 의해 가부가 결정되는 것이 순서였다. 본부는 해소문제 등을 다룰 1931년도 전국대회를 6월로 예정했으나, 준비가 부족하고 정종명이 조선국내공작위원회 사건으로 구속되는 등의 사유로 7월 4일로 연기했다. 그러나 대회는 지회의 호응을 얻지 못하여 몇 차례에 걸쳐 대의원이 정족수에 미달되는 일을 거듭한 끝에 끈태 유회되고 말았다. 결국 민족주의계가 주도하던 평양지회와 경성지회, 북청지회, 이원지회, 단천지회는 활동을 계속하였고, 반면에 신의주 지회와 용정지회는 전국대회의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해소를 결의하였다.
결국 근우회는 1931년 4월 26일 제 4회 정기대회 이후 해체기에 돌입하여 해체되고 말았다. 이러한 근우회의 해체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혁명적 농조, 노조 운동과 결합하여 노농운동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 측면이 있는 반면에 대중과 직접 접
둘째, 노동여성 조직화에 노력하여 1929년 전국대회에서 노농부의 설치를 보았으며, 노동여성을 주된 대상으로 한 경동지회를 설립(1930.4.15)하고, 노동부인에 대한 통계 작성 보고를 전국의 지회에 요구하는 한편 광주제사분규와 부산맹파사건을 당지 지회에 조사케 하는 등 노동운동 조사 지원활동도 전개했다. 셋째로는 여학생 운동에 큰 관심을 쏟아 조사지원은 물론 1930년 1월의 경성여학생 시위에 깊숙이 개입하여 간부가 대거 검거된 일도 있었다. 실상 근우회가 가장 투쟁성을 발휘한 분야가 바로 이 여학생운동이었는데 그것은 당시의 여성운동이 여학생층에 의지하는 바가 크며, 여학생들이 투쟁력이 상대적으로 강하고 근우회가 학생부를 두어 그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던 데서 비롯된 현상이었다.
ⅳ. 해체와 역사적 성격
신간회와 더불어 좌우합작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창설된 근우회는 해체도 역시 신간회와 연관성을 가지게 되었다.
근우회 해소는 단순히 근우회라고 하는 한 단체의 해체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근우회가 가지는 전술적, 조직적 오류를 시정하는 하나의 과도적 운동이었다.
전국적으로 볼 때 근우회 해소론이 나타나는 시기는 1931년 2월부터이다. 근우회 해소론은 근우회가 소부르주아 여성들이 모인 소부르주아적 단체이고, 노동여성을 조직화해 내는 데 실패했으며, 투쟁성을 보유하지 못하여 창립 후 아무런 역할도 해오지 못했다는 것, 따라서 근우회의 존재는 오히려 운동에 방해가 될 뿐이며, 근우회를 해체하고 노동조합, 농민조합 여성운동에 매진하는 것이 옳다는 입장이었다.
해소는 전국대회에 회부되어 지회의 총의에 의해 가부가 결정되는 것이 순서였다. 본부는 해소문제 등을 다룰 1931년도 전국대회를 6월로 예정했으나, 준비가 부족하고 정종명이 조선국내공작위원회 사건으로 구속되는 등의 사유로 7월 4일로 연기했다. 그러나 대회는 지회의 호응을 얻지 못하여 몇 차례에 걸쳐 대의원이 정족수에 미달되는 일을 거듭한 끝에 끈태 유회되고 말았다. 결국 민족주의계가 주도하던 평양지회와 경성지회, 북청지회, 이원지회, 단천지회는 활동을 계속하였고, 반면에 신의주 지회와 용정지회는 전국대회의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해소를 결의하였다.
결국 근우회는 1931년 4월 26일 제 4회 정기대회 이후 해체기에 돌입하여 해체되고 말았다. 이러한 근우회의 해체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혁명적 농조, 노조 운동과 결합하여 노농운동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 측면이 있는 반면에 대중과 직접 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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