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환경과 생태학적 의미
2. 생태학적 위기
3. 생태학적 위기의 원인과 반생태적 사회
4. 자연 파괴의 원인
5. 반생태적 주체의 비판
(1) 반생태적 이성
(2) 반생태적 자연관
6. 동양사상의 생태학적 의미
(1) 생태적 자연관
(2) 생태적 인간관
7. 생태적 실천
2. 생태학적 위기
3. 생태학적 위기의 원인과 반생태적 사회
4. 자연 파괴의 원인
5. 반생태적 주체의 비판
(1) 반생태적 이성
(2) 반생태적 자연관
6. 동양사상의 생태학적 의미
(1) 생태적 자연관
(2) 생태적 인간관
7. 생태적 실천
본문내용
사지로 끌려가는 소를 측은하게 여겨 놓아주라고 했던 양해왕의 경우처럼 동물은 물론 식물, 무생물에까지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
) 양혜왕이 어느 날 의식에 쓰이는 소를 잡기 위해 소를 끌고 가는 사람에게 "놓아주어라. 그 소가 두려워 벌벌 떨며 사지로 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그 의식을 폐지할까요 묻자 왕은 "어찌 폐지할 수 있겠는가? 양으로 바꾸어 써라."라고 대답하였다. 왕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 재물을 아끼기 위한 것이라는 비난이 일었으나 맹자는 "이것이 바로 인(仁)을 실천하는 방법이니, 소는 보았고 양은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도록 한 것입니다. 군자는 산 짐승이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며, 죽으면서 애처롭게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는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합니다."라고 해석하였다.(『孟子』, 「梁惠王」 상).
이것에 대해 왕양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면 반드시 깜짝 놀라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는데, 이것은 그 마음속에 있는 인(仁)이 어린아이와 일체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같은 유(類)여서 그렇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새와 짐승이 슬피 울고 두려움에 떠는 것을 보아도 반드시 참지 못하는 마음이 있게 되는데, 이것은 그 인이 새와 짐승과 일체이기 때문이다. 새와 짐승은 지각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초목이 꺾여진 것을 보면 반드시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는데, 이것은 인이 초목과 일체이기 때문이다. 초목은 생의(生意)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기와나 돌이 깨진 것을 보아도 반드시 애석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게 되는데, 이것은 인이 기와와 돌과 일체이기 때문이다."
) 『陽明全書』, 권26, 「大學問」.
이렇듯 불인지심이 사람의 테두리를 넘어서 동식물, 무생물로까지 확장되어 갈 때, 이는 곧 생태적 감성이 되는 것이다. 완전히 확장된 생태적 감성은 이 세계를 하나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연을 지식과 지배의 대상으로 보지 않으며,
) 왕양명은 "대인은 천지만물을 일체로 여긴다. 그는 천하를 한 가족처럼 보고, 중국을 한 사람처럼 본다"고 하였다.(『陽明全書』, 권26, 「大學問」.)
그 결과 생존 본능과 이에 충실한 도구적 이성의 나 중심주의를 극복하게 해준다. 그러나 생태적 감성을 키우지 않으면 맹자의 말대로 자신의 부모를 봉양하기에도 부족하다.
) 『孟子』, 『公孫丑』 상.
그러므로 어떻게 생태적 감성을 확충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큰 과제로 남는다. 전통적인 의미에서는 정심, 성의, 거경 등과 같은 끊임없는 수양과 공부가 필요하며, 현대적 문맥에서는 부단한 생태학적 관심과 실천이 요구된다.
이와 같이 생태학적 감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면, 도덕 규범과 실천이 연결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된다는 강점이 있다. 이 이외에 생명평등주의와 같은 보편주의 윤리가 감수할 수밖에 없는 비판, 즉 불타고 있는 집에서 한 사람만을 구할 수 있을 때 고위 성직자와 그의 시녀인 어머니 중에서 어머니를 구해야 한다는 결론을 확보하기 쉽지 않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생태학적 감성은 완전한 확충이 어려우므로 현실적으로는 나의 친소에 따라 다르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묵자의 무차별적 사랑(겸애)에 대한 비판이 말해주듯이 유가의 윤리는 보편주의 윤리가 아니며, 그런 점에서 상대주의 윤리이고 차별적 윤리이다.
) 유가의 윤리는 두 가지 점에서 캘리코트의 생태중심주의와 비슷하다. 첫째는 윤리의 적용이 친소에 따라 차별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캘리코트의 도덕적 의무는 일련의 원환 구조를 이루는 단계적이고 계층적인 의무의 체계이다. 두 번째는 생명체뿐만 아니라 무생물도 도덕적 배려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캘리코트는 개별 생명체에 윤리적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 생태계 전체에 두었고, 그러므로 산과 바다와 같은 무생물도 도덕적 배려의 대상이 된다.
맹자는 이에 대해서 "군자는 사물에 대해서 그것을 사랑하지만 인자하게(仁) 대하지 않으며, 사람들에 대해서는 인자하기만 하고 친애하지 않으니, 어버이를 친애하면서 사람들에 인자하고 사람들에게 인자하면서 사물을 사랑한다."라고 한 바 있다. 그러나 현재의 친소관계에 머무는 것은 진정한 생태적 감성이 아니다. 끝없이 친소의 경계선을 확장해 나갈 때, 비로소 진정한 생태적 감성이 된다. 생태학적 감성의 전형을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발견하게 된다.
인(仁)을 실천하는 방법은 남을 사랑하는 데 있지 나를 사랑하는 데 있지 않다. …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바탕으로 새, 짐승, 곤충에 이르기까지 사랑하지 않음이 없으니, 사랑하지 않으면 어찌 인을 실천할 수 있는가? 인이라는 것은 남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바람, 비, 이슬, 우레, 해, 달, 별, 짐승, 식물, 산, 시내, 흙, 돌과 사람은 본래 한 몸일 뿐이다. … 다같이 하나의 기이기 때문에 서로 통할 수 있다
주체는 본능적 삶(도구적 이성), 이상적 삶(본래적 이성), 생태적 삶(생태적 감성 = 불인지심)이 조화 또는 충돌하는 장이다. 근대적 주체는 도구적 이성이 주도했다면, 현대의 이성주의자들은 본래적 이성의 회복을 통해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다. 이성과 추론 능력이 생태학을 사회적인 학문 체계로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는 북친의 말은 기본적으로 타당하다. 그의 말대로 이성에는 목표와 가치, 사회 관계들을 논리적으로 추론할 능력이 있고, 생태문제의 해결은 바로 이성의 그러한 능력에 기대어야 한다. 다만 이성은 이성의 영역에 머물러야 하지 이성으로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다는 신화를 포기해야 한다. 불인지심의 회복 없이는 생태학적 위기는 쉽게 극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필요한 것은 생태적 감성의 마법화이고 자연의 재마법화이다. 자연은 나와 하나이며, 자연은 생명의 존재라는 마법이 다시 걸릴 때, 그래서 실험실의 개구리를 해부하는데도 특수훈련을 받지 않으면 안 될 때, 무덤 하나 쓰는데도 토지신에게 땅을 매입하지 않으면 안 될 때 비로소 인간과 자연이 함께 하는 생태지구가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 양혜왕이 어느 날 의식에 쓰이는 소를 잡기 위해 소를 끌고 가는 사람에게 "놓아주어라. 그 소가 두려워 벌벌 떨며 사지로 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그 의식을 폐지할까요 묻자 왕은 "어찌 폐지할 수 있겠는가? 양으로 바꾸어 써라."라고 대답하였다. 왕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 재물을 아끼기 위한 것이라는 비난이 일었으나 맹자는 "이것이 바로 인(仁)을 실천하는 방법이니, 소는 보았고 양은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도록 한 것입니다. 군자는 산 짐승이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며, 죽으면서 애처롭게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는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합니다."라고 해석하였다.(『孟子』, 「梁惠王」 상).
이것에 대해 왕양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면 반드시 깜짝 놀라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는데, 이것은 그 마음속에 있는 인(仁)이 어린아이와 일체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같은 유(類)여서 그렇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새와 짐승이 슬피 울고 두려움에 떠는 것을 보아도 반드시 참지 못하는 마음이 있게 되는데, 이것은 그 인이 새와 짐승과 일체이기 때문이다. 새와 짐승은 지각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초목이 꺾여진 것을 보면 반드시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는데, 이것은 인이 초목과 일체이기 때문이다. 초목은 생의(生意)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기와나 돌이 깨진 것을 보아도 반드시 애석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게 되는데, 이것은 인이 기와와 돌과 일체이기 때문이다."
) 『陽明全書』, 권26, 「大學問」.
이렇듯 불인지심이 사람의 테두리를 넘어서 동식물, 무생물로까지 확장되어 갈 때, 이는 곧 생태적 감성이 되는 것이다. 완전히 확장된 생태적 감성은 이 세계를 하나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연을 지식과 지배의 대상으로 보지 않으며,
) 왕양명은 "대인은 천지만물을 일체로 여긴다. 그는 천하를 한 가족처럼 보고, 중국을 한 사람처럼 본다"고 하였다.(『陽明全書』, 권26, 「大學問」.)
그 결과 생존 본능과 이에 충실한 도구적 이성의 나 중심주의를 극복하게 해준다. 그러나 생태적 감성을 키우지 않으면 맹자의 말대로 자신의 부모를 봉양하기에도 부족하다.
) 『孟子』, 『公孫丑』 상.
그러므로 어떻게 생태적 감성을 확충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큰 과제로 남는다. 전통적인 의미에서는 정심, 성의, 거경 등과 같은 끊임없는 수양과 공부가 필요하며, 현대적 문맥에서는 부단한 생태학적 관심과 실천이 요구된다.
이와 같이 생태학적 감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면, 도덕 규범과 실천이 연결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된다는 강점이 있다. 이 이외에 생명평등주의와 같은 보편주의 윤리가 감수할 수밖에 없는 비판, 즉 불타고 있는 집에서 한 사람만을 구할 수 있을 때 고위 성직자와 그의 시녀인 어머니 중에서 어머니를 구해야 한다는 결론을 확보하기 쉽지 않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생태학적 감성은 완전한 확충이 어려우므로 현실적으로는 나의 친소에 따라 다르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묵자의 무차별적 사랑(겸애)에 대한 비판이 말해주듯이 유가의 윤리는 보편주의 윤리가 아니며, 그런 점에서 상대주의 윤리이고 차별적 윤리이다.
) 유가의 윤리는 두 가지 점에서 캘리코트의 생태중심주의와 비슷하다. 첫째는 윤리의 적용이 친소에 따라 차별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캘리코트의 도덕적 의무는 일련의 원환 구조를 이루는 단계적이고 계층적인 의무의 체계이다. 두 번째는 생명체뿐만 아니라 무생물도 도덕적 배려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캘리코트는 개별 생명체에 윤리적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 생태계 전체에 두었고, 그러므로 산과 바다와 같은 무생물도 도덕적 배려의 대상이 된다.
맹자는 이에 대해서 "군자는 사물에 대해서 그것을 사랑하지만 인자하게(仁) 대하지 않으며, 사람들에 대해서는 인자하기만 하고 친애하지 않으니, 어버이를 친애하면서 사람들에 인자하고 사람들에게 인자하면서 사물을 사랑한다."라고 한 바 있다. 그러나 현재의 친소관계에 머무는 것은 진정한 생태적 감성이 아니다. 끝없이 친소의 경계선을 확장해 나갈 때, 비로소 진정한 생태적 감성이 된다. 생태학적 감성의 전형을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발견하게 된다.
인(仁)을 실천하는 방법은 남을 사랑하는 데 있지 나를 사랑하는 데 있지 않다. …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바탕으로 새, 짐승, 곤충에 이르기까지 사랑하지 않음이 없으니, 사랑하지 않으면 어찌 인을 실천할 수 있는가? 인이라는 것은 남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바람, 비, 이슬, 우레, 해, 달, 별, 짐승, 식물, 산, 시내, 흙, 돌과 사람은 본래 한 몸일 뿐이다. … 다같이 하나의 기이기 때문에 서로 통할 수 있다
주체는 본능적 삶(도구적 이성), 이상적 삶(본래적 이성), 생태적 삶(생태적 감성 = 불인지심)이 조화 또는 충돌하는 장이다. 근대적 주체는 도구적 이성이 주도했다면, 현대의 이성주의자들은 본래적 이성의 회복을 통해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다. 이성과 추론 능력이 생태학을 사회적인 학문 체계로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는 북친의 말은 기본적으로 타당하다. 그의 말대로 이성에는 목표와 가치, 사회 관계들을 논리적으로 추론할 능력이 있고, 생태문제의 해결은 바로 이성의 그러한 능력에 기대어야 한다. 다만 이성은 이성의 영역에 머물러야 하지 이성으로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다는 신화를 포기해야 한다. 불인지심의 회복 없이는 생태학적 위기는 쉽게 극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필요한 것은 생태적 감성의 마법화이고 자연의 재마법화이다. 자연은 나와 하나이며, 자연은 생명의 존재라는 마법이 다시 걸릴 때, 그래서 실험실의 개구리를 해부하는데도 특수훈련을 받지 않으면 안 될 때, 무덤 하나 쓰는데도 토지신에게 땅을 매입하지 않으면 안 될 때 비로소 인간과 자연이 함께 하는 생태지구가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