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촉진은 무려 50년 동안 나의 가장 귀중한 진단 도구가 되어 주었다. 촉진은 내게 환자의 증세를 알려 줌과 동시에, 그 환자에게 의사가 개인적으로 관심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에 환자들의 두려움과 걱정을 진정시켜 고통을 완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귀니 윌리엄스는 의사들과 환자들 사이에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장애물들을 제거하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겸손이라는 것은 외과 의사가 계발해야 하는 유일한 자질이오. 의사라는 자리에서 철저히 내려오시오.”
이 같은 만남을 통해 나는 의학이 단지 신체의 일부를 치료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질병을 치료하는 것과 사람을 치료하는 것은 매우 다른 관심사다. 왜냐하면 회복이라는 것은 대부분 환자의 마음과 영혼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고통은 마음의 상태로, 전 인격을 포함한다.
세상이 분열되고 있을 때, 우리 학생들은 불분명한 학문적인 연구가 세상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가끔씩 의문을 품었다. 그러나 토미 루이스는 대학의 연구 계획을 한 치도 바꾸지 않았다. 의학 연구의 매력적인 새 영역을 개척하게 하는 부수 효과를 제외하면, 전쟁이 그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1차 대전 때 그는 심장을 연구했지만 이제는 고통에 대해 연구했다. 그 결과 1942년 처음으로 출판된 『Pain(고통)』이라는 책은 오늘날까지 의과 대학에서 읽히고 있다.
루이스는 내게 연구에 대한 애정을 불어넣었다. 우리가 고통을 연구하는 동안, 내가 배운 많은 것들이 수년 동안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결코 도망칠 수 없는 궤도 속으로 빠져들었다. 의사와 환자 모두 고통을 문제의 증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들의 관심은 곧장 그 원인으로 이동해서 진단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루이스는 과학적으로 입장을 달리하여 고통 그 자체를 하나의 감각으로 간주했다. 그의 지도하에 공부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어떤 근원적인 질문들에 대한 해답이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 이전에 나는 고통을 창조의 한 가지 흠, 즉 하나님이 하신 한 가지 큰 실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토미 루이스는 내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고통을 측량할 수 없이 귀중한 인체공학의 특별한 공훈으로 부각하여 신체적인 고통의 다양성을 범주화하려고 시도했다.
2차 대전이 끝난 지 1년 뒤인 1946년, 나는 외과 연수 과정을 마쳤다. 당시 나는 영국 점령군들과 더불어 몇 년 동안 해외로 나갔다가, 돌아온 후에는 연구소 같은 데서 조용히 일할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그러나 인도 남부에서 나병 환자들을 돌보는 책임자로 있던 로버트 코크런 박사가 벨로어라는 도시에 새로 세운 의과 대학에 필요한 외과 의사를 한 명 모집하려고 런던에 들렀는데, 그것은 내가 인도에 돌아오기를 몹시 원하시던 어머니께서 그에게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 말씀드렸기 때문이었다. 딸 진이 태어난 지 2주 후 나는 아내와 아장아장 걷는 아들, 그리고 갓 태어난 딸과 작별하고 인도로 가는 증기선에 올라탔다. 벨로어에 적응하느라고 꼬박 6개월을 보내자, 마거릿과 두 꼬마 아이들이 영국에서 배를 타고 왔다. 우리는 의과대학 근처에 있는 방갈로 꼭대기 층으로 이사했다. 마거릿은 거의 매일 나와 함께 병원에서 근무했다.
나는 인도 환자들의 강인함과 고통에 대한 침착한 태도에 감탄했다. 붐비는 대기실에서 여러 시간 동안 앉아서 기다리면서도 그들은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고통이 인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의 일부였고, 결코 회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업(業) 철학’이 고통이 부당하다는 느낌을 무디게 함으로써, 그들은 고통을 그저 참아야 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때때로 나는 기온이 조절되고 최신식 장비를 갖춘 런던의 유니버시티 칼리지 병원의 수술실과 실험실에 대해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환자들을 개별적으로 돌보는 일과 나의 소명을 실천하면서 느낀 자유가 그 어떤 상실감도 쉽게 보상해 주었다. 그렇게 마음에 도전이 되고 성취감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국외로 나가 제 3세계에서 일하는 의사들을 자기 희생적인 영웅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나는 잘 알고 있다. 서방에 있는 수많은 의사들이 보험 양식을 기록하고, 정부의 보건 계획과 언쟁하며, 전산화된 기록 보존 체제를 선택하고, 의료 사고에 대한 보험을 찾아다니며, 약품 외판원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느라고 시간의 절반 이상을 보낸다는 사실을, 나는 언제라도 인도를 선택하겠다.
이 같은 만남을 통해 나는 의학이 단지 신체의 일부를 치료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질병을 치료하는 것과 사람을 치료하는 것은 매우 다른 관심사다. 왜냐하면 회복이라는 것은 대부분 환자의 마음과 영혼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고통은 마음의 상태로, 전 인격을 포함한다.
세상이 분열되고 있을 때, 우리 학생들은 불분명한 학문적인 연구가 세상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가끔씩 의문을 품었다. 그러나 토미 루이스는 대학의 연구 계획을 한 치도 바꾸지 않았다. 의학 연구의 매력적인 새 영역을 개척하게 하는 부수 효과를 제외하면, 전쟁이 그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1차 대전 때 그는 심장을 연구했지만 이제는 고통에 대해 연구했다. 그 결과 1942년 처음으로 출판된 『Pain(고통)』이라는 책은 오늘날까지 의과 대학에서 읽히고 있다.
루이스는 내게 연구에 대한 애정을 불어넣었다. 우리가 고통을 연구하는 동안, 내가 배운 많은 것들이 수년 동안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결코 도망칠 수 없는 궤도 속으로 빠져들었다. 의사와 환자 모두 고통을 문제의 증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들의 관심은 곧장 그 원인으로 이동해서 진단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루이스는 과학적으로 입장을 달리하여 고통 그 자체를 하나의 감각으로 간주했다. 그의 지도하에 공부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어떤 근원적인 질문들에 대한 해답이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 이전에 나는 고통을 창조의 한 가지 흠, 즉 하나님이 하신 한 가지 큰 실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토미 루이스는 내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고통을 측량할 수 없이 귀중한 인체공학의 특별한 공훈으로 부각하여 신체적인 고통의 다양성을 범주화하려고 시도했다.
2차 대전이 끝난 지 1년 뒤인 1946년, 나는 외과 연수 과정을 마쳤다. 당시 나는 영국 점령군들과 더불어 몇 년 동안 해외로 나갔다가, 돌아온 후에는 연구소 같은 데서 조용히 일할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그러나 인도 남부에서 나병 환자들을 돌보는 책임자로 있던 로버트 코크런 박사가 벨로어라는 도시에 새로 세운 의과 대학에 필요한 외과 의사를 한 명 모집하려고 런던에 들렀는데, 그것은 내가 인도에 돌아오기를 몹시 원하시던 어머니께서 그에게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 말씀드렸기 때문이었다. 딸 진이 태어난 지 2주 후 나는 아내와 아장아장 걷는 아들, 그리고 갓 태어난 딸과 작별하고 인도로 가는 증기선에 올라탔다. 벨로어에 적응하느라고 꼬박 6개월을 보내자, 마거릿과 두 꼬마 아이들이 영국에서 배를 타고 왔다. 우리는 의과대학 근처에 있는 방갈로 꼭대기 층으로 이사했다. 마거릿은 거의 매일 나와 함께 병원에서 근무했다.
나는 인도 환자들의 강인함과 고통에 대한 침착한 태도에 감탄했다. 붐비는 대기실에서 여러 시간 동안 앉아서 기다리면서도 그들은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고통이 인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의 일부였고, 결코 회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업(業) 철학’이 고통이 부당하다는 느낌을 무디게 함으로써, 그들은 고통을 그저 참아야 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때때로 나는 기온이 조절되고 최신식 장비를 갖춘 런던의 유니버시티 칼리지 병원의 수술실과 실험실에 대해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환자들을 개별적으로 돌보는 일과 나의 소명을 실천하면서 느낀 자유가 그 어떤 상실감도 쉽게 보상해 주었다. 그렇게 마음에 도전이 되고 성취감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국외로 나가 제 3세계에서 일하는 의사들을 자기 희생적인 영웅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나는 잘 알고 있다. 서방에 있는 수많은 의사들이 보험 양식을 기록하고, 정부의 보건 계획과 언쟁하며, 전산화된 기록 보존 체제를 선택하고, 의료 사고에 대한 보험을 찾아다니며, 약품 외판원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느라고 시간의 절반 이상을 보낸다는 사실을, 나는 언제라도 인도를 선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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