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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 1장 ‘윤리학의 역사’의 철학적인 측면
제 2장 철학 발생 이전의‘좋음(good)'의 역사와 철학으로서의 전이
제 3장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
제 4장 플라톤 : 『고르기아스』
제 5장 플라톤 : 『국 가』
제 6장 플라톤 : 『기 준』
제 7장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제 8장 그리스 윤리학 후기
제 9장 기 독 교
제 10장 루터, 마키아벨리, 홉스, 스피노자
제 11장 새로운 가치들
제 12장 18세기 영국에서의 논의
제 2장 철학 발생 이전의‘좋음(good)'의 역사와 철학으로서의 전이
제 3장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
제 4장 플라톤 : 『고르기아스』
제 5장 플라톤 : 『국 가』
제 6장 플라톤 : 『기 준』
제 7장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제 8장 그리스 윤리학 후기
제 9장 기 독 교
제 10장 루터, 마키아벨리, 홉스, 스피노자
제 11장 새로운 가치들
제 12장 18세기 영국에서의 논의
본문내용
한다는 의미
② 플라톤의 주장이 옳다면 프로타고라스는 가르칠 권리가 없다는 결론이 나옴.
→ 이유 : 어느 누구의 주장도 다른 사람의 주장보다 더 진리에 가까울 수는 없기 때문.
③ 정의의 기준이 국가마다 다르다고 주장
→ “어떤 도시에서건 정의롭고 찬양할만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그 도시에서 그렇게 생각되는 한 정의롭고 찬양할 만한 것이다.”
→ but, 도시가 다르면 기준도 완전히 달라야 한다거나 혹은 완전히 다를 수 있다는 결론이 따라 나오는 것은 아니다.
▶ 소피스트들이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주장을 하게 된 배경
“국가마다 지배적인 기준이 다르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는 것일 뿐이라면, 그들에게 행위의 기준이 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제공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아무 것도 도출해 낼 수 없다. 각 개인들은 서로 다른 국가의 서로 다른 기준들 사이에서(어디에서,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은 선택할 것인가?) 스스로 선택해야만 하며, 우연히 자신이 살게 된 곳에서 지배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을 어느 정도나 진지하게 존중할 것인가 여부도 또한 스스로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① “무엇을 해야 하는가?”,“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질문과 그에 대해 가능한 대답 양자 모두는 ‘도덕과 무관한 도덕 이전의 것’으로 다루어져야만 한다.
→ 이 지점에서 자연(퓌시스)과 관습(노모스)을 구별하는 새로운 용법 발견.
“자신에게 주어진 나라에서 살면서 그 곳에서 요구되는 기준에 순응하는 사람은
관습의 피조물(creature of convention)이다 ; 어떤 국가에서 살건 똑같이 편안함을 느끼거나 혹은 어떤 국가에서도 똑같이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면서, 자기 자신의 개인적이고 사적인 목적에만 의거하는 사람은 자연의 피조물(creature of nature)이다.“
② 소피스트들이 취했던 관점.
ⅰ) 모든 관습적인 인간 속에 숨어있는 인간이 드러나면서, ‘개별 행위자의 관점’을 ‘사회적으로 확립된 관습의 관점’에서 분리하고, 그 사회적인 관습을 받아들이는가 거절하는가 여부는 개별적인 행위자에게 달려있는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ⅱ) ‘도덕적인 것’과 ‘관습적인 것’을 동일시하는 견해가 더해지면, ‘도덕 이전의, 도덕과 무관한 행위자(premoral and nonmoral agent)\'와 ’자연적인 인간‘이 완전하게 동일시함.
자기 자신의 도덕적 기준이 전혀 존재하지 않음.
다른 사람들에 의해 부과된 모든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움.
모든 사람은 그 본성상 늑대 아니면 양(먹지 않으면 먹히는 것)
▶ 소크라테스
: 도덕적 보수주의를 찬양하며, 도덕적 혁신에 대해서는 경멸하고 있다.
① 이유 : “도덕적 표현은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기존의 관습으로부터 아무 것도 분명히 할 수 없었기 때문
ㄱ. 자신 이전의 것들에서 도덕적 개념을 발견할 수 없었음.
ㄴ. 따라서, 자신의 무지를 발견해 내는 것은 확고한 도덕적 목표 가운데 하나로 잔존하게됨.
② 소피스트와 의견을 같이하는 점은, “아레테는 가르칠 수 있는 것이다.”라는 주장을 받아들인 사실.
③ 소피스트와의 차이
ⅰ) 가르치는 사람(교사)이 존재함을 부인(소피스트는 교사 인정)
ⅱ) 도덕적 개념에 대한 기준이 필요하다고 주장(소피스트는 기준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 개념이 ‘어떤 형태의 개념’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는 도덕적인 말들이 ‘말’이라면, 그것들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기준이 있어야만 한다. 그것들을 사용하기 위한 규칙, 다시 말해서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규칙, 사회적으로 확립되고 공유되는 규칙이 없다면, 그것들은 우리 언어의 일부가 될 수 없다.
ⅲ) 소피스트 : 단지 ‘어떤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것도 좋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
소크라테스 :『뤼시스(Lysis)』에서, 어린 아이에게 그에게 좋은 것을 주는 것은 그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고 지적
→ 우리가 원하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④ “덕은 앎이다,”
ㄱ. 소크라테스는 주지주의자(intellectualist)
ㄴ. “어느 누구도 자기 의지에 따라(willingly)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 소크라테스가 정의 내리는 방법
X가 ‘경건함’, ‘정의’ 등과 같은 도덕적 자질의 이름이라고 해보자.
이 경우 우리는 “소크라테스는 자기 스스로가 제기한 ‘X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전혀 답변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가 행한 탐구에 있어서 전적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중요한 점은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앎’이라는 형태로 자신에 대한 앎을 가지도록 해 주는 것이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덕은 한 번에 성취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목표이다.
ㄱ. 소크라테스처럼 도덕적 개념을 분석함으로써 당시의 도덕적 결함이 있음을 보여주는 철학자들은, 대개의 경우 철학자의 명망을 가지지 못함.
ㄴ. 그들에게 사형을 내리는 것은 시간 낭비. 그러나, 권력자들에게는 성가신 존재
호머의 신화는 실제 사회의 작용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 사회에서 사용되는 도덕과 가치에 관한 평가들에는 거의 기능에 따라 조직된 형태의 사회가 전제되어 있다. 반면 우주의 질서에 대한 후대의 주장에 반영된 것은 당시에 존재하는 사회구조가 아니라, 과거에 존재했던 사회구조, 혹은 살아남고자 발버둥치는 사회구조인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과거의 사회가 해체되어 도시국가로 변해 가는 것에 대한 보수적인 항변이다. 신화 그 자체로 인해 우주질서와 사회질서 사이의 차이점에 대한 의문이 필연적으로 생겨나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러한 질문이 첨예화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질서가 존재함을 광범위하게 자각하는 데서 기인한다.
→ 작은 공동체적 사회질서를 넘어서 ‘우주가 어떻다’는 가치평가적 진술을 사용할 수 없다.
* 노모스 : 구체적인 사회질서, 퓌시스 : 물리의 세계, 자연의 세계
① 노모스에 대한 실효성, 의문을 제기하게 될 때 퓌시스에
② 플라톤의 주장이 옳다면 프로타고라스는 가르칠 권리가 없다는 결론이 나옴.
→ 이유 : 어느 누구의 주장도 다른 사람의 주장보다 더 진리에 가까울 수는 없기 때문.
③ 정의의 기준이 국가마다 다르다고 주장
→ “어떤 도시에서건 정의롭고 찬양할만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그 도시에서 그렇게 생각되는 한 정의롭고 찬양할 만한 것이다.”
→ but, 도시가 다르면 기준도 완전히 달라야 한다거나 혹은 완전히 다를 수 있다는 결론이 따라 나오는 것은 아니다.
▶ 소피스트들이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주장을 하게 된 배경
“국가마다 지배적인 기준이 다르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는 것일 뿐이라면, 그들에게 행위의 기준이 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제공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아무 것도 도출해 낼 수 없다. 각 개인들은 서로 다른 국가의 서로 다른 기준들 사이에서(어디에서,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은 선택할 것인가?) 스스로 선택해야만 하며, 우연히 자신이 살게 된 곳에서 지배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을 어느 정도나 진지하게 존중할 것인가 여부도 또한 스스로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① “무엇을 해야 하는가?”,“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질문과 그에 대해 가능한 대답 양자 모두는 ‘도덕과 무관한 도덕 이전의 것’으로 다루어져야만 한다.
→ 이 지점에서 자연(퓌시스)과 관습(노모스)을 구별하는 새로운 용법 발견.
“자신에게 주어진 나라에서 살면서 그 곳에서 요구되는 기준에 순응하는 사람은
관습의 피조물(creature of convention)이다 ; 어떤 국가에서 살건 똑같이 편안함을 느끼거나 혹은 어떤 국가에서도 똑같이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면서, 자기 자신의 개인적이고 사적인 목적에만 의거하는 사람은 자연의 피조물(creature of nature)이다.“
② 소피스트들이 취했던 관점.
ⅰ) 모든 관습적인 인간 속에 숨어있는 인간이 드러나면서, ‘개별 행위자의 관점’을 ‘사회적으로 확립된 관습의 관점’에서 분리하고, 그 사회적인 관습을 받아들이는가 거절하는가 여부는 개별적인 행위자에게 달려있는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ⅱ) ‘도덕적인 것’과 ‘관습적인 것’을 동일시하는 견해가 더해지면, ‘도덕 이전의, 도덕과 무관한 행위자(premoral and nonmoral agent)\'와 ’자연적인 인간‘이 완전하게 동일시함.
자기 자신의 도덕적 기준이 전혀 존재하지 않음.
다른 사람들에 의해 부과된 모든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움.
모든 사람은 그 본성상 늑대 아니면 양(먹지 않으면 먹히는 것)
▶ 소크라테스
: 도덕적 보수주의를 찬양하며, 도덕적 혁신에 대해서는 경멸하고 있다.
① 이유 : “도덕적 표현은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기존의 관습으로부터 아무 것도 분명히 할 수 없었기 때문
ㄱ. 자신 이전의 것들에서 도덕적 개념을 발견할 수 없었음.
ㄴ. 따라서, 자신의 무지를 발견해 내는 것은 확고한 도덕적 목표 가운데 하나로 잔존하게됨.
② 소피스트와 의견을 같이하는 점은, “아레테는 가르칠 수 있는 것이다.”라는 주장을 받아들인 사실.
③ 소피스트와의 차이
ⅰ) 가르치는 사람(교사)이 존재함을 부인(소피스트는 교사 인정)
ⅱ) 도덕적 개념에 대한 기준이 필요하다고 주장(소피스트는 기준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 개념이 ‘어떤 형태의 개념’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는 도덕적인 말들이 ‘말’이라면, 그것들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기준이 있어야만 한다. 그것들을 사용하기 위한 규칙, 다시 말해서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규칙, 사회적으로 확립되고 공유되는 규칙이 없다면, 그것들은 우리 언어의 일부가 될 수 없다.
ⅲ) 소피스트 : 단지 ‘어떤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것도 좋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
소크라테스 :『뤼시스(Lysis)』에서, 어린 아이에게 그에게 좋은 것을 주는 것은 그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고 지적
→ 우리가 원하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④ “덕은 앎이다,”
ㄱ. 소크라테스는 주지주의자(intellectualist)
ㄴ. “어느 누구도 자기 의지에 따라(willingly)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 소크라테스가 정의 내리는 방법
X가 ‘경건함’, ‘정의’ 등과 같은 도덕적 자질의 이름이라고 해보자.
이 경우 우리는 “소크라테스는 자기 스스로가 제기한 ‘X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전혀 답변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가 행한 탐구에 있어서 전적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중요한 점은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앎’이라는 형태로 자신에 대한 앎을 가지도록 해 주는 것이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덕은 한 번에 성취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목표이다.
ㄱ. 소크라테스처럼 도덕적 개념을 분석함으로써 당시의 도덕적 결함이 있음을 보여주는 철학자들은, 대개의 경우 철학자의 명망을 가지지 못함.
ㄴ. 그들에게 사형을 내리는 것은 시간 낭비. 그러나, 권력자들에게는 성가신 존재
호머의 신화는 실제 사회의 작용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 사회에서 사용되는 도덕과 가치에 관한 평가들에는 거의 기능에 따라 조직된 형태의 사회가 전제되어 있다. 반면 우주의 질서에 대한 후대의 주장에 반영된 것은 당시에 존재하는 사회구조가 아니라, 과거에 존재했던 사회구조, 혹은 살아남고자 발버둥치는 사회구조인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과거의 사회가 해체되어 도시국가로 변해 가는 것에 대한 보수적인 항변이다. 신화 그 자체로 인해 우주질서와 사회질서 사이의 차이점에 대한 의문이 필연적으로 생겨나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러한 질문이 첨예화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질서가 존재함을 광범위하게 자각하는 데서 기인한다.
→ 작은 공동체적 사회질서를 넘어서 ‘우주가 어떻다’는 가치평가적 진술을 사용할 수 없다.
* 노모스 : 구체적인 사회질서, 퓌시스 : 물리의 세계, 자연의 세계
① 노모스에 대한 실효성, 의문을 제기하게 될 때 퓌시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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