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측천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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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역 판도를 지켰고 나아가 제국의 영향력을 당나라 초기보다 더 넓혔다. 또한 무측천은 군사ㆍ외교 방면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어 통치 기간에는 국력 또한 강성했다.
제13장 문화가 번성하고 풍속이 바뀌다.
문화는 정치ㆍ경제 등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며, 사회생활의 중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문화를 진흥시키는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무측천이 문화적인 면을 중시했기 때문에 당시의 문화는 다양했고 특별히 번영하고 흥성하는 경향을 보인다. 경학, 역사학, 문학, 수학, 의학, 천문학, 조소, 서예와 회화, 음악과 무용 등에서 많은 발전을 하였으며 낡은 풍속을 고쳤다. 혼인을 하도록 강하게 촉구하였고, 장례풍속은 낭비와 사치 풍조를 엄격히 금지시켰으며 무덤의 형태를 규격화하였다. 또 관리와 백성들이 사사로이 비단을 소유할 수 없도록 금지시켰으며 부녀자의 사회적 지위를 높였다. 무측천은 부녀자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아버지가 죽었을 때와 같은 상복을 입도록 하는 법규를 반포하였고, 북문학사로 하여금 부녀자의 생애와 사적을 비석에 새기고 전기를 써서 공덕을 칭송하였으며, 부녀자의 사교 활동을 제한하는 규율도 완화하였다. 또 복시도 크게 바꾸어 부녀자가 외출할 때는 멱리를 쓰지 않고 휘장 달린 모자를 써도 된다고 규정하였고, 유익한 사회 활동을 허락하였다.
종합해보면 무측천은 정권을 장악한 21년 동안 태종 이래 모든 성과를 충분히 이용하면서 사회 발전을 위해 진일보한 조치들을 채택하였다. 그녀는 제국의 존엄과 강대함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국면을 열어 현종의 개원성세를 위한 견실한 기초를 다졌다.
제14장 퇴위 전후
제위계승문제는 당나라의 앞길과 운명이 걸린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에 넷째아들 예종 이단을 ‘황사’로 삼아 동궁에 거하게 하였다. 무측천의 신하들도 모두 태자문제를 고려하였는데 처음 무측천을 설득한 사람은 재상 이소덕이다. 재상 길욱과 장씨 형제 또한 이씨를 황태자로 삼기를 주청하자 아들을 즉위시키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이단이 이를 거절하고 이현을 황태자로 삼길 주청하자 무측천은 이현을 황태자로 삼았다.
제위계승문제가 해결되었지만 이씨 자손과 무씨 왕들 사이에 갈등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무측천은 태자, 상왕, 태평공주, 무유기 등에게 명당에서 맹세를 하게하고 이씨와 무씨의 통혼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마찰을 엄히 금하였다. 하지만 이것들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자 사상방면에서의 교화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충효와 겸양을 제창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을 시행하면서 이씨와 무씨의 관계는 점차 호전되었다.
무측천의 지병과 고질병이 겹쳐 신하들이 태자에게 자리를 물려주라고 무측천에게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는 이씨와 무씨 사이의 뿌리 깊은 갈등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무측천은 계속 대권을 장악하고는 이씨와 무씨의 화해를 기도하면서 살아있는 동안 아들과 조카들의 관계가 더욱 화목해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705년 정월 22일 장간지 등은 병력을 이동하여 장씨 형제가 모반을 꾀한다는 것을 구실로 정변을 일으켰다. 장씨 형제가 죽임을 당한 후 장간지 등은 즉시 무측천이 요양하던 곳을 포위했다. 그 후 23일 오전 장간지 등은 재차 무측천에게 제위 계승을 재촉했고 결국 이현의 감국을 동의했다. 23일 무측천은 최종적으로 황태자에게 자리를 물려주었고 25일 황태자 이현은 통천궁에서 즉위하였고 정변은 비로소 마무리되었다.
장간지 등이 모반을 일으킨 이유는 장씨 형제의 모반설인데 이는 믿기 어렵고 이들은 무측천을 폐위시키고 황제 즉위의 공을 차지하는데 있었다. 정변의 직접적인 결과는 장씨 형제가 죽고 무측천이 폐위되고 중종이 복위하였으며 장간지 등이 권력을 잡은 것이다. 그것은 대주 정권의 멸망을 선포하는 동시에 무측천 정치 생명의 종말을 선고하는 것이었다.
705년 정월 25일 중종이 복위하였으나 중종은 평범한 황제로 장간지 등에게 정치를 위임하였다. 이들은 ‘무주’에 대해 철저한 부정을 단행하여 혹리들을 관직에서 내쫓고 국호를 당나라로 회복하였다. 또 고묘, 사직, 능침, 백관, 기치, 복색, 문자를 모두 고종 이전으로 돌렷다. 이렇게 무측천이 여러 해를 거쳐 확정한 시정방침들이 순식간에 쓸모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 대해 동정하는 무리들이 다시 무측천의 정치를 회복하려 하였다. 당시 중종의 비 위씨는 정궁화후였는데 그녀는 무삼사와 결탁하고 그를 정치에 참여시키면서 국정을 다시 바꿀 준비를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장간지 등과 무삼사 무리의 싸움은 격렬해졌다. 중종은 정치적 재능이 부족하여 정변을 주도한 자들과 무씨 여러 왕들의 격렬한 대립과 갈등 그리고 투쟁으로 정국은 불안한 상태에 빠졌다. 무측천은 이러한 상황을 알지 못하고 705년 11월 26일 여든 둘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고, 706년 5월 18일 무측천의 영구는 건릉의 지하궁으로 들어갔다. 당시 건릉에는 그녀를 위해 ‘무자비’가 세워졌으나 그녀의 찬란한 업적과 그녀에 대한 다양한 평가, 그녀의 변치 않는 매력이 도처에 새겨져있다.
전통시대 무측천에 대한 중국의 역사 기술과 평가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평가를 종합하여보면 대체적으로 두 가지로 집약된다. 하나는 여자가 주제넘게 황제가 되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자식까지 죽일 정도로 잔인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황제가 되어 늙어서까지 궁중에서 음란한 생활을 하였다는 것이다. 무측천의 이러한 일방적인 평가는 근대 이후 일부 역사가들의 재평가에 의해 많은 부분 시정되었고 현대 중국에서는 측천무후를 개혁가로 재평가하고 있다. 즉, 관롱집단이라는 소수에 의한 사회지배를 해체시키고 과거 출신 관료의 등용에 적극적이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너무 무측천에 대해 찬양하고 있으며 모든 상황을 미화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면에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생각하는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데 그러한 것을 모두 좋은 쪽으로만 해석한 것 같다. 그리고 또 아쉬운 점이 있다면 측천문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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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8.07.17
  • 저작시기2007.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73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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