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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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가야의 고분

Ⅲ. 고분의 분포

Ⅳ. 고분의 입지

Ⅴ. 고분의 구조

Ⅵ. 주요 고분

Ⅶ. 나오는 말

본문내용

죽여 함께 매장하는 장의행위를 말한다. 순장이 행하여진 배경에는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던 죽음에 대한 생각, 즉 내세관이 깔려있다. 고대인들은 사람이 죽은 후에 언젠가는 다시 살아나거나 아니면 저세사에 가서 살아간다고 믿었다. 장두환, 『문답으로 엮은 한국고대사 산책』, 역사비평사, 1994, pp307~313.
우리나라의 순장제도에 대하여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부여(夫餘)의 순장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에도 신라의 지증왕이 순장을 금지시킨 기록이 나와 있어 순장 사실을 알 수 있으며, 가야의 경우에는 기록에는 보이지 않지만 여러 지역의 고분에서 많은 순장 사례가 확인되고 있어 가야에서도 순장이 보편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분에서 순장 사실을 판단하는 기준은 첫째, 한 봉토분 안에 묘곽이 2기 이상이 있을 경우 동시에 축조되어야 한다. 둘째, 강제성이 보여야 합니다. 셋째, 고분 안에 2인 이상의 피장자가 있을 경우 피장자 사이에 신분적 격차, 즉 주인공에 대한 종속성이 인정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순장은 신라, 가야지역에 주로 분포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야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며, 주부곽순장묘(主副槨殉葬墓), 주실순장묘(主室殉葬墓), 순장곽순장묘(殉葬槨殉葬墓)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주인공의 묘실인 주실 외에 별도의 순장곽을 따로 매장하는 방식인 순장곽식 순장묘는 순장곽이 1기뿐인 단곽순장과 2기 이상인 다곽순장으로 구분되며, 이러한 순장곽 순장은 고령, 합천, 함양 등 대가야 지역에 주로 분포하고 있어 대가야식 순장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다곽순장묘는 현재까지의 예로는 대가야의 중심지인 고령 지산동고분군에만 분포하고 있으며 최대 규모가 지산동 44호분이다.
고령 지산동 44호 고분은 우리나라 순장묘로 가장 앞서 확인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5~6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이 무덤들에는 대가야 왕족들이 묻혀있다. 그 중 44호분은 3개의 큰 돌방을 32개의 돌덧널이 부채살모양으로 감싸고 있는 형태이다. 왕을 안치한 봉토 중앙에는 길이 9.4m의 주석실이 견고하게 짜여져 있고, 그 남쪽과 서쪽에는 왕의 부장품을 쌓아둔 부장석실이 각각 1기씩 있다. 주석실 중앙에 왕과 아래위에 두 명의 순장자가 토기와 함께 놓여 있으며 주석실을 중심으로 32개의 순장곽이 왕을 호위하듯 둥글게 배치되어 있어 왕의 권위를 실감하게 한다. 매일신문특별취재팀, 『잃어버린 왕국 대가야』, 도서출판 창해, 2005, pp22~27.
순장자들 중에서는 고리자루긴칼이나 화살촉 등의 무기를 소지한 자도 있었으며 금은이나 청동으로 만든 장신구를 한 자들도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생시의 신분이 제법 높았던 인물로 볼 수 있다.
Ⅶ. 나오는 말
고고학에서는 삼국시대를 가리켜 고분시대 또는 고분문화시대라고 한다. 고고학적으로 이 시대의 문화 복원이 주로 고분의 연구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고고학상으로 고분은 삼국시대의 문화, 사회상 등을 파악하는데 있어 표지적 존재가 되고 있다.
고분은 시대에 따라 발전하고 지역에 따라 다른 특색을 보인다. 따라서 고분을 통해 시대의 변화와 지역사회의 변모를 살펴볼 수 있다. 각 나라들은 자국의 영토와 인접지역의 앞선 묘제를 종합한 위에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고분을 축조했다. 정치적 필요에 따라 선진 외국의 묘제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무덤의 종류나 축조방식에 따라 정치세력의 통치범위를 추정해 낼 수도 있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권의 여러 나라들의 영역범위를 상정할 때에 고분 자료를 활용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가야의 경우 가야고분들은 각 소국들의 위치에 따라 옛 영역이었던 경상, 남북도 일대에 산재, 특히 낙동강 유역에 산재하고 있다. 가야고분은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다양한 종류와 형식이 존재하나 기본적으로는 상당한 공통성을 갖고 있다. 시기에 따라 몇 단계의 변화를 겪는데 원삼국시대의 널무덤에서 발전한 덧널무덤을 최초의 가야고분으로 이후 목관묘, 목곽묘, 수혈식 석곽묘, 옹관묘, 횡구식 석실묘, 횡혈식 석실묘로 변천되어 갔다. 이러한 고분들은 수도의 중심부에 위치하면서 왕실이나 귀족 가문이 그들의 위세를 뽐내면서, 안으로는 피지배층에게 지배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데 이용되었으며 밖으로는 국력을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고분은 시간이 흐르면서 무덤에 막대한 노동력과 재물을 쏟아 붓는 것이 경제적 낭비라는 인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6세기에 접어들면서 신라에서 이루어진 일련의 조처들, 즉 지증왕대의 순장금지, 법흥왕대의 율령 반포와 불교 공인 등은 고문문화의 쇠퇴와 함께 가야는 신라에 편입되게 되며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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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특별취재팀, 『잃어버린 왕국 대가야』, 도서출판 창해, 2005.
김원룡, 『한국의 고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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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3.31
  • 저작시기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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