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답사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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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경복궁 답사 보고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경복궁

2.경복궁의 역사
①태조때
②창건이후
③복구논의
④재건
⑤중건이후

3.경복궁의 구조

4.경복궁의 상징적 의미
①명당으로서의 의미
②비보의 의미

5.소감

6.참고문헌

본문내용

으로 살피고자 한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남산에 올라가 봉수대 있는 부분에서 청와대와 경복궁 쪽을 바라보면 <편안한 자리인가, 등을 돌리고 있는 자리인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경복궁이나 청와대 터가 명당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쓰임새가 적절한가?>에 대한 것이다. 최창조 교수 등을 비롯한 풍수학자들은 경복궁과 청와대 터가 일국의 왕과 대통령이 거할 수 있는 용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신들의 의처로서 사찰과 교회 등에 적합한 자리이다.]
②비보의 의미
광화문 앞에 불을 먹어치운다는 전설상의 짐승 해태는 수차례에 걸쳐 화재를 당한 경복궁을 화마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이 자리에 놓였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내용인즉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등 조선의 모든 궁궐들이 하나같이 잦은 화재로 큰 손실을 입었던 바, 이는 관악산이 서울의 조산으로 화산(火山)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관악산 상봉에 우물을 파고 그 안에 구리로 만든 용을 넣고, 광화문 앞 좌우에는 해태상을 앉혀 관악산쪽 화기를 제압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해태상을 궁궐 앞에 세운 것은 현재의 왕이 성군임을 칭송하는 의미와 함께 신하들이 궁궐을 출입할 때 마음을 가다듬고 공손한 자세를 갖게 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신하들은 해태상을 경계로 안쪽에선 말이나 탈것에서 내려야 했던 것이다.
경복궁 안에서도 많은 비보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경복궁안 근정전으로 들어가려면 앞에는 돌다리가 보이고 그곳에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명당수와 석축이 눈에 보인다. 이 도랑을 어구라 하고, 돌다리를 영제교 라고 한다. 영제교 좌우 어구 양 옆에는 돌짐승 4마리 보이는데, 이들 돌짐승들은 도랑으로 흐르는 물길을 타고 나쁜 기운이 궁 안으로 들어오면 그것을 물리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금방이라도 뛰어내려 사악한 기운을 먹어치우기라도 할 듯 한 기세를 취하고 있는데, 이러한 소임을 맡은 돌짐승들이 무섭기보다는 미소를 띠고 있거나 혀를 날름 내밀고 있다. 경복궁 근정전 앞 월대 난간 기둥과 계단 그리고 기둥석에도 갖가지 동물들을 조각해 놓았다. 이를 법수라고 하는데, 쥐, 소, 호랑이 등의 각 띠를 상징하는 12지신상과 동서남북을 지키는 사방신등이 조각되어 있다. 북쪽을 지키는 방위신은 현무이며 12지신 중 쥐를 배치하였고, 남쪽에는 주작과 말 등을 배치하여 근정전을 지키도록 하였다. 동쪽은 청룡과 토끼, 소, 뱀을 서쪽은 백호와 원숭이 등을 배치하였다.
궁궐을 지키고 왕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은 오방신과 12지신들이 험상궂은 얼굴이 아니라 친근하며 장난기까지 느껴지는 표정을 짓고 있다. 이 조각상들을 보고 있노라면 권위로 사람들을 압도하기 보다는, 여유로움과 온화함으로 모두가 함께하고자 한 우리조상들의 멋과 낭만을 느낄 수 있다.
5.소감
수학여행 기간에 가서 많은 학생들로 붐비고 있었다. 나는 마침 수문장 교대식 때 갔었는데 수문장 교대식에 참여할 수 있는 행사도 한 켠에 마련되고 있었다. 초등학생 시절 이곳에 소풍을 가려다가 장이 꼬이는 바람에 못 갔던 기억이 있다. 그 후 부모님과 함께 관람을 하기도 했었는데 근정전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어 신기하게 봤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생 시절 봤던 근정전의 모습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근정전 안에는 현대에 맞게 다시 복원한 모습처럼 페인트칠이 깨끗하게 되어 있었고 조선시대의 분위기를 내기위해 화로나 장신구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다른 궁도 실제로 사는 분위기를 내기 위해 행사 중인 것으로 보였다. 건청궁은 현재 인터넷 신청자들의 한에 선착순 60명까지 특별 관람을 할 수 있다. 명성황후는 건청궁 공녕합에서 시해되었는데 건청궁은 고종 10년에 지은 왕과 왕비가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면서 거처할 목적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고종은 이곳을 좋아하여 왕비와 함께 자주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명성황후는 일제에 의해 ‘민비’로 왜곡될 때로 왜곡되어 우리 일반인들도 명성황후를 때로 민비라고 부른다. 이 사실은 창덕궁을 비원이라고 부르는 것과 똑같은 일제풍 잘못이다. 역사는 개인에 의해 해석되기 나름이지만 나는 명성황후가 쇄국정책으로 일관하던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뒤 청나라와 일본, 러시아와의 뛰어난 외교정책을 하며 조선왕실의 권위와 내정을 지키려 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한 나라의 왕권을 무너뜨렸던 일본은 조선을 위해 애쓴 명성황후를 일제의 야욕을 위해 죽였다는 사실은 전 세계적으로 비판을 받을만한 일이다.
경복궁을 가기 위해 사전 정보를 찾다가 해태상의 사연을 읽고 가서 보니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5월 13일, 해치(해태에 원래이름)는 서울을 대표하는 상징동물로 선정되었다. 외국인들의 뇌리에 가장 크게 자리 잡은 경복궁의 상징 개발 방향으로 설정해 해치가 서울을 상징하기 좋다는 결론을 얻었다는 것이다. 근대와 현대가 이렇게 공존하고 있다니 기분이 묘했다.
경복궁 안에는 몇 명이 살고 있었을까?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대개 3000명 정도가 궁궐에서 살거나 궁궐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왕실가족, 궁녀, 내시 등이 500명 정도이고 궁궐을 지키는 군인이 2,000명 정도 그리고 나랏일을 보는 신하들과 궁궐에서 일하는 사람이 500명 정도라고 알려지고 있다. 현재 경복궁에는 많은 직원분들이 일하시고 계셨는데 경복궁에 대해 설명을 도와주실 문화재청 직원분도 볼 수 있었다. 직원분들 중 기억에 남는 분은 외국인에게 경복궁을 설명해 주시던 한복을 입은 직원분이셨다. 국립중앙박물관을 관람했을 때도 생각보다 큰 규모에 직원분들도 많이 계셨는데 나중에 나의 일자리라고 생각하면 벌써부터 떨려온다.
6. 참고문헌
경향신문 2004.07.14
두산백과
문화재청 http://www.cha.go.kr/
인터넷종로신문 http://jongronews.com/
경복궁 http://www.royalpalace.go.kr/
한국역사연구회 http://www.koreanhistory.org
김두규 저, 『조선 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궁리출판사, 2000
이영희 엮음, 『한국관광정보실습』
이이화 저, 『조선의 건국』, 한길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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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4페이지
  • 등록일2008.10.30
  • 저작시기2008.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88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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