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술에 관한 조사(금속활자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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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론 - 서두내용

본론 - 인쇄술의 변천사,
중국의 활자술(단점)
우리나라 시대별 인쇄술(금속활자중심)
주조 방법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결론 - 구텐베르크와 우리나라 금속활자간의 비교

본문내용

서 번지지 않는 잉크를 조합하기도 했다. 붉은색의 표제나 제목, 붉은색 또는 금색 장식과 유색 삽화는 나중에 인쇄소 밖에서 수작업으로 처리했다.
「42행성서」는 모두 180부를 인쇄하였으나, 현재까지 전하는 것은 모두 48부인데, 양피지에 인쇄한 것이 12부, 종이에 인쇄한 것이 36부가 남아 있다.
구텐베르크 금속활자의 영향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이후 약 500년 가량 거의 변함 없이 사용되었다. 활판 인쇄술은 그의 견습공들에 의해 1464년에 로마로 전파되었고, 1500년까지 유럽 260개 도시에서 인쇄가 진행될 정도로 급속하게 전파되었다.
1500년에 당시 성서를 비롯한 종교서적, 그리스·로마의 고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보고서 등 수십만부의 책이 인쇄되었고, 유럽 바깥으로 전해진 활판 인쇄술은 1539년 멕시코, 1556년 인도, 1584년 페루, 1602년 필리핀, 1639년 미국, 1640년에 이란까지 전파되었다.
이 같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 이전까지 소수지배계급의 전유물이었던 책이 지식에서 소외되었던 대중 속에 급속히 전파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역사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산업혁명이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일어났다면 과학혁명은 16세기 중반 코페르니쿠스의 지
동설에 의해 일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동설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달로 인한 지식권력 해체가 주요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죠. 이전까지는 권력층에서 지식과 정보를 독점하면서 천동설을 고수했습니다.”
인쇄본 서적이 등장하기 이전 영국에서 가장 많은 장서를 보유했다는 캔터베리 대성당의 도서실 책은 2000권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도서관의 장서도 300권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구텐베르크 이후 반세기 동안 4만여종의 책이 인쇄되어 1000만권이 넘는 서적이 유럽 사회에 쏟아졌죠. 그야말로 지식혁명이었습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이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는 이유는 대중화 측면, 즉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독일 괴팅겐대가 소장하고 있는 ‘42행 성서’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낭송 위주 독서가 속독이나 묵독 위주로 바뀐 것도 구텐베르크 인쇄술의 보급 때문이었다. 대량 인쇄 시대, 대량 복제 시대는 소수에 편중되었던 정보를 다수가 쉽게 접근할 수 있게끔 해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인쇄방법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서적을 인쇄하는 데 필요한 인쇄 시스템 전체를 구성하는 기술적 요소들이 충족됨으로써 가능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기술은 필요한 활자를 손쉽게 복제해서 제작할 수 있는 기술과 인쇄 상태를 우수하게 유지하면서 대량으로 인쇄해 낼 수 있는 기술이었다.
우선 활자를 복제하는 기술은 펀치와 모형, 그리고 수동주조기라고 불리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작고 뾰족하며 강한 금속 조각에 줄이나 끌로 문자를 볼록하게 돋을새김을 하는데, 이것을 일명 ‘펀치’라고 한다. 이 펀치에 연한 금속 조각을 올려놓고 두드려 각인을 해서 모형을 만든다. 수동 주조기에 이 모형을 장착하여 손쉽고 빠르게 활자를 주조해 내었다. 이 기술은 인쇄를 많이 하면 활자가 닳아서 쓸모가 없어지더라도 계속해서 필요한 활자를 쉽고 빠르게 주조해 낼 수 있었다.
인쇄 상태를 우수하게 유지하면서 대량으로 찍어 내는 기술은 ‘프레스’라 불리는 압축기의 고안으로 해결되었다. 구텐베르크가 고안한 프레스는 오밀조밀하고 울퉁불퉁한 활판의 전면에 균일한 압력을 동시에 가해 종이에 찍어내는 압축기를 말한다. 이것은 고대부터 쓰이던 포도주의 압착기를 변형하여 만들어 낸 것이다. 그밖에도 램프 그을음과 아마씨 기름을 혼합한 새로운 잉크의 개발, 주석과 납 그리고 안티몬 등을 합성한 내구성 있는 활자의 개발, 그리고 압축기의 압력에도 견디고 잉크도 적당하게 먹는 종이의 개발 등이 어우러져 하나의 인쇄 시스템이 탄생하였다.
그런데 놀랄 만한 것은 이러한 기술이 대단히 짧은 기간에 구축되었다는 점이다. 이보다 앞선 시기에 세계 최고 수준의 인쇄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우리나라의 경우 위와 비슷한 수준의 기술을 완성하는 데 무려 20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 1234년의 동활자(銅活字) 인쇄,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공인된 1377년의 직지심경을 거쳐 1434년 세종 때 갑인자 금속활자 인쇄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구텐베르크는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기술을 완성해 냈다. 금속활자 인쇄술에 대한 노하우가 전무했던 유럽의 상황에서 이는 실로 불가사의에 가까운 것이었다.
우리나라대중화에 어려웠던점
그러나 영어의 알파벳은 26자인 반면 한자는 수천 개에 이른다는 점을 상기해 보자. 서구 사회에서는 활판 인쇄를 위해서 수십 개의 활자 주형을 만들면 그만이겠지만, 동양 사회에서는 활판 인쇄용 활자를 수천 개나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더구나 한자의 다양한 글씨체까지 고려한다면 동양 사회에서 목판 인쇄술이 활판 인쇄술보다 실용적이라는 점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동양에서 활판 인쇄술이 오랫동안 인기를 얻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이다. 여기서 우리는 흥미로운 상상을 할 수 있다. 한글의 자모는 24개가 아닌가? 만약 우리나라가 한자를 버리고 한글을 빨리 채택했다면 활판 인쇄술이 융성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실용성에는 또 다른 문제가 남아 있다.
다른해석으로는
우리나라와 서양의 인쇄술에 대해서도 색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직지심체요절이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본보다 70여년이나 앞섰지만 자본주의적으로 활용하지 못해 세계 최초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 실패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지금의 패러다임으로부터 나온 해석입니다. 우리나라의 금속활자는 조선 왕조의 안정적 정착과 유교 문화 형성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갖습니다. 당시의 패러다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즉 한국의 활자인쇄술은 14-15세기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사회적 필요에 훌륭하게 부응하여 개발된 훌륭한 기술이었다.
구텐베르크 인쇄술의 경우 자본주의적 활용과 함께 서양사회의 지식권력 해체에도 주효한 역할을 했다면 한국의 금속활자도 그 나름의 역사적 역할을 했다고 볼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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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1.10
  • 저작시기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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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9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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