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I. 서 론
II. 저강도 분쟁의 정의
III.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장기적인 혁명전의 발발
1. 공군의 비공식적인 대응
2. 공군의 공식적인 대응
IV. 베트남전쟁과 사회구조의 파괴 및 영향
1. 교리의 비공식적인 대응
2. 교리의 공식적인 대응
V. 지적인 열정과 공식적인 경멸
VI. 결 론
II. 저강도 분쟁의 정의
III.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장기적인 혁명전의 발발
1. 공군의 비공식적인 대응
2. 공군의 공식적인 대응
IV. 베트남전쟁과 사회구조의 파괴 및 영향
1. 교리의 비공식적인 대응
2. 교리의 공식적인 대응
V. 지적인 열정과 공식적인 경멸
VI. 결 론
본문내용
artland)도 없고 고정된 산업시설도 없으며, 폭격해야 할 병참선도 거의 갖고 있지 않다.........반란군의 비정규군은 소규모 부대로 분산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공중 공격의 표적으로서는 빈약하다. 이러한 경우에 주민의 안전과 반란군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공중 지원 작전은 주로 내부 보안 부대의 지상 요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그들을 배치, 지원, 증강시키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 상게서, 9-10, par. 3-3b.
이 두 단락은 작전 교리에 관한 진술문 이상의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전통적인 초기 항공력 이론가들의 항공력 이론을 종합하였다. 즉 이 단락은 그들이 제시한 전쟁의 유형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항공력 이론을 근거로 하여 작성된 것이다.
따라서, 1992년 항공요원들은 반란이나 또는 장기적인 혁명전이라는 특수한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전통적인 항공력 이론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고 있는 동안에도 다른 한 편에서는 그러한 발전을 억제하고 혼란시킬 수 있는 아주 다른 일련의 사건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장기적인 혁명전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은 결코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었고, 상당수의 장교들(대부분 고급 장교들이 많았음)은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그러한 "비전통적"인 전략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비생산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였다. 예를 들면, 1980년대 중반에 공군의 한 고위 장군은 "우리 공군은 그런 유형의 전쟁(반란전)으로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전쟁은 "대충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생사가 연관이 있는 전쟁에 대해서 연구노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필자에게 말하였다.
결국, 항공력의 입장에서 볼 때 장기적인 혁명전은 일반적이고 중요하지도 않으며 비생산적이라는 상당수의 고급 장교들의 소신 때문에 공군교리의 최고 규범인 AFM 1-1 미 공군 항공우주 기본교리(1992)에서 그 주제에 관한 논의가 배제되었다. 따라서 아주 힘들게 개발한 그 이론은 하위수준의 작전 교리 교범인 AFM 2-11에서만 남게 되었다.
) 나는 팀장으로서 1992년 3월에 출판된 공군 기본 교리의 주요 저자 중 한 사람이다. 그 교범의 초안에는 장기적인 혁명전의 특징에 관한 광범위한 정보와 그러한 분쟁에 있어서 항공력의 사용에 관한 여러 가지 논평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모든 내용은 필자와 장성급 장교들 간의 오랜 논쟁 끝에 장성급 장교 수준에서 삭제되었다. 삭제되지 않고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명백한 이론이 아니라, 오히려 애매한 참고 문헌에 불과하다.
실제로, 1992년도에 발행된 기본교리는 AFM 2-11에 기술된 그 이론과 상반되기도 한다. AFM 1-1이 "위협 능력을 갖고 있는 어떠한 적도 공중 공격에 대한 전략적 취약점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
) AFM 1-1, 미공군 항공우주기본교리, 제1권, 1992, 3, 12, par. 3-5a(5). 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특별한 주장이 장성급 수준에서 삽입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제1권의 모든 교리에 관한 여러 가지 증거를 기술하고 있는 제2권에 이러한 특별한 주장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증거가 하나도 들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고 기술한 반면, AFM 2-11은 "반란군은 중핵 지대도 없고, 고정된 산업시설도 없으며, 폭격해야 할 병참선도 거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 AFM 2-11, 9-10, par. 3-3b.
VI. 결 론
미국의 항공요원들은 맹렬히 저항하는 적에 대하여 강력한 폭격을 수행하거나 또는 적 전투기와의 교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과 강인한 정신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명성이 나있다. 그러나 그들의 학문적 호기심이나 전쟁술(the art of war)연구를 위한 헌신적인 노력 또는 항공력 이론의 발전에 기여한 업적에 대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시 말해 미국의 항공요원들은 "생각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알려졌다.
장기 혁명전이라는 주제에 관한 미 공군의 접근방법에서 이러한 문제점은 명확히 나타났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초까지 "핵 항공력(독립된 공군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군사력)"의 개념에 집착하였던 미국의 항공요원들은 그들이 베트남전에 개입할 때까지 사실상 반란전 문제를 무시하였다.
미국이 베트남으로부터 철수한 이후, 그 전쟁 말기에 있었던 전략 폭격의 충격에 관한 쓰라린 기억과 혼란, 그 전쟁의 본질에 관한 논쟁, 그리고 계속되는 소련의 위협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미국의 항공요원들은 장기전에 관해 미해결된 문제를 회피하며, 유럽에서의 전략 핵전쟁이나 재래식 전쟁과 같이 잘 알려진 문제에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그 문제는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아프카니스탄,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페루를 비롯한 기타 갈등 지역에서 계속 분쟁이 발생함에 따라 1980년대에 그 문제가 다시 부각되었고, 일부 항공요원들은 게릴라전에서 항공력 적용의 특성에 관하여 진지한 연구에 돌입했다. 그들은 거의 40여년 간의 경험과 연구 및 책자의 발간 등과 발전된 합의를 바탕으로 전통적인 항공력 이론을 간명하고 합리적으로 개정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이 개발한 교리는 주변의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다. 이 교리는 읽어 본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도 극소수에 불과한 애매한 작전적 수준의 교리 교범으로 사장되어 있다. 이로 인해, 이 교리는 공군 항공력 이론의 결정체인 공군 기본 교리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며 최악의 경우에는 상호갈등만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냉전이후의 세계를 직면하는데 반드시 필요할 수도 있는 이 이론이 많은 노력을 투자하여 개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지금까지 논의된 내용을 살펴보면, 전략 폭격과 핵 항공력이라는 원대한 이론으로부터 장기 혁명전의 교묘하고 복잡한 이론에 이르기까지 40여년간의 답사 여행은 너무나 짧았다. 미국 항공요원들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그 여행은 모순과 혼란으로 끝났다.
) 상게서, 9-10, par. 3-3b.
이 두 단락은 작전 교리에 관한 진술문 이상의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전통적인 초기 항공력 이론가들의 항공력 이론을 종합하였다. 즉 이 단락은 그들이 제시한 전쟁의 유형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항공력 이론을 근거로 하여 작성된 것이다.
따라서, 1992년 항공요원들은 반란이나 또는 장기적인 혁명전이라는 특수한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전통적인 항공력 이론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고 있는 동안에도 다른 한 편에서는 그러한 발전을 억제하고 혼란시킬 수 있는 아주 다른 일련의 사건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장기적인 혁명전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은 결코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었고, 상당수의 장교들(대부분 고급 장교들이 많았음)은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그러한 "비전통적"인 전략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비생산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였다. 예를 들면, 1980년대 중반에 공군의 한 고위 장군은 "우리 공군은 그런 유형의 전쟁(반란전)으로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전쟁은 "대충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생사가 연관이 있는 전쟁에 대해서 연구노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필자에게 말하였다.
결국, 항공력의 입장에서 볼 때 장기적인 혁명전은 일반적이고 중요하지도 않으며 비생산적이라는 상당수의 고급 장교들의 소신 때문에 공군교리의 최고 규범인 AFM 1-1 미 공군 항공우주 기본교리(1992)에서 그 주제에 관한 논의가 배제되었다. 따라서 아주 힘들게 개발한 그 이론은 하위수준의 작전 교리 교범인 AFM 2-11에서만 남게 되었다.
) 나는 팀장으로서 1992년 3월에 출판된 공군 기본 교리의 주요 저자 중 한 사람이다. 그 교범의 초안에는 장기적인 혁명전의 특징에 관한 광범위한 정보와 그러한 분쟁에 있어서 항공력의 사용에 관한 여러 가지 논평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모든 내용은 필자와 장성급 장교들 간의 오랜 논쟁 끝에 장성급 장교 수준에서 삭제되었다. 삭제되지 않고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명백한 이론이 아니라, 오히려 애매한 참고 문헌에 불과하다.
실제로, 1992년도에 발행된 기본교리는 AFM 2-11에 기술된 그 이론과 상반되기도 한다. AFM 1-1이 "위협 능력을 갖고 있는 어떠한 적도 공중 공격에 대한 전략적 취약점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
) AFM 1-1, 미공군 항공우주기본교리, 제1권, 1992, 3, 12, par. 3-5a(5). 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특별한 주장이 장성급 수준에서 삽입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제1권의 모든 교리에 관한 여러 가지 증거를 기술하고 있는 제2권에 이러한 특별한 주장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증거가 하나도 들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고 기술한 반면, AFM 2-11은 "반란군은 중핵 지대도 없고, 고정된 산업시설도 없으며, 폭격해야 할 병참선도 거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 AFM 2-11, 9-10, par. 3-3b.
VI. 결 론
미국의 항공요원들은 맹렬히 저항하는 적에 대하여 강력한 폭격을 수행하거나 또는 적 전투기와의 교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과 강인한 정신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명성이 나있다. 그러나 그들의 학문적 호기심이나 전쟁술(the art of war)연구를 위한 헌신적인 노력 또는 항공력 이론의 발전에 기여한 업적에 대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시 말해 미국의 항공요원들은 "생각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알려졌다.
장기 혁명전이라는 주제에 관한 미 공군의 접근방법에서 이러한 문제점은 명확히 나타났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초까지 "핵 항공력(독립된 공군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군사력)"의 개념에 집착하였던 미국의 항공요원들은 그들이 베트남전에 개입할 때까지 사실상 반란전 문제를 무시하였다.
미국이 베트남으로부터 철수한 이후, 그 전쟁 말기에 있었던 전략 폭격의 충격에 관한 쓰라린 기억과 혼란, 그 전쟁의 본질에 관한 논쟁, 그리고 계속되는 소련의 위협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미국의 항공요원들은 장기전에 관해 미해결된 문제를 회피하며, 유럽에서의 전략 핵전쟁이나 재래식 전쟁과 같이 잘 알려진 문제에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그 문제는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아프카니스탄,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페루를 비롯한 기타 갈등 지역에서 계속 분쟁이 발생함에 따라 1980년대에 그 문제가 다시 부각되었고, 일부 항공요원들은 게릴라전에서 항공력 적용의 특성에 관하여 진지한 연구에 돌입했다. 그들은 거의 40여년 간의 경험과 연구 및 책자의 발간 등과 발전된 합의를 바탕으로 전통적인 항공력 이론을 간명하고 합리적으로 개정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이 개발한 교리는 주변의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다. 이 교리는 읽어 본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도 극소수에 불과한 애매한 작전적 수준의 교리 교범으로 사장되어 있다. 이로 인해, 이 교리는 공군 항공력 이론의 결정체인 공군 기본 교리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며 최악의 경우에는 상호갈등만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냉전이후의 세계를 직면하는데 반드시 필요할 수도 있는 이 이론이 많은 노력을 투자하여 개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지금까지 논의된 내용을 살펴보면, 전략 폭격과 핵 항공력이라는 원대한 이론으로부터 장기 혁명전의 교묘하고 복잡한 이론에 이르기까지 40여년간의 답사 여행은 너무나 짧았다. 미국 항공요원들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그 여행은 모순과 혼란으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