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중국의 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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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우리의 中國史像 혹은 동아시아史像이 있는가?

조공체제는 정말 끝났는가?

중화 식민주의 혹은 제국주의?

소수민족의 민족주의 대두?

본문내용

당국은 한인들에게 임금과 식량을 본부보다 더 많이 지급하면서 한인들의 이주를 장려하였고, 또 한인과 티베트인과의 결혼을 권장하고, 티베트인들에게 중국어와 한족의 문화를 강요하면서 동화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전형적인 식민정책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한인들을 소수 민족 지역에 끌어 들여, 이 지역을 민족 융합이라는 이름 아래 식민화한 예는 티베트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1884년부터는 신강이 된 동투르키스탄에서, 또 내몽골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인들은 동투르키스탄에서 1949년에 단지 20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이곳의 1,300만 명 주민 중에서 그들은 무려 700만 명으로 늘어나 규모면에서 원주민을 압도하고 있다. 근대란 숫자가 무게를 갖는 시대라고 한 브로델의 말을 상기해 보면, 대규모 한인이 갖는 중압감이 금방 느껴질 것이다. 도시 내의 행정이나 거주지 구조를 보면 한인들의 지배적 위치와 소수민족의 피지배적 위치가 금방 드러난다. 이른바 비단길의 천산 남로와 서역 남로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신강 서부의 야르칸드(샤처)와 같은 도시가 그렇다. 한인 거주 지역은 도로와 가로수가 말끔하고 정부 기관 등이 이곳에 모여 있는데다가,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로서 번영하는 모습이 약여하다. 반면 위그르족 지역은 작은 민가들이 복잡하게 밀집해 있는데다가, 포장된 도로도 거의 없다. 외국인 관광객이 보기에도 민족 차별은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다. 내몽골 지역에서도 한인은 850만 명으로 250만 명의 몽골인들을 압도한다. 그 중심지인 후허하오트어는 사실상 한인들의 도시이다. 또 소득이나 복지의 중요성도 한인들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 소수민족의 빈곤율은 한인의 2배에 해당하며, 92년도의 유아 사망률도 상해는 1천명 당 9.9명인데 비해, 티베트는 200명이다. 큰 규모의 소수민족들이 이런 상황에 처해 있으니, 서남부에 산재한 소수 민족들의 위상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소수 민족 지역에 구경가는 한국인들이 보는 것은 중국에도 이렇게 유별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있던가 라는 정도의 흥미, 아니면 신강 사람들은 왜 이리 가난할까 라는 동정심, 아니면 실크로드의 영화는 어디 가고 이렇게 폐허의 성 만 남아 있는가 하는 회고, 아니면 티베트와 같이 인간을 속박하는 문명세계를 종교적으로 순화시켜 줄 수 있는 영혼의 구원처 정도로 보는 듯하다. 이보다 좀 더 나가면, 티베트의 독립에 귀를 귀울이지만, 신강에 대해서는 그런 관심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티베트 독립은 미국이 관심을 가지고 있고, 게다가 달라이 라마라는 티베트의 지도자가 전세계에 ‘티베트적 영감’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서 그럴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도 미국이 티베트 독립에 관심을 가지는 진짜 이유는, 중국이 주장하는 것처럼 티베트의 독립운동을 지렛대로 삼아 중국을 견제하려는 외교전의 일부일 수도 있다. 이와는 달리 신강은 기독교인들이 거부해마지 않는 이슬람의 땅이다. 게다가 그 서쪽에 있는 서투르키스탄은 제정 러시아 시대에 정복된 뒤, 소련 붕괴 전까지 러시아와 소련의 지배 아래 있었고, 동투르키스탄도 단기간이나마 러시아의 영향 아래 있었다고 생각해서 무관심한 것일지도 모른다. 동투르키스탄의 독립운동이 카자흐나 터어키에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정보가 제한된 탓일 수도 있다.
우리는 세계의 근대가 식민주의에 저항한 민족주의로 표상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식민주의란 주로 유럽의 식민주의에 한정되며, 민족주의 역시 그에 대항한 지역의 경우로 제한된다. 그러나, 청조 때, 혹은 중화민국이나 중화인민공화국 때 ‘중국’내에서 있었던 소수민족의 저항에 대해서는 단지 ‘소수민족의 반란’ 정도로만 치부해 버리고 만다. 이들의 반란을 청조의 변경 개발과 한인 이주에 대한 저항으로 단순화시켜 보기보다는, 세계사적인 시각에서 또는 동아시아라는 지역에서 전개되는 민족주의의 한 유형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본다면 청말, 혹은 중화민국 시대의 한족은 민족주의를 표상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주의적인 혹은 제국주의적인 상징일 수 있을 것이다. 중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폴 코헨이 강조한 바와 같이 중국 내부적 관점에만 집착할 경우, 우리는 동아시아의 소수 민족 지역에 대한 한인의 진출을 중국의 발전으로 규정하기 쉽다. 또 동아시아 지역을 한국과 중국, 일본이라는 단일 국가들을 중심으로 보는 경우, 이미 일본의 일부로 강제 편입되어 버린 유구인이나 아이누인, 또는 만주인, 몽골인, 티베트인, 또는 대만 원주민이나 서남부의 소수 민족들, 심지어는 연해주나 동부 시베리아에 흩어져 있는 퉁구스 계통의 원주민들은 눈에 잘 안 들어 올 것이다. 이런 시각을 견지하지 못하면, 소수 민족을 정체성을 가진 독자적인 문화체로서 보지 않고 중국의 일부로 간주하는 잘못을 저지르기 쉬운 것이다. 다양한 생물종이 존중되어야 할 궁극적인 가치라면, 당연히 자신의 문화를 가진 민족의 다양성도 존중되어야 할 것이며, 이 점에서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근대사도 마땅히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식민지배를 받았으면서도 식민주의자처럼, 대국도 아니면서 마치 대국인 것처럼 중국을 보아 왔던 우리의 시각이 지금쯤 교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 동아시아적 근대는 아편전쟁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청 제국의 팽창이 극도에 달했던 18세기 중기부터 이미 시작되었고, 또 근대기의 민족주의 역시 서구 열강에 대응한 중국적 형태 이전에 중국의 팽창에 대한 소수민족의 저항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바로 이 점에서 근대 중국은 조공국과 소수민족의 희생 위에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일본만이 근대의 여러 성과들을 독점한 것은 아닌 셈이다. 그리고 그 국가와 민족 중, 한반도는 한국과 조선으로 분단되어 있으며, 유구는 일본의 일부이고, 월남은 격심한 전화 속에서 벗어나 이제서야 새 길을 모색하고 있다. 또 티베트 민족과 동투르키스탄인들은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고투를 벌이고 있다. 현재의 동아시아 지역이 안고 있는 핵심적인 문제 중의 하나가 이미 두 세기 이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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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0.30
  • 저작시기2008.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87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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