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명성황후 - 경복궁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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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근현대사]명성황후 - 경복궁 답사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문

2. 조사자료

3. 맺음말 - 감상

본문내용

거친뒤 범죄자 전원을 증거불충분이라는 어이없는 이유로 석방한다. 범죄자들은 석방된 뒤 구국의 영웅으로 일본 전 국민으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으며 일본 국왕도 사절단을 보내어 범죄자들에게 훈장을 수여했다고도 한다. 일본 정부는 살해범들을 처벌할 의도가 없었다. 왜냐하면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일본 군,관,민과 정부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만행이기 때문이다. 현장 목격자가 있고 증거가 널려 있는데도 살해범들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후 출세가도를 달린다.
행동대의 핵심인물이었던 시바 시로는 정치소설가로서 명성을 얻고 국회의원에 수차례 당선된다. 낭인 동원책이었던 이다치 겐조는 일본 내각의 내상에 오르고 그 외에도 살해범 대부분은 일본에서 전치요직에 앉거나 사회적인 부와 명예를 얻게 된다.
주한 일본 공사 미우라는 명성황후 살해음모를 총지휘한 거두였다.러시아인 시바타의 증언 "그들은 내 말을 듣지도 않고 왕비가 누구인지 왕비가 어디있는지에 대해서만 물었다."
명성황후는 고종의 정치적 조언자였다. 그녀는 일본의 침략음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서방세계 즉 러시아나 프랑스 및 미국 등과 가까이 지내라고 한다.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기 위해 싸운 전쟁이 청일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어 조선 침략의 본격적인 발판을 마련하였다. 일본이 요동반도를 장악하자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이에 제동을 건다. 명성황후는 이러한 국제적 흐름을 놓치지 않았고 러시아와 손잡고 일본을 견제하려고 했다. 조선의 외교관계에서 철저히 베제당한 일본으로서는 명성황후는 눈에 든 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다. 명성황후의 살해소식이 알려지자 전국적으로 의병항쟁이 일어나고 국제적으로도 일본은 비난여론에 휩싸이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명성황후 제거작업은 전술적으로 완전히 실패한 작전이었다. 1897년 10월12일 고종은 칭제건원을 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쳤다. 그리고 11월22일 명성황후에 대한 성대한 장례를 치루었다. 고종은 명성황후의 시호를 올리는 의식을 하던 중 "궁중의 사변은 너무나 불측스러운 것이어서 만고에 있어 본 적이 없었다. 원수를 갚지 못하고 거상기강이 지났다. 그러나 나의 슬픔은 가눌 길이 없다."면서 눈물을 흘린다.
비극의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시해된지 백여년이 지났어도 사건은 여전히 미해결로 남아있다.
왜냐하면 명성황후 시해사건에는 용의자만 있을 뿐 지금까지 범죄자에 대한 그 어떤 처벌도 규명도 없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이제 우리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진상을 다시 가리고 규명해야 하지 않을까? 역사의 진실을 숨기고 역사의 왜곡만 일삼는 일본에게 그 진실이 무엇이고 그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직시할 수 있도록 말이다.
3. 맺음말 - 감상
본인이 경복궁 명성황후 시해장소를 답사한 이유는 한 때 조선의 국모였던 명성황후가 일본인에게 무참히 살해된 고인을 애도하는 뜻에서다. 11월 20일 과목을 같이 수강하는 친구들과 경복궁을 찾았다. 매표소에서 3000원하는 표를 구입하고 경복궁 안으로 들어갔다. 시해장소 이외에 많은 곳을 둘러보았지만 보고서의 목적상 명성황후 시해장소와 명성황후에 관해서만 언급하겠다. 그 장소를 찾았을 때 조사가 미흡했는지 조사한 자료와는 다르게 건천궁의 옥호루는 찾기 힘들었고 비석만 있을 뿐이었다. 사진의 비석은 1981년 11월 명성황후 순국숭모비건립위원회에서 명성황후의 순국을 애도하여 경복궁내의 명성황후가 시해된 장소에 세운 것이다
우리는 다함께 애도의 뜻에서 잠시 묵념을 하고 그 날의 아픔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명성황후라는 인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앞서 정치가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근현대사 20여년을 살펴보았다. 명성황후를 위시한 민씨 일척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정책들은 개항 후부터 국권을 빼앗기기 전까지, 어쩌면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지배층 역사의 한 축을 형성했다. 이들의 세력이 너무 강했기에 국내의 그 어떤 반동 세력도 이들을 넘어서질 못했다. 우리가 주목한 것은 이렇게 강한 민씨 일가의 정중앙에 명성황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세력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타고난 기지를 발휘하며 주어진 위기를 해쳐나갔다. 뛰어난 정치가, 유능한 지도자였지만 결국 자신의 꾀에 자기가 휘말려 들어가서 화를 입게 되었다.
명성황후, 그녀의 시대는 우리나라에게 중요한 시기였다. 밀려드는 서양 열강 앞에서 나라를 지키고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루는 것이 당면 과제였다.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과 산업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낡은 봉건제도를 허물고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그 어느 것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그 어느 세력의 지지도 얻지 못했다. 임오군란을 일으킨 군인들과 백성들은 명성황후를 공격의 표적으로 삼았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 역시 그를 부정했으며,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킨 농민들 또한 민씨 타도를 소리높이 외쳤다. 아무의 지지도 받지 못한 그는 외세에 의존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무력으로 진압해주고 그를 재집권하게 해준 것은 청나라였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청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일본군 상륙의 빌미를 제공하고, 그 결과 우리 땅에서 청일전쟁이 벌어지게 한 것은 바로 명성황후였다.
그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긴 뒤에는 러시아에 의존했다. 무력으로 러시아를 이길 자신이 없었던 일본은 친러의 핵심인 명성황후를 없애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렇게 해서 일어난 사건이 명성황후 시해사건, 즉 을미사변이다.
명성황후는 명민한 정치가였다. 조선을 드나든 외교관들은 하나같이 그를 입모아 칭찬했다. 일본이 자국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를 제거했어야 할 만큼 명성황후의 정치적 영향력은 컸다. 그렇지만 그의 역량 역시 자신과 민씨 정권을 지키는 것에 집중되었다. 민은 거기서 설 자리가 없었다.
명성황후, 그녀의 재능과 경륜은 왜 다수의 민을 위해 쓰이지 못하고 자신과 집안의 복록 유지에만 쓰였을까? 여성의 시야를 좁게만 만들었던 구조 탓인가, 아니면 오늘날에도 그렇듯이 정권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집권자의 착각 탓인가. 명성황후의 안타까운 죽음을 가슴깊이 애도하면서 이러한 물음을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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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4페이지
  • 등록일2008.11.13
  • 저작시기2005.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91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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