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 전체 줄거리
2 . 분단문학
3 . 상징적 의미
4 . 삶의 본질과 통찰 그리고 ,비극적 세계관
5 . 이명준의 자아
6 . 실향민의식과 소외의식
7 . 이데올로기와 개인의 존재
8 . 두 이념의 허상과 실상
9 . 밀실과 광장
* . 현재 사회에서 광장과 밀실은 공존할 수 있는가?
2 . 분단문학
3 . 상징적 의미
4 . 삶의 본질과 통찰 그리고 ,비극적 세계관
5 . 이명준의 자아
6 . 실향민의식과 소외의식
7 . 이데올로기와 개인의 존재
8 . 두 이념의 허상과 실상
9 . 밀실과 광장
* . 현재 사회에서 광장과 밀실은 공존할 수 있는가?
본문내용
있을 뿐이다.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음흉한 속셈을 차리고 있다. 진실하지 못하면 사람은 넓은 광장 보다는 밀실에 가서 진실을 숨기려고 한다.
(느낀점)
이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광장과 밀실의 개념은 따로 분리 독립해서 존재하는 실체들이 아니라 결론적으로는 한가지의 실체를 이루는 동일한 개념인 것이다. ‘광장’은 남북한의 문제를 밀실과 광장이라는 인간의 본래적인 존재의 문제와 연결시켜 놓았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겐 누구나 자기의 고유의 밀실이 필요하면서, 동시에 타인과 교섭하면서 공동체적 삶을 살 광장이 필요한 것이다.
9-1.현재 사회에서 광장과 밀실은 공존할 수 있는가?
소설에 나온 밀실과 광장을 단지 6.25를 전후한 특별한 시기, 특별한 상황에 국한되는 개념으로 생각하지 말고, 현재 지금은 사적인 영역인 밀실도 보장되고 공적인 영역인 광장도 보장된 시대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형식적으로만 보면 확실히 이 시대는 밀실과 광장이 다 보장된 것처럼 보인다. 저마다 자신의 시간을 가지고 자기만의 공간에서 자기를 위해 시간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누구나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열린 공간에서 자유롭게 활동을 하고 있습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자신만의 시공간’을 사용하고 있을까?? 또 우리가 사회에서 생활하는 그 시간과 그 공간에서 진실로 공적인 것, 이를테면 모두의 이익을 위해 자기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가도 의문이다. 한마디로 공적인 영역도, 사적인 영역도 다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오늘날‘개인(주의)’과 ‘공동체(주의)’라는 것과 바로 통하는 것이다.
9-2. ‘광장’은 없다
공동체(광장)를 위해서 개인(밀실)을 포기하라는 요구 .그리고 이것이 《광장》의 주인공 명준이 북한 사회에서 발견한 모습, 즉 ‘밀실 없는 광장’이기도 한다. 과연 그렇게 열심히 사회생활을 하는 목적은 무언가?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말로 공적인 이익을 위한 건가?, 아니면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건가? 공공의 이익을 목적으로 활동하는 몇몇의 사람들을 빼놓고는 전부 다가 전적으로 개인의 이익을 위해 열심히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맺는 사회적 관계도 사회의 발전을 위한 것인가?,아니면 자기 이익을 위한 관계인가? 저마다 명목상 공동체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공동체가 없다. 대신 그 자리는 개인의 이익만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공적인 영역에서 사적인 이익을 위해 살고 있다.’‘우리에게 광장, 즉 공적인 영역은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사적인 이익을 위한 만남뿐.’ 사실 우리는 마치 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해 왔다. 그러면서 남이 자기 이익을 위해 무언가를 주장하면 ‘집단이기주의’하면서 덤벼들었다. 사실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더 심한 이기주의자이다.
9-3. ‘밀실’도 없다
모두가 사적인 이익을 위해 살고 있다면 우리에게 있는 거라곤 오직 ‘밀실’뿐일까? 하지만 그렇지도 않다. ‘개인적인 시공간은 없다. 그 모든 것은 공적인 영역을 위한 시공간일 뿐이다.'‘밀실은 없다. 광장만 있을 뿐.’
9-4. 밀실 없는 광장 = 광장 없는 밀실
현대인의 삶이 간단하게 정리하면 밀실도 없고 광장도 없다. 형식적으로는 밀실도 있고 광장도 있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밀실 없는 광장’이요, ‘광장 없는 밀실’이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맞물려 있다. 사실은 같은 말이다. 그래서 모두들 똑같은 목표, 똑같은 삶을 들고 서로 조금이라도 더 가져보려고 싸우고만 있다. 광장도 없고 밀실도 없는 이곳은 도대체 무엇이 메우고 있을까??
9-5. 왜 이렇게 됐을까?
근대 사회가 성립되면서 모든 개인의 공적인 활동은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한 삶으로 단일화 되었다. 한 마디로, 모두가 먹고 살기 위한 목적에서만 사회생활을 한다. 이렇게 현대인 전부가 똑같아졌다. 이런 삶에서 어떻게 진정한 개인이, 진정한 밀실이 있을 수 있을까?
근대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 운명을 자기가 책임지는 개인이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자기 손발을 움직여서 자기 삶을 스스로 꾸려 나가는 존재이다. 하지만 어떻게 사람들의 양심이나 사상이 이렇게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을까?
이런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까닭은 사람들이 자기만의 생각이나 자기만의 삶을 갖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남과 다르면 뭔가 피해를 입는다고 생각한다. 신분의 구속에서 해방되어‘개인’이 되었는데, 막상 진짜 개인이 되면 거대한 힘에 의해 짓밟힌다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거대한 힘이란? 현대인들의 삶은 시장을 벗어나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태어나면서부터 죽는 순간까지, 아침에 눈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드는 때까지, 어느 것 하나도 시장을 벗어나지를 못한다. 개인적 영역(밀실)이든 사회적 영역(광장)이든 몽땅 시장이 돼버렸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즉 이 둘이 합쳐진 사회(=시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은 이제 자기 운명을 책임지는 유일한 길이 사회(=시장)의 유일신인 물신의 은총을 받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제 생각은 온데간데없고, 자기만의 삶도 온데간데없고, 모두가 똑같아졌다.
그 결과는 남과는 다른 나만의 나, 곧 밀실을 잃어버렸다. 공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진정한 의미의 광장을 잃어버린 것이다.
9-6. 밀실과 광장의 바람직한 관계
명준처럼 도피할 수도, 죽음을 택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현실을 그냥 받아들일 수도 없다. 밀실과 광장의 바람직한 관계‘밀실 없는 광장 없고, 광장 없는 밀실 없다!’는 이 둘은 서로 맞물려 있고, 그 바람직한 관계는 ‘밀실과 광장의 공존(共存)’이다.
광장에 뛰어들었다 하더라도 현실의 광장은 나에게 큰 시련을 안겨주는 곳이다. 내가 기껏 생각한 것, 꿈꾼 것은 광장에서 여지없이 깨어진다. 그러나 그렇게 깨어질 때 나를 보호해 주는 곳바로 ‘밀실’이다.
따라서 밀실을 가진 자는 광장에서 좌절하지 않는다. 광장은 내가 깨지는 곳이기만 한 곳은 아니다. 그곳에서 동지를 만나고, 이렇게 밀실을 갖춘 광장인들의 연대의 망이 하나둘 이어질 때, 비로소 밀실과 광장의 공존을 본격적으로 꿈꾸게 된다.
(느낀점)
이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광장과 밀실의 개념은 따로 분리 독립해서 존재하는 실체들이 아니라 결론적으로는 한가지의 실체를 이루는 동일한 개념인 것이다. ‘광장’은 남북한의 문제를 밀실과 광장이라는 인간의 본래적인 존재의 문제와 연결시켜 놓았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겐 누구나 자기의 고유의 밀실이 필요하면서, 동시에 타인과 교섭하면서 공동체적 삶을 살 광장이 필요한 것이다.
9-1.현재 사회에서 광장과 밀실은 공존할 수 있는가?
소설에 나온 밀실과 광장을 단지 6.25를 전후한 특별한 시기, 특별한 상황에 국한되는 개념으로 생각하지 말고, 현재 지금은 사적인 영역인 밀실도 보장되고 공적인 영역인 광장도 보장된 시대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형식적으로만 보면 확실히 이 시대는 밀실과 광장이 다 보장된 것처럼 보인다. 저마다 자신의 시간을 가지고 자기만의 공간에서 자기를 위해 시간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누구나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열린 공간에서 자유롭게 활동을 하고 있습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자신만의 시공간’을 사용하고 있을까?? 또 우리가 사회에서 생활하는 그 시간과 그 공간에서 진실로 공적인 것, 이를테면 모두의 이익을 위해 자기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가도 의문이다. 한마디로 공적인 영역도, 사적인 영역도 다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오늘날‘개인(주의)’과 ‘공동체(주의)’라는 것과 바로 통하는 것이다.
9-2. ‘광장’은 없다
공동체(광장)를 위해서 개인(밀실)을 포기하라는 요구 .그리고 이것이 《광장》의 주인공 명준이 북한 사회에서 발견한 모습, 즉 ‘밀실 없는 광장’이기도 한다. 과연 그렇게 열심히 사회생활을 하는 목적은 무언가?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말로 공적인 이익을 위한 건가?, 아니면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건가? 공공의 이익을 목적으로 활동하는 몇몇의 사람들을 빼놓고는 전부 다가 전적으로 개인의 이익을 위해 열심히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맺는 사회적 관계도 사회의 발전을 위한 것인가?,아니면 자기 이익을 위한 관계인가? 저마다 명목상 공동체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공동체가 없다. 대신 그 자리는 개인의 이익만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공적인 영역에서 사적인 이익을 위해 살고 있다.’‘우리에게 광장, 즉 공적인 영역은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사적인 이익을 위한 만남뿐.’ 사실 우리는 마치 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해 왔다. 그러면서 남이 자기 이익을 위해 무언가를 주장하면 ‘집단이기주의’하면서 덤벼들었다. 사실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더 심한 이기주의자이다.
9-3. ‘밀실’도 없다
모두가 사적인 이익을 위해 살고 있다면 우리에게 있는 거라곤 오직 ‘밀실’뿐일까? 하지만 그렇지도 않다. ‘개인적인 시공간은 없다. 그 모든 것은 공적인 영역을 위한 시공간일 뿐이다.'‘밀실은 없다. 광장만 있을 뿐.’
9-4. 밀실 없는 광장 = 광장 없는 밀실
현대인의 삶이 간단하게 정리하면 밀실도 없고 광장도 없다. 형식적으로는 밀실도 있고 광장도 있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밀실 없는 광장’이요, ‘광장 없는 밀실’이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맞물려 있다. 사실은 같은 말이다. 그래서 모두들 똑같은 목표, 똑같은 삶을 들고 서로 조금이라도 더 가져보려고 싸우고만 있다. 광장도 없고 밀실도 없는 이곳은 도대체 무엇이 메우고 있을까??
9-5. 왜 이렇게 됐을까?
근대 사회가 성립되면서 모든 개인의 공적인 활동은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한 삶으로 단일화 되었다. 한 마디로, 모두가 먹고 살기 위한 목적에서만 사회생활을 한다. 이렇게 현대인 전부가 똑같아졌다. 이런 삶에서 어떻게 진정한 개인이, 진정한 밀실이 있을 수 있을까?
근대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 운명을 자기가 책임지는 개인이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자기 손발을 움직여서 자기 삶을 스스로 꾸려 나가는 존재이다. 하지만 어떻게 사람들의 양심이나 사상이 이렇게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을까?
이런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까닭은 사람들이 자기만의 생각이나 자기만의 삶을 갖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남과 다르면 뭔가 피해를 입는다고 생각한다. 신분의 구속에서 해방되어‘개인’이 되었는데, 막상 진짜 개인이 되면 거대한 힘에 의해 짓밟힌다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거대한 힘이란? 현대인들의 삶은 시장을 벗어나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태어나면서부터 죽는 순간까지, 아침에 눈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드는 때까지, 어느 것 하나도 시장을 벗어나지를 못한다. 개인적 영역(밀실)이든 사회적 영역(광장)이든 몽땅 시장이 돼버렸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즉 이 둘이 합쳐진 사회(=시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은 이제 자기 운명을 책임지는 유일한 길이 사회(=시장)의 유일신인 물신의 은총을 받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제 생각은 온데간데없고, 자기만의 삶도 온데간데없고, 모두가 똑같아졌다.
그 결과는 남과는 다른 나만의 나, 곧 밀실을 잃어버렸다. 공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진정한 의미의 광장을 잃어버린 것이다.
9-6. 밀실과 광장의 바람직한 관계
명준처럼 도피할 수도, 죽음을 택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현실을 그냥 받아들일 수도 없다. 밀실과 광장의 바람직한 관계‘밀실 없는 광장 없고, 광장 없는 밀실 없다!’는 이 둘은 서로 맞물려 있고, 그 바람직한 관계는 ‘밀실과 광장의 공존(共存)’이다.
광장에 뛰어들었다 하더라도 현실의 광장은 나에게 큰 시련을 안겨주는 곳이다. 내가 기껏 생각한 것, 꿈꾼 것은 광장에서 여지없이 깨어진다. 그러나 그렇게 깨어질 때 나를 보호해 주는 곳바로 ‘밀실’이다.
따라서 밀실을 가진 자는 광장에서 좌절하지 않는다. 광장은 내가 깨지는 곳이기만 한 곳은 아니다. 그곳에서 동지를 만나고, 이렇게 밀실을 갖춘 광장인들의 연대의 망이 하나둘 이어질 때, 비로소 밀실과 광장의 공존을 본격적으로 꿈꾸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