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러시아의 이콘과 러시아 정교
1. 러시아의 그리이스 정교와 이콘의 전래
2. 러시아인들의 이콘과 이콘 숭상 문화
3. 이콘의 제작 과정
4. 러시아의 주요 이콘들
5. 주요 이콘 화가들
6. 소비에트 시대의 러시아 정교
7. 러시아 정교의 특징과 정교 교리.
1. 러시아의 그리이스 정교와 이콘의 전래
2. 러시아인들의 이콘과 이콘 숭상 문화
3. 이콘의 제작 과정
4. 러시아의 주요 이콘들
5. 주요 이콘 화가들
6. 소비에트 시대의 러시아 정교
7. 러시아 정교의 특징과 정교 교리.
본문내용
문장의 도입, 그리고 자주적 지배라는 의미의 짜르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 짜리는 정치적 측면에서 자신이 콘스탄티노플의 후계자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유럽으로부터의 간섭을 거부할 명분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 정교회는 성 힙볼리투스의 다니엘서의 재해석과 필로테우스가 바실리 3세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왕권의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즉 모스크바는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콘스탄티노플의 후계자이므로 모스크바의 짜르는 비잔틴 황제의 정당한 후계자이고 따라서 동방정교는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수호되고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제 3 로마론'은 결과적으로 군주에게는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러시아를 통합하는 것에 대한 이론적 근거와 짜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100년 후인 1589년에 독자적인 총대주교를 선출할 수 있는 자주권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러시아인들에게는 모스크바가 전기독교 세계의 중심이며 기도를 통해 전우주를 구원할 수 있다는 메시아니즘적 사고와 이를 바탕으로 하는 러시아 민족주의 전통의 기반을 마련해 주게 된다. 러시아정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이처럼 종교체계와 사회체계가 지나치게 용해되어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 정교는 도입부터 국가의 필요성에 의해 선택적으로 수용되었으며 이후 국가의 권력이 강화되었으며 국가에게 종교적 정당성을 제공해 주는 수단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와 국가의 조화라는 논리를 통해 국가권력(자)의 모든 것에 종교적 신성함을 부여해 주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러시아 정교회는 이후 농노제나 짜르체제 등의 사회적 문제에 대해 어떠한 저항도 거의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러시아 정교의 기본적인 교리는 보편주의, 상호의존성, 겸손,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 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적 평등의식과 자발적으로 조직되는 단일한 공동체 의식을 가져다주었다. 특히 러시아인들 모두를 하나의 거대한 가족으로 여기려는 러시아인의 성향은 자기희생을 통한 집단의 유지와 각각 개인의 독특한 가치의 조화에 대한 동방 기독교적 확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것은 기독교를 신봉하지 않는 동양의 공동체와 러시아의 공동체를 구별할 수 있게 하는 구분선이다. 러시아 정교는 통일과 조화, 상호의존성 등이 기반이 된 종교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성상화라는 상징을 통하여 그 의미가 표출되고 전달되었으며 사회적 영역과 충돌하면서 여러 모습의 문화형태로 재구성되었다. 현세지향적이고 민족적인 문화와 국가종속적인 문화, 평등지향적인 농민공동체, 끈질긴 애국주의 등은 바로 상징이 재구성된 '사회적 실재'였던 것이다. 역사 속에서의 러시아 정교문화는 현세지향적이었으며 국가에 종속적인 성격을 보여 주었다. 러시아 정교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러시아인들의 이러한 집단주의적 전통은 자연히 집단원칙에서 개인을 인식하며 사회이익에 개인의 이익을 복종시킨다. 그리하여 국가와 같은 사회적인 영역이 가장 우선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개인의 다양성이나 개성, 자율성은 허용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인민이라는 집단 앞에 강제로 위계화되는 것이다. 결국 개인화의 억압, 그리고 전체로서의 사회적 이익의 상징화 등이 러시아에서 전체주의적 체제를 가져 왔으며 이것은 러시아 정교의 기본 교리와도 연결되는 것이다.
신학적인 의미 없이 단지 장식용으로만 사용하던 서구 기독교와는 달리 동방정교의 성상화는 그림이라는 상징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고 있다. 성상화는 단순히 종교에 봉사하는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종교의 통합적인 한 부분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는 수단 가운데 하나이다. 즉 러시아의 성상화들은 기독교성(Christianity), 즉 인간으로서의 신의 구현, 그리스도의 고난, 십자가에 못 박힌 고뇌, 죽음과 지옥으로 떨어짐, 예수의 부활, 죄많은 인간에 대한 대속(구원) 설교를 통한 12사도의 전도, 성자들의 생과 투쟁, 순교, 예수의 생애, 구원에 이르기까지의 인간의 죄씻음과 순례 등을 가장 중요한 주제로 하고 있다. 러시아의 성상화는 12세기부터 비롯되는데 키예프의 동굴 수도원에 있던 성 알리피(St. Alipy)가 러시아 성상화의 원조라고 간주되고 있다. 그리고 15세기에 들어와 성상화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바로 성상화가 러시아적 혼의 상징이며 러시아인들의 일상 생활과 민간 문화의 통합된 부분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성상화 가운데에서 가장 대중적인 주제는 헌신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졌던 성모 마리아였다. 성모 마리아가 아기 그리스도를 안고 내려다보고 있는 성상화는 러시아의 모든 성상화 가운데서 가장 숭배되는 그림이며, 러시아의 어머니라는 이미지, 즉 하나님과의 평화라는 이미지를 통해 민족적 통일성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성모 성상화는 중세 러시아에는 신앙과 전투, 예술과 군대 사이의 밀접한 협력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보골류프스키(Andrew Bogoliubsky)는 성모 성상화를 도시의 방어를 고취시키기 위해 1395년에 모스크바에 가져오기도 하였으며 '카잔의 성모'라는 이름의 성상화는 이반 뇌제가 카잔에서 타타르를 물리친 것이 성상화의 힘이었다고 본다. 성상화가 정교회에서 이처럼 중요하게 자리잡게 된 것은 동방정교에서는 사제의 설교가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글을 읽을 줄 몰랐고 교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들은 교회의 많은 원칙들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단지 그들이 이전에 들었던 것만을 상상하거나 유추하곤 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상화는 농민들의 바이블이나 다름없는 것이었고, 그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대다수 러시아인들은 성상화에 그려진 그림을 통해서 정교의 가르침을 느끼고 실천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성상화는 러시아 문화의 상징으로 모든 집에 걸려있게 되었으며 19세기까지 러시아 농민들은 오두막집의 성상화를 걸어두는 장소- 식탁 위의 '성스러운' 구석-를 정하고 거룩한 장소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손님은 집안에 들어오면 우선 성상화를 찾고 그 앞에 머리를 숙이며 세 번 성호를 긋는다. 그런 다음에 비로소 주인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고 인사를 한다.
러시아 정교의 기본적인 교리는 보편주의, 상호의존성, 겸손,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 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적 평등의식과 자발적으로 조직되는 단일한 공동체 의식을 가져다주었다. 특히 러시아인들 모두를 하나의 거대한 가족으로 여기려는 러시아인의 성향은 자기희생을 통한 집단의 유지와 각각 개인의 독특한 가치의 조화에 대한 동방 기독교적 확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것은 기독교를 신봉하지 않는 동양의 공동체와 러시아의 공동체를 구별할 수 있게 하는 구분선이다. 러시아 정교는 통일과 조화, 상호의존성 등이 기반이 된 종교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성상화라는 상징을 통하여 그 의미가 표출되고 전달되었으며 사회적 영역과 충돌하면서 여러 모습의 문화형태로 재구성되었다. 현세지향적이고 민족적인 문화와 국가종속적인 문화, 평등지향적인 농민공동체, 끈질긴 애국주의 등은 바로 상징이 재구성된 '사회적 실재'였던 것이다. 역사 속에서의 러시아 정교문화는 현세지향적이었으며 국가에 종속적인 성격을 보여 주었다. 러시아 정교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러시아인들의 이러한 집단주의적 전통은 자연히 집단원칙에서 개인을 인식하며 사회이익에 개인의 이익을 복종시킨다. 그리하여 국가와 같은 사회적인 영역이 가장 우선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개인의 다양성이나 개성, 자율성은 허용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인민이라는 집단 앞에 강제로 위계화되는 것이다. 결국 개인화의 억압, 그리고 전체로서의 사회적 이익의 상징화 등이 러시아에서 전체주의적 체제를 가져 왔으며 이것은 러시아 정교의 기본 교리와도 연결되는 것이다.
신학적인 의미 없이 단지 장식용으로만 사용하던 서구 기독교와는 달리 동방정교의 성상화는 그림이라는 상징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고 있다. 성상화는 단순히 종교에 봉사하는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종교의 통합적인 한 부분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는 수단 가운데 하나이다. 즉 러시아의 성상화들은 기독교성(Christianity), 즉 인간으로서의 신의 구현, 그리스도의 고난, 십자가에 못 박힌 고뇌, 죽음과 지옥으로 떨어짐, 예수의 부활, 죄많은 인간에 대한 대속(구원) 설교를 통한 12사도의 전도, 성자들의 생과 투쟁, 순교, 예수의 생애, 구원에 이르기까지의 인간의 죄씻음과 순례 등을 가장 중요한 주제로 하고 있다. 러시아의 성상화는 12세기부터 비롯되는데 키예프의 동굴 수도원에 있던 성 알리피(St. Alipy)가 러시아 성상화의 원조라고 간주되고 있다. 그리고 15세기에 들어와 성상화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바로 성상화가 러시아적 혼의 상징이며 러시아인들의 일상 생활과 민간 문화의 통합된 부분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성상화 가운데에서 가장 대중적인 주제는 헌신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졌던 성모 마리아였다. 성모 마리아가 아기 그리스도를 안고 내려다보고 있는 성상화는 러시아의 모든 성상화 가운데서 가장 숭배되는 그림이며, 러시아의 어머니라는 이미지, 즉 하나님과의 평화라는 이미지를 통해 민족적 통일성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성모 성상화는 중세 러시아에는 신앙과 전투, 예술과 군대 사이의 밀접한 협력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보골류프스키(Andrew Bogoliubsky)는 성모 성상화를 도시의 방어를 고취시키기 위해 1395년에 모스크바에 가져오기도 하였으며 '카잔의 성모'라는 이름의 성상화는 이반 뇌제가 카잔에서 타타르를 물리친 것이 성상화의 힘이었다고 본다. 성상화가 정교회에서 이처럼 중요하게 자리잡게 된 것은 동방정교에서는 사제의 설교가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글을 읽을 줄 몰랐고 교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들은 교회의 많은 원칙들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단지 그들이 이전에 들었던 것만을 상상하거나 유추하곤 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상화는 농민들의 바이블이나 다름없는 것이었고, 그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대다수 러시아인들은 성상화에 그려진 그림을 통해서 정교의 가르침을 느끼고 실천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성상화는 러시아 문화의 상징으로 모든 집에 걸려있게 되었으며 19세기까지 러시아 농민들은 오두막집의 성상화를 걸어두는 장소- 식탁 위의 '성스러운' 구석-를 정하고 거룩한 장소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손님은 집안에 들어오면 우선 성상화를 찾고 그 앞에 머리를 숙이며 세 번 성호를 긋는다. 그런 다음에 비로소 주인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고 인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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