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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순종의 미덕을 익히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권위와 어머니의 사랑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들에 의한 관리는 학습 분위기를 엄숙하게 하고 일방적으로 지도하는 데는 틀림없이 효과적이겠지만, 교육활동을 전체적으로 평가할 때에는 일면적인 방법이라고 지적되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본래적 의미의 교육이라고 할 수는 없다.
2) 교수
교수는 사고권(思考圈)을 형성하고 확장하여, 감정과 의지를 일으켜 그것에 따라 도덕성을 형성하는 교육방법으로 헤르바르트의 교육방법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다. 교수란 단순히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과정이 아니라 인간의 강한 도덕적 품성 도야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헤르바르트는 이러한 교수를 교육적 교수라고 하였다. 수업이 없는 교육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교육이 없는 수업도 있을 수 없다고 함으로써 모든 수업의 장면에서 인간의 도덕적 품성을 길러주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지식과 기능의 전달에만 그치지 않고 의지를 도야하여 도덕적 품성을 형성하는 것이 교육적 교수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업을 통해 우선적으로 아이들에게 흥미를 일깨워 주야 한다. 모든 수업은 학생들의 흥미와 관심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3) 훈육
훈육은 관리, 교수 다음에 오는 교육작용으로써 도덕성의 도야를 목적으로 하는 교육의 마지막 단계이다. 관리는 교육받을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는 교육 이전의 단계이고, 교수는 교재라는 매개체를 통해 교육적 교수를 함으로써 도덕적 품성을 도야하지만, 훈육은 매개체가 없이 아동에게 직접적으로 작용하여 아동의 심정에 영향을 줌으로써 도덕적 품성을 도야하는 방법이다. 이와 같은 훈육의 방법으로는 명령, 상벌, 교훈, 모범 등을 들 수 있으나, 이 중에서 교사의 모범을 가장 중시한다. 이는 처음에는 타인의 지도에 의한 객관적 훈련에 강제성을 띄지만 점차 자신의 자율적 훈련이 가능하도록 한다.
훈육은 원래가 많은 조치나 개별적인 행위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고 연속적 만남이기 때문에 짧지 않고, 급격하지도 않으며 계속적이고 지속적으로 완만하게 아동에게 침투하여 점차적으로 멈춘다. 여기에서 우리는 헤르바르트가 단순히 교수라고 하는 간접적 교육을 통해 주지주의적 교육을 하려하였다는 비판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Ⅲ. 결론
우리의 가정 교육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배움에 대한 그릇된 관념이 일반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상당히 많은 부모들은 ‘배움’이란 부모나 교사가 ‘가르치는 일’이라고만 생각하기 일쑤이다. 배움의 과정에서 ‘가르치는 일’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진정한 배움이란 가르치는 일에 의해서만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현대의 교육 심리학에서는 어른에 의해서 가르쳐지는 것보다도 스스로의 깨달음에 의해서 더욱 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배움의 과정에서는 ‘가르치는 일’과 ‘스스로 배우는 일’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이 요망된다. 만일 ‘가르치는 일’에만 치중하게 되면 자연 배우는 사람에게 수동적인 학습 태도가 형성되어 자발적인 학습 능력이 저해되고, 반면 ‘스스로 배우는 일’에만 치중하게 되면 체계적인 학습을 못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가정 교육에서는 분명히 ‘가르치는 일’에만 치중하고 있다. 그 결과 수동적인 학습은 향상되고 있으나 자발적으로 학습하는 태도는 길러지지 못하고 있다. 어린이들은 골목에 나가 놀면서도 많은 것을 배우는데, 어떤 지식이나 기능을 가르쳐야만이 교육의 책임을 다한다는 그릇된 생각이 적지 않게 팽배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른바 조기 교육의 현상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조기 교육의 가치를 결코 부인하는 것은 아니로되 어떤 예능적인 것을 가르쳐야 만이 조기 교육을 한다는 생각은 분명 편협한 생각이다. 누군가의 가르침을 받아서 학습을 하게 되면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학습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우리는 어린이들이 스스로 배울 수 있는 자세를 길러 주고 스스로 배움을 추구하는 의욕을 복돋워 주는 일에 좀더 역점을 두어야겠다.
또한 아주 많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헤르바르트에 대하여 알게 된 지금, 헤르바르트의 교육에 대한 사상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헤르바르트가 도덕성에 대하여 강조한 것이다. 내 기억으로는 초등학교부터 시작하여 그 이름은 바른생활 이야기, 도덕, 윤리 등으로 변하긴 했지만 아무튼 비슷한 내용들을 분명히 배웠다. 하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도덕에 관한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사실 전혀 도덕적이지 못한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것은 청소년 문제가 많이 발생하는 것 만해도 그렇고, 집단 이기주의에 의해 왕따가 많이 생겨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는 현실적이지 못한 교육 현실 때문일 것이다. 교과서로만, 다 알고 있는 똑같은 얘기만을 반복하는 도덕 수업은 사실 나에게도 지루하게만 느껴지는 시간들이었다. 요즘 초등학교 한 학급의 학생수를 많이 줄인다고 하는데 좀 더 생활과 관려 된 실질적인 수업이 필요할 것 같다.
두 번째는 흥미를 강조한 교수의 활동이다. 이것은 교사가 되기 위하여 교육학 수업을 듣는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지금까지는 그냥 무언가 정해진 것을 전달해 주는 것을 교육, 그런 사람을 교사라고 생각했던 나에게는 말이다. 그래서 이에 대한 헤르바르트의 말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본다.
“교사들이 효과적으로 강의하기 위해 학생들의 흥미와 관심을 끌도록 해야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수업원칙이다. 이 원칙에서는 수업이 목적이고, 관심이 수단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관계는 이제 바꾸어져야 한다. 수업은 학생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기여해야 한다. 수업은 일정기간 동안만 진행되지만, 관심은 학생의 일평생의 삶 동안 유지되어야 한다.”
※ 참고문헌
- 교육의 철학과 역사, 최정웅조용태 저, 교육과학사, 2002
- 교육의 역사와 사상, 강기수 저, 세종출판사, 2002
- 교육방법론, 김경식 저, 교육과학사, 1997
- 교육철학 및 교육사, 정찬주팽영일한상규 저, 양서원, 1995
2) 교수
교수는 사고권(思考圈)을 형성하고 확장하여, 감정과 의지를 일으켜 그것에 따라 도덕성을 형성하는 교육방법으로 헤르바르트의 교육방법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다. 교수란 단순히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과정이 아니라 인간의 강한 도덕적 품성 도야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헤르바르트는 이러한 교수를 교육적 교수라고 하였다. 수업이 없는 교육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교육이 없는 수업도 있을 수 없다고 함으로써 모든 수업의 장면에서 인간의 도덕적 품성을 길러주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지식과 기능의 전달에만 그치지 않고 의지를 도야하여 도덕적 품성을 형성하는 것이 교육적 교수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업을 통해 우선적으로 아이들에게 흥미를 일깨워 주야 한다. 모든 수업은 학생들의 흥미와 관심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3) 훈육
훈육은 관리, 교수 다음에 오는 교육작용으로써 도덕성의 도야를 목적으로 하는 교육의 마지막 단계이다. 관리는 교육받을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는 교육 이전의 단계이고, 교수는 교재라는 매개체를 통해 교육적 교수를 함으로써 도덕적 품성을 도야하지만, 훈육은 매개체가 없이 아동에게 직접적으로 작용하여 아동의 심정에 영향을 줌으로써 도덕적 품성을 도야하는 방법이다. 이와 같은 훈육의 방법으로는 명령, 상벌, 교훈, 모범 등을 들 수 있으나, 이 중에서 교사의 모범을 가장 중시한다. 이는 처음에는 타인의 지도에 의한 객관적 훈련에 강제성을 띄지만 점차 자신의 자율적 훈련이 가능하도록 한다.
훈육은 원래가 많은 조치나 개별적인 행위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고 연속적 만남이기 때문에 짧지 않고, 급격하지도 않으며 계속적이고 지속적으로 완만하게 아동에게 침투하여 점차적으로 멈춘다. 여기에서 우리는 헤르바르트가 단순히 교수라고 하는 간접적 교육을 통해 주지주의적 교육을 하려하였다는 비판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Ⅲ. 결론
우리의 가정 교육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배움에 대한 그릇된 관념이 일반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상당히 많은 부모들은 ‘배움’이란 부모나 교사가 ‘가르치는 일’이라고만 생각하기 일쑤이다. 배움의 과정에서 ‘가르치는 일’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진정한 배움이란 가르치는 일에 의해서만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현대의 교육 심리학에서는 어른에 의해서 가르쳐지는 것보다도 스스로의 깨달음에 의해서 더욱 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배움의 과정에서는 ‘가르치는 일’과 ‘스스로 배우는 일’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이 요망된다. 만일 ‘가르치는 일’에만 치중하게 되면 자연 배우는 사람에게 수동적인 학습 태도가 형성되어 자발적인 학습 능력이 저해되고, 반면 ‘스스로 배우는 일’에만 치중하게 되면 체계적인 학습을 못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가정 교육에서는 분명히 ‘가르치는 일’에만 치중하고 있다. 그 결과 수동적인 학습은 향상되고 있으나 자발적으로 학습하는 태도는 길러지지 못하고 있다. 어린이들은 골목에 나가 놀면서도 많은 것을 배우는데, 어떤 지식이나 기능을 가르쳐야만이 교육의 책임을 다한다는 그릇된 생각이 적지 않게 팽배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른바 조기 교육의 현상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조기 교육의 가치를 결코 부인하는 것은 아니로되 어떤 예능적인 것을 가르쳐야 만이 조기 교육을 한다는 생각은 분명 편협한 생각이다. 누군가의 가르침을 받아서 학습을 하게 되면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학습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우리는 어린이들이 스스로 배울 수 있는 자세를 길러 주고 스스로 배움을 추구하는 의욕을 복돋워 주는 일에 좀더 역점을 두어야겠다.
또한 아주 많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헤르바르트에 대하여 알게 된 지금, 헤르바르트의 교육에 대한 사상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헤르바르트가 도덕성에 대하여 강조한 것이다. 내 기억으로는 초등학교부터 시작하여 그 이름은 바른생활 이야기, 도덕, 윤리 등으로 변하긴 했지만 아무튼 비슷한 내용들을 분명히 배웠다. 하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도덕에 관한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사실 전혀 도덕적이지 못한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것은 청소년 문제가 많이 발생하는 것 만해도 그렇고, 집단 이기주의에 의해 왕따가 많이 생겨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는 현실적이지 못한 교육 현실 때문일 것이다. 교과서로만, 다 알고 있는 똑같은 얘기만을 반복하는 도덕 수업은 사실 나에게도 지루하게만 느껴지는 시간들이었다. 요즘 초등학교 한 학급의 학생수를 많이 줄인다고 하는데 좀 더 생활과 관려 된 실질적인 수업이 필요할 것 같다.
두 번째는 흥미를 강조한 교수의 활동이다. 이것은 교사가 되기 위하여 교육학 수업을 듣는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지금까지는 그냥 무언가 정해진 것을 전달해 주는 것을 교육, 그런 사람을 교사라고 생각했던 나에게는 말이다. 그래서 이에 대한 헤르바르트의 말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본다.
“교사들이 효과적으로 강의하기 위해 학생들의 흥미와 관심을 끌도록 해야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수업원칙이다. 이 원칙에서는 수업이 목적이고, 관심이 수단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관계는 이제 바꾸어져야 한다. 수업은 학생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기여해야 한다. 수업은 일정기간 동안만 진행되지만, 관심은 학생의 일평생의 삶 동안 유지되어야 한다.”
※ 참고문헌
- 교육의 철학과 역사, 최정웅조용태 저, 교육과학사, 2002
- 교육의 역사와 사상, 강기수 저, 세종출판사, 2002
- 교육방법론, 김경식 저, 교육과학사, 1997
- 교육철학 및 교육사, 정찬주팽영일한상규 저, 양서원,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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