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I. 서론
Ⅱ. 장면 정부의 외교적 이상 및 대외정책의 기조
(1) 대미외교안보와 경제협력
(2) 대일정책: 국교정상화와 경제협력의 시도
(3) 대 유엔외교 및 통일정책
(4) 제 3 세계 및 비동맹권 외교
Ⅲ. 결론
Ⅱ. 장면 정부의 외교적 이상 및 대외정책의 기조
(1) 대미외교안보와 경제협력
(2) 대일정책: 국교정상화와 경제협력의 시도
(3) 대 유엔외교 및 통일정책
(4) 제 3 세계 및 비동맹권 외교
Ⅲ. 결론
본문내용
장면 정부에 씌워진 환경적인 제약조건이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히 정당, 사회단체 및 학생세력 등 정치체계 내의 압력집단의 영향력을 충분히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안보외교정책 수행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즉 장면 정부의 시기는 서구민주주의 통치방식의 한국정치풍토에의 이식 가능성 여부의 난제에 대해서 시금석적인 시사를 경험적으로 투영된 시기였다. 그러므로 제도로서의 서구식 민주주의 속에서의 정치적 대응양식은 과연 어떠했으며 정치현상의 어떤 측면이 이러한 제도를 단명하게 만들었나를 검토해 보면 서구식 민주주의에서도 적어도 그것이 한국사회에 이식되는 과정에서는 어떠한 정치적 조치들을 필요로 하는가에 대한 간접적 시사도 아울러 추적해 볼 수 있다.
장면 정부에서의 정치외교적 과제는 제약된 상황 속에서도 사회의 민주화와 경제건설을 동시에 추구하면서 실현불가능한 유엔을 통한 평화통일까지 추진한다는 이상주의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이의 이행에 대한 국민들로부터의 기대 가능성, 즉 역할에 대한 기대와 정치현상 자체의 문제파악과의 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 하나의 차이가 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문제해결에 있어서 시간적 차원의 차이이다. 장면 정부는 민주사회의 건설이나 경제건설은 모두 일정한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는 데 반하여 대중의 기대에는 “지금 당장 그리고 한꺼번에”라는 절박성이 깃들여 있었다는 데서 큰 차이점을 엿볼 수 있다. 한승조(편), 리더십 이론과 한국정치, 민족지성사, 1988, pp. 61-63.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면 정부의 통치양식은 이에 대한 적절한 설득력이 부족했다. 서구식 민주주의에서도 책임과 원칙 그리고 국민의 이에 맞는 체질개선과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는 등에 대한 명백한 원리를 인식시키지 못했다. 여기서도 우리는 장면의 통치성격의 모호성을 보게 되는데 이는 그대로 자유방임적 그것이었다.
후진국으로서 특히 한국과 같이 파벌로 분열되어 항상 상호투쟁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심성을 상당히 사악하게 만드는 것인데, 장면이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도 그의 종교적인 신앙심으로 인한 투철한 종교인으로서의 성품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정상적인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때에 따라 격렬한 투쟁도 벌여야 하고 때로는 엄한 질책도 퍼부어야 하나, 장면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결국 지도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으며 흔히 이를 우유부단 또는 무능으로 매도하는 구실을 주었던 것이다.
장면처럼 고차적인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는 정치가 고도로 발전된 선진국의 지도자로서는 적격자라고 할 수 있으나 한국과 같은, 더욱이 제 2 공화국과 같은 정치적 후진국 지도자로서는 한계가 있다. 장면 정부가 충직하게 고수한 자유민주주의의 원리 원칙은 통치권력, 즉 자유당의 권위주의적 지배로부터 야당세력의 대정부비판 또는 반대의 자유를 합리화하고 옹호하는 데에는 유익한 이념이었던 것은 틀림없지만 그들 자신이 통치권력을 획득하고 정부를 운영함에는 지극히 불편한 이념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2공화국 시기에는 1공화국과 구별되는 대외정책상의 변화가 시도되고 있었는데. 장면 정부는 민주적 원칙에 입각하여 대화와 타협, 그리고 합리주의적 접근을 기본관점으로 하여 대외정책의 다변화를 도모하고자 했으며, 외교망의 확대와 외교의 다변화를 통해 실리외교와 경제외교를 추진하고 비동맹 중립권 또는 제3세계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에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노력하는 한편, 대일관계 정상화를 시도하고 통일정책을 추구하고자 했다. 이는 60년대를 전후한 국제적인 초기 데탕트의 영향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장면 정부의 위와 같은 정책 방향들은 그 구체적 결실들이 맺어졌느냐의 여부를 떠나 당시의 역동적인 국내외적 상황 에서 한국외교의 목표로 설정되었다는 그 자체로도 의의가 있는 것이며 이러한 점에서 장면 정부의 존속 기간을 한국 외교정책사에 있어 작은 전기를 마련한 시기로 평가 한다. 장면 정부는 서구 민주주의의 이념과 제도를 수정할 정도로 창의적이고 대담한 정부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승만 정권에 대한 현실비판과 부정의 논리를 그대로 허용 방치한 결과로 장면 정부의 효율성은 물론 국민 대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 민주적 정통성(419 혁명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마저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장면 정부가 자유민주주의가 얼마나 훌륭한 이념이며 제도인가를 인지했을 뿐 그것이 진정으로 어떠한 장단점을 가지며 어떠한 환경 여건 속에서 성장 발전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현실인식을 터득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 건국 후 겨우 12년 밖에 안 된 후진적 신생국으로서의 장면 정부나 국민대중이 분단상황하에서의 민족주의적 과제를 수행하는 데 전력을 경주해야 할 단계에서 서구식 의회민주주의와 사회복지의 공약을 순조롭게 성취 실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당시의 한국적 상황하에서는 이상론에 불과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장면 정부의 외교정책 역시 60년대 국제 데탕트 초기의 세계적 국제기류에 편승하여 대 비동맹 중립권 외교의 구상이나 외교망의 확장 계획 역시 국가예산의 반 이상을 미국 원조에 의존하는 국가로서는 한계가 있음이 당연하다. 더욱이 경제발전을 위해 무리한 대일 정상화 추진과 불평등 조약인 한미 경제원조기술조약의 체결은 현실주의적인 접근으로 불가피성은 인정되지만 무한한 자유의 허용으로 대외정책에 대한 국민대중의 간섭(데모)과 야당의 대정부 과격 비판 등은 결과적으로 자유민주주의가 장면 정부의 안보외교 리더십을 훼손시킴으로써 결국 쿠데타를 획책, 기회만 엿보고 있던 박정희 세력에게 정부붕괴의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장면 정부는 비록 단명내각으로 정부 출범 당시 제시한 외교원칙들이 이상주의적 정책이었다고 비판받고 있으나, 한국 외교사상 최초로 제 3 세계 외교를 구상 실현하려 했으며 비록 미국원조 수혜국으로서 대미의존도가 심화된 국가재정임에도 불구하고 대미의존 탈피를 위해 다변외교를 적극적으로 시도한 점, 대일관계 정상화의 돌파구를 마련한 것 등은 1공화국과 비교해서 외교적 진취성을 띈 장면 정부의 대외 정책이 특징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장면 정부에서의 정치외교적 과제는 제약된 상황 속에서도 사회의 민주화와 경제건설을 동시에 추구하면서 실현불가능한 유엔을 통한 평화통일까지 추진한다는 이상주의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이의 이행에 대한 국민들로부터의 기대 가능성, 즉 역할에 대한 기대와 정치현상 자체의 문제파악과의 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 하나의 차이가 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문제해결에 있어서 시간적 차원의 차이이다. 장면 정부는 민주사회의 건설이나 경제건설은 모두 일정한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는 데 반하여 대중의 기대에는 “지금 당장 그리고 한꺼번에”라는 절박성이 깃들여 있었다는 데서 큰 차이점을 엿볼 수 있다. 한승조(편), 리더십 이론과 한국정치, 민족지성사, 1988, pp. 61-63.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면 정부의 통치양식은 이에 대한 적절한 설득력이 부족했다. 서구식 민주주의에서도 책임과 원칙 그리고 국민의 이에 맞는 체질개선과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는 등에 대한 명백한 원리를 인식시키지 못했다. 여기서도 우리는 장면의 통치성격의 모호성을 보게 되는데 이는 그대로 자유방임적 그것이었다.
후진국으로서 특히 한국과 같이 파벌로 분열되어 항상 상호투쟁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심성을 상당히 사악하게 만드는 것인데, 장면이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도 그의 종교적인 신앙심으로 인한 투철한 종교인으로서의 성품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정상적인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때에 따라 격렬한 투쟁도 벌여야 하고 때로는 엄한 질책도 퍼부어야 하나, 장면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결국 지도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으며 흔히 이를 우유부단 또는 무능으로 매도하는 구실을 주었던 것이다.
장면처럼 고차적인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는 정치가 고도로 발전된 선진국의 지도자로서는 적격자라고 할 수 있으나 한국과 같은, 더욱이 제 2 공화국과 같은 정치적 후진국 지도자로서는 한계가 있다. 장면 정부가 충직하게 고수한 자유민주주의의 원리 원칙은 통치권력, 즉 자유당의 권위주의적 지배로부터 야당세력의 대정부비판 또는 반대의 자유를 합리화하고 옹호하는 데에는 유익한 이념이었던 것은 틀림없지만 그들 자신이 통치권력을 획득하고 정부를 운영함에는 지극히 불편한 이념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2공화국 시기에는 1공화국과 구별되는 대외정책상의 변화가 시도되고 있었는데. 장면 정부는 민주적 원칙에 입각하여 대화와 타협, 그리고 합리주의적 접근을 기본관점으로 하여 대외정책의 다변화를 도모하고자 했으며, 외교망의 확대와 외교의 다변화를 통해 실리외교와 경제외교를 추진하고 비동맹 중립권 또는 제3세계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에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노력하는 한편, 대일관계 정상화를 시도하고 통일정책을 추구하고자 했다. 이는 60년대를 전후한 국제적인 초기 데탕트의 영향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장면 정부의 위와 같은 정책 방향들은 그 구체적 결실들이 맺어졌느냐의 여부를 떠나 당시의 역동적인 국내외적 상황 에서 한국외교의 목표로 설정되었다는 그 자체로도 의의가 있는 것이며 이러한 점에서 장면 정부의 존속 기간을 한국 외교정책사에 있어 작은 전기를 마련한 시기로 평가 한다. 장면 정부는 서구 민주주의의 이념과 제도를 수정할 정도로 창의적이고 대담한 정부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승만 정권에 대한 현실비판과 부정의 논리를 그대로 허용 방치한 결과로 장면 정부의 효율성은 물론 국민 대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 민주적 정통성(419 혁명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마저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장면 정부가 자유민주주의가 얼마나 훌륭한 이념이며 제도인가를 인지했을 뿐 그것이 진정으로 어떠한 장단점을 가지며 어떠한 환경 여건 속에서 성장 발전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현실인식을 터득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 건국 후 겨우 12년 밖에 안 된 후진적 신생국으로서의 장면 정부나 국민대중이 분단상황하에서의 민족주의적 과제를 수행하는 데 전력을 경주해야 할 단계에서 서구식 의회민주주의와 사회복지의 공약을 순조롭게 성취 실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당시의 한국적 상황하에서는 이상론에 불과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장면 정부의 외교정책 역시 60년대 국제 데탕트 초기의 세계적 국제기류에 편승하여 대 비동맹 중립권 외교의 구상이나 외교망의 확장 계획 역시 국가예산의 반 이상을 미국 원조에 의존하는 국가로서는 한계가 있음이 당연하다. 더욱이 경제발전을 위해 무리한 대일 정상화 추진과 불평등 조약인 한미 경제원조기술조약의 체결은 현실주의적인 접근으로 불가피성은 인정되지만 무한한 자유의 허용으로 대외정책에 대한 국민대중의 간섭(데모)과 야당의 대정부 과격 비판 등은 결과적으로 자유민주주의가 장면 정부의 안보외교 리더십을 훼손시킴으로써 결국 쿠데타를 획책, 기회만 엿보고 있던 박정희 세력에게 정부붕괴의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장면 정부는 비록 단명내각으로 정부 출범 당시 제시한 외교원칙들이 이상주의적 정책이었다고 비판받고 있으나, 한국 외교사상 최초로 제 3 세계 외교를 구상 실현하려 했으며 비록 미국원조 수혜국으로서 대미의존도가 심화된 국가재정임에도 불구하고 대미의존 탈피를 위해 다변외교를 적극적으로 시도한 점, 대일관계 정상화의 돌파구를 마련한 것 등은 1공화국과 비교해서 외교적 진취성을 띈 장면 정부의 대외 정책이 특징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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