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렘브란트의 생애
- 렘브란트의 소개
- 레이덴에서의 젊은 시절
- 암스테르담에서의 초기시절
- 실험과 탐구
- 렘브란트의 작품들
- 말년의 생활
** 윌리엄 케리의 생애
1. 어린시절
2. 회심
3. 목사가 됨
4. 선교의 소명과 선교회 창설
5. 선교사로 출발
6. 인도선교
7. 케리의 죽음
- 윌리엄케리의 업적
- 위대한의 시도
- 렘브란트의 소개
- 레이덴에서의 젊은 시절
- 암스테르담에서의 초기시절
- 실험과 탐구
- 렘브란트의 작품들
- 말년의 생활
** 윌리엄 케리의 생애
1. 어린시절
2. 회심
3. 목사가 됨
4. 선교의 소명과 선교회 창설
5. 선교사로 출발
6. 인도선교
7. 케리의 죽음
- 윌리엄케리의 업적
- 위대한의 시도
본문내용
sis〉(1814)·〈인도의 꽃 Flora Indica〉(1832)을 편집·발행했으며, 학교에 산문 교과서를 보급하는 일을 도왔다. 그의 사회사업은 교육 차원에 그치지 않고 정부로 하여금 유아 살해, 미망인 분사(힌두교에서 남자가 죽으면 부인이 시체와 함께 장작더미 위에 올라가 불에 타 죽는 관습)와 같은 관습들을 추방하도록 촉구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또한 그는 인도인을 선교사로 삼을 것을 장려했으며, 1820년에는 인도 농업조합을 세우는 데 기여했다.
-. 위대한 시도
1793년 캐리가 32세 되던 해, 그는 인도영혼들을 향한 상한 목자의 심정을 안고 인도 선교사로 가고자 결단했다. 그러자 그 길을 가로막는 많은 장애물들이 나타났다.
첫째는 그의 아버지 였습니다.
아버지는 캐리의 말을 듣고 딱 한마디 했습니다.
'미친놈'.
둘째는 문맹의 평범한 주부였던 그의 아내였다. 그녀는 아기랑 캐리랑 아기 캐리한 삶을 살기 원했었다. 그녀는 캐리에게 '여보, 인도는 절대로 안돼요, 제발 우리 아기들도 좀 생각해 주세요.'.
그러나 캐리는 그녀에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고, 나는 그 부름에 응답했기 때문에 이제 돌이킬 수가 없소.'
캐리는 사랑하는 가족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고난의 길을 선택했다.
셋째는 교회 성도들이었다. 하비레인 교회의 성도들은 캐리와 같은 훌륭한 목회자를 잃는다는 생각으로 교회의 장래를 위해 절대로 목사님을 보내지 않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곧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간절히 기도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캐리의 중심을 보신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여 주셨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사랑하는 가족 모두와 처제, 그리고 토마스라는 선교 동역자와 함께 인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습니다. 그들이 인도땅에 도착했을 때, 인도는 선교할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힌두과부들은 사티(Sati)라는 제도에 따라 남편이 죽으면 함께 불에 타야했고, 갠지스 강가에선 'Gunga mai kai jai (갠지스강의 여신이여 영광을 받으소서)' 외치며 어린아이들을 악어가 득실한 강에 던지는, 그런 미신이 가득한 나라였다.
또, 당시 인도는 동인도 회사의 점령아래 있었고, 선교를 절대 금지하고 있었다. 캐리는 추방을 면하기위해 내륙으로 이동했는데, 그곳은 말라리아 창궐한 곳이었습니다. 아내 도로시와 큰아이 2명은 이질에 걸렸고, 한 아들을 잃게 되었고, 아내는 정신병에 걸리게 되었다.
열대기후와 입에 맞지 않는 음식들도 고난이 되었다. 캐리는 멋지게 선교를 하려던 이상적인 꿈이 산산이 깨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캐리는 그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하나님은 부요하신 분이시며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내가 이 하나님을 바라 보았을 때, 나의 모든 근심을 내어 맡길 수 있었습니다. 내가 설사 이곳에서 생명을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나에게 이 고귀한 사명이 맡겨진 사실만으로도 기뻐하고 또 기뻐하겠습니다.'
캐리는 자비량 선교의 본을 보였다.
그는 결코 본국의 선교회를 의지하지 않고 자립하고자 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인디고 공장의 감독으로 취업의 길을 열어주셨고, 캐리는 충분한 선교비를 벌면서 선교의 기초가 되는 인도어 정복에 온힘을 기울일 수 있었다.
1년후부터 그의 위대한 시도가 구체화 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캐리는 성경번역과 더불어 말씀을 전파하고 또 여러 학교를 세웠다. 그러나 벵갈에서 7년간 땀흘렸지만 단 한명의 인도인 개종자가 없었던것이 현실이었다. 그것은 큰 아픔이 아닐수 없었습니다.
1800년, 19세기가 시작되었을 때, 동인도 회사의 추방령으로 캐리는 선교기지를 덴마크 영내인 세람포르로 옮기게 되었고, 이곳에서 캐리가 인도에서 흘린 모든 눈물과 땀의 결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크리쉬나 팔이라는 첫 번째 개종자가 탄생한 것이다. 그가 카스트제도와 우상숭배를 거부하자 2천명의 군중이 그를 재판장으로 끌고 가기도 했었다.
그러나 회개와 변화의 역사가 줄기차게 일어나 그 후 18년간 600명이 세례를 받고 수천명이 예배에 참석하는 승리의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세람포르 역사가 흥왕히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합심동역에 있었다.
캐리와 워드와 마쉬만, 그들은 세람포르의 삼총사라 불리웠는데 23년간 팀을 이루어 서로간의 긴밀한 사랑의 교제로 힘을 얻으며 믿음의 역사를 이루었다.
대형화재로 인해 수년간 작업하여 완역한 성경원고와 두권의 문법책, 다국어 사전들이 소실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캐리는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삼총사는 팀웍을 새로이 갖추고 다시 도전다.
캐리는 편지에 '잃어버린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길을 두번 가는 것이 비록 고통스럽기는 하겠지만, 처음보다 훨씬 더 충실한 결과를 낳아 더 유익이 될것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벌써 다시 시작했습니다.'고 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낙망치 않고 도전하여 결국 수 많은 인도방언과 중국어 버마어 말레이어등 44개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 출판했다.
윌리암 캐리는 이처럼 그 일생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위대한 일을 시도함으로 인도선교의 기초를 쌓았던 것이다.
윌리암캐리는 그의 그칠 줄 모르는 열정과 도전으로 18세기 침체된 영국을 선교사를 파송하는 제사장 나라로 만들었다.
그가 인도에 끼친 영향은 언어학적 업적, 교육적인 공로, 목회사역뿐 아니라 과부의 화형이나 유아살해 같은 인도의 나쁜 관습을 폐지하고 좋은 전통을 계승시켜 나가는 데까지 미쳤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인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도 국외적으로도 런던선교회, 스코틀랜드의 글라스고우 선교회, 네덜란드 선교회, 교회 선교회, 영국 해외 성서공회, 미국 해외 선교위원회, 미국 침례교 선교협회, 미국 성서 공회가 창설되어 오늘날 선교의 기틀이 되게 한 중요한 업적이 있다.
그는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세계선교의 불을 댕긴 위대한 믿음의 용사였다. 그의 믿음으로 근대선교역사가 시작되었고 19세기 선교황금시대를 열게 되었고, 무엇보다 그 자신이 인도의 한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 수많은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 위대한 시도
1793년 캐리가 32세 되던 해, 그는 인도영혼들을 향한 상한 목자의 심정을 안고 인도 선교사로 가고자 결단했다. 그러자 그 길을 가로막는 많은 장애물들이 나타났다.
첫째는 그의 아버지 였습니다.
아버지는 캐리의 말을 듣고 딱 한마디 했습니다.
'미친놈'.
둘째는 문맹의 평범한 주부였던 그의 아내였다. 그녀는 아기랑 캐리랑 아기 캐리한 삶을 살기 원했었다. 그녀는 캐리에게 '여보, 인도는 절대로 안돼요, 제발 우리 아기들도 좀 생각해 주세요.'.
그러나 캐리는 그녀에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고, 나는 그 부름에 응답했기 때문에 이제 돌이킬 수가 없소.'
캐리는 사랑하는 가족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고난의 길을 선택했다.
셋째는 교회 성도들이었다. 하비레인 교회의 성도들은 캐리와 같은 훌륭한 목회자를 잃는다는 생각으로 교회의 장래를 위해 절대로 목사님을 보내지 않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곧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간절히 기도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캐리의 중심을 보신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여 주셨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사랑하는 가족 모두와 처제, 그리고 토마스라는 선교 동역자와 함께 인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습니다. 그들이 인도땅에 도착했을 때, 인도는 선교할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힌두과부들은 사티(Sati)라는 제도에 따라 남편이 죽으면 함께 불에 타야했고, 갠지스 강가에선 'Gunga mai kai jai (갠지스강의 여신이여 영광을 받으소서)' 외치며 어린아이들을 악어가 득실한 강에 던지는, 그런 미신이 가득한 나라였다.
또, 당시 인도는 동인도 회사의 점령아래 있었고, 선교를 절대 금지하고 있었다. 캐리는 추방을 면하기위해 내륙으로 이동했는데, 그곳은 말라리아 창궐한 곳이었습니다. 아내 도로시와 큰아이 2명은 이질에 걸렸고, 한 아들을 잃게 되었고, 아내는 정신병에 걸리게 되었다.
열대기후와 입에 맞지 않는 음식들도 고난이 되었다. 캐리는 멋지게 선교를 하려던 이상적인 꿈이 산산이 깨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캐리는 그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하나님은 부요하신 분이시며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내가 이 하나님을 바라 보았을 때, 나의 모든 근심을 내어 맡길 수 있었습니다. 내가 설사 이곳에서 생명을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나에게 이 고귀한 사명이 맡겨진 사실만으로도 기뻐하고 또 기뻐하겠습니다.'
캐리는 자비량 선교의 본을 보였다.
그는 결코 본국의 선교회를 의지하지 않고 자립하고자 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인디고 공장의 감독으로 취업의 길을 열어주셨고, 캐리는 충분한 선교비를 벌면서 선교의 기초가 되는 인도어 정복에 온힘을 기울일 수 있었다.
1년후부터 그의 위대한 시도가 구체화 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캐리는 성경번역과 더불어 말씀을 전파하고 또 여러 학교를 세웠다. 그러나 벵갈에서 7년간 땀흘렸지만 단 한명의 인도인 개종자가 없었던것이 현실이었다. 그것은 큰 아픔이 아닐수 없었습니다.
1800년, 19세기가 시작되었을 때, 동인도 회사의 추방령으로 캐리는 선교기지를 덴마크 영내인 세람포르로 옮기게 되었고, 이곳에서 캐리가 인도에서 흘린 모든 눈물과 땀의 결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크리쉬나 팔이라는 첫 번째 개종자가 탄생한 것이다. 그가 카스트제도와 우상숭배를 거부하자 2천명의 군중이 그를 재판장으로 끌고 가기도 했었다.
그러나 회개와 변화의 역사가 줄기차게 일어나 그 후 18년간 600명이 세례를 받고 수천명이 예배에 참석하는 승리의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세람포르 역사가 흥왕히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합심동역에 있었다.
캐리와 워드와 마쉬만, 그들은 세람포르의 삼총사라 불리웠는데 23년간 팀을 이루어 서로간의 긴밀한 사랑의 교제로 힘을 얻으며 믿음의 역사를 이루었다.
대형화재로 인해 수년간 작업하여 완역한 성경원고와 두권의 문법책, 다국어 사전들이 소실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캐리는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삼총사는 팀웍을 새로이 갖추고 다시 도전다.
캐리는 편지에 '잃어버린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길을 두번 가는 것이 비록 고통스럽기는 하겠지만, 처음보다 훨씬 더 충실한 결과를 낳아 더 유익이 될것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벌써 다시 시작했습니다.'고 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낙망치 않고 도전하여 결국 수 많은 인도방언과 중국어 버마어 말레이어등 44개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 출판했다.
윌리암 캐리는 이처럼 그 일생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위대한 일을 시도함으로 인도선교의 기초를 쌓았던 것이다.
윌리암캐리는 그의 그칠 줄 모르는 열정과 도전으로 18세기 침체된 영국을 선교사를 파송하는 제사장 나라로 만들었다.
그가 인도에 끼친 영향은 언어학적 업적, 교육적인 공로, 목회사역뿐 아니라 과부의 화형이나 유아살해 같은 인도의 나쁜 관습을 폐지하고 좋은 전통을 계승시켜 나가는 데까지 미쳤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인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도 국외적으로도 런던선교회, 스코틀랜드의 글라스고우 선교회, 네덜란드 선교회, 교회 선교회, 영국 해외 성서공회, 미국 해외 선교위원회, 미국 침례교 선교협회, 미국 성서 공회가 창설되어 오늘날 선교의 기틀이 되게 한 중요한 업적이 있다.
그는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세계선교의 불을 댕긴 위대한 믿음의 용사였다. 그의 믿음으로 근대선교역사가 시작되었고 19세기 선교황금시대를 열게 되었고, 무엇보다 그 자신이 인도의 한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 수많은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