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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선의 전화과정에서 나타나듯 남로당의 주요한 역량은 무장투쟁에 투입되어 도시나 농촌에서 활동을 벌일 수 없었고 도시에서의 활동도 이승만정권의 숙청작업으로 인해 거의 이미 조직이 노출된 상황이었다. 또한 무장투쟁에 대한 북로당 지원은 주로 몇 차례의 침투시도와 강원도 게릴라에 관계했을 뿐 전라도, 경상도 지역에서는 북한의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게릴라들은 식량과 보급품을 찾아 나서지 않을 수 없었고, 처음에 설정된 목적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생존투쟁으로 변해갔다.
당과 대중의 관계에서 볼 때, 무장투쟁은 당이 대중과 유리되면서 고립된 섬으로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1946년 박헌영의 월북이래 남로당 지도부는 점차 남한을 떠나 북한에 당활동의 근거지를 마련하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은 남로당이 대중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사회운동을 이끄는 데 현실적 장애가 되었고 결국에는 남한의 대중운동을 이미 남북로당 사이에서 결정된 당 방침을 수행하는 것으로 자리잡게 만들었다. 남로당의 대중투쟁에서 게릴라투쟁으로의 이행은 결국 남한 대중운동의 종말을 알리는 것이었다. 남로당의 무장투쟁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이 생존할 수 없었던 정세, 즉 대중적 혁명의 퇴조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당과 대중의 관계에서 볼 때, 무장투쟁은 당이 대중과 유리되면서 고립된 섬으로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1946년 박헌영의 월북이래 남로당 지도부는 점차 남한을 떠나 북한에 당활동의 근거지를 마련하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은 남로당이 대중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사회운동을 이끄는 데 현실적 장애가 되었고 결국에는 남한의 대중운동을 이미 남북로당 사이에서 결정된 당 방침을 수행하는 것으로 자리잡게 만들었다. 남로당의 대중투쟁에서 게릴라투쟁으로의 이행은 결국 남한 대중운동의 종말을 알리는 것이었다. 남로당의 무장투쟁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이 생존할 수 없었던 정세, 즉 대중적 혁명의 퇴조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