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고전의이해D]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프란츠 파농, 남경태 역, 그린비, 2004 - 1)이 책을 선택한 이유, 2)가장 인상적인 구절, 3)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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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서양고전의이해D]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프란츠 파농, 남경태 역, 그린비, 2004 - 1)이 책을 선택한 이유, 2)가장 인상적인 구절, 3)독후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동서양고전의이해 [ D형 ]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프란츠 파농, 남경태 역, 그린비, 2004
1) 이 책을 선택한 이유(분량 0.5쪽 내외)
2) 가장 인상적인 구절(실린 쪽수) (분량 1.5매 내외)
* 여러 군데, 여러 구절이어도 상관없으며 실린 쪽수표시는 각 구절 끝에 ( )속에 표기한다.
3) 독후감(분량 3매 내외)



Ⅰ. 서 론

Ⅱ. 이 책을 선택한 이유

Ⅲ. 가장 인상적인 구절(실린 쪽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프란츠 파농, 남경태 역, 그린비, 2004

Ⅳ. 독후감
1.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2. 식민지배의 부정적 효과
3. 알제리 폭력저항의 불가피성
4. 한국에 남은 제국주의 폭력의 흔적
5. 지배와 피지배의 재생산과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6. 우리 사회 안의 내부 식민지와 존재의 탈식민지

Ⅴ. 결 론

[참고 자료]

본문내용

사회는 이제 살아 있는 생물체가 되어서 자신의 조직이 만들어 내놓은 규범과 규칙에 합당한 인간만을 성공의 반열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신사요 문명인이라는 딱지를 붙여준다. 그것에 인생의 자유로움을 이야기하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그럴 수 있다.” 라는 적절한 말을 하기는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조직의 철저한 배척이고, 온갖 체제의 폭력이다.
파농의 국가 차원에서 다루어진 글들이 동등하게는 대한민국에서, 작게는 작은 조직체인 기업과 관공서와 가족 관계라는 울타리 안에서도 이루어진다. 이러한 현상 속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 행동은 무엇일까?
의문과 불확실이 가득하며, 체제의 폭력이 가득 찬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36세 때의 파농의 전언이 아직도 가슴에 메아리를 치는 것 같다.
5. 지배와 피지배의 재생산과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은 식민지에서의 지배와 피지배자 간의 관계가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서 유지되고, 그 속에서 원주민들은 어떤 심리적 변화를 겪으면서 저항을 꾸려나가는가에 대한 글이다.
일종의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와 지배의 재생산과 저항, 그리고 그 속에서의 사회적 병리현상에 대한 보고라고 할 수 있다.
글을 다 읽고 드는 생각은 파농이 살던 당시 시대의 그 식민지의 모습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삶의 모습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의 프랑스와 알제리의 식민관계를 우리 사회의 현실로서 돌려보면 구태여 은유적으로 볼 일도 아니다. 일종의 우리 안의 내부 식민지라는 도식이 가능하다. 그리고 파농이 지적한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이 당시의 식민지에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지금 이 사회에 현존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주민이 원주민의 땅을 점유하고 지배한다는 현상의 이면, 그 식민지 이면에 대한 성찰, 그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지배문화와 사회적 관계들, 슬픈 일이지만 때로는 그 속에서 피지배자들 간에 죽고 죽이는 싸움이 벌어지기 까지도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유지되고 재생산이 되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 가면서 지배의 재생산 과정은 지배문화에 물이 들고 이를 통해서 먹고 사는 지식인들을 배출하기도 하며, 식민지 지배자(이주민)들을 몰아내고서 그 지배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민족주의적 정당과 지도자, 정부, 노동조합 등을 구조적으로 배출하게 된다.
식민지로부터 해방되더라도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는 청산이 되기보다 보이지 않는 식민잔재로 남아 재생산이 되는 것이다.
6. 우리 사회 안의 내부 식민지와 존재의 탈식민지
한 사회에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는 우리 사회 속에는 정규-비정규라는 우리 안의 식민지를 보게 된다. ‘노동자는 하나다’라고 얘기하지만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식민지 지배자(이주민)들을 몰아내고 그 지배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민족주의적 정당과 그 지도자들, 정부, 노동조합 등과 하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나로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 파농은 그 시대를 비판하며 해방의 정치와 교육을 얘기하고 자각을 얘기했지만 그 대안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를 아무도 하지 않을 때, 그 얘기를 처음 했기에 힘을 지닌다면 나로서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식의 대단한, 하지만 너무도 먼 얘기가 싫다.
파농이 얘기했듯이 피지배자들은 구태여 그들의 삶을 얘기하거나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삶 그 자체가 이미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지금의 우리에게 이 책이 던지는 의미는 지배와 피지배의 문제 속에서 일종의 ‘존재의 탈식민지’에 대한 고민쯤으로 정리하고 싶다.
Ⅴ. 결 론
이상으로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을 읽고, 이 책을 선택한 이유와 가장 인상적인 구절, 그리고 독후감을 작성하였다.
‘폭력이 과연 나쁘기만 한 것일까?’ 비폭력과 폭력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전자에 도덕성을 적극적으로 부과한다면 후자는 당연히 악(惡)으로써 간주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폭력이 수단임과 동시에 목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평화’가 목표인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폭력’이나 1999년의 미국 시애틀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시위 등은 그 수단의 불가피함을 다수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러면, 왜 유독 한국에서만큼은 ‘폭력’이 혐오의 대상이 되었고 배척을 당한 것일까? 내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다소 거친 생각이지만, 당시에 ‘비폭력’이 철회가 됐더라면 촛불집회의 ‘촛불’이 근래와 같은 무력감을 느끼지 않지 않았을까? 라는 상상까지 해보았다. 현실 권력이 ‘폭력’ 용납하지 않는 상황이어서 일까? ‘폭력’을 전면에 등장시킨 문제적 인간 ‘프란츠 파농’은 역사의 물결에서 좀처럼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탈식민화 꿈을 꾼다. 존재의 탈식민화는 아프리카의 원주민이 이주민처럼 윤택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 것이며, 고도자본주의하의 중심도시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인간본연의 자유와 가치를 깨닫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미 강요된 이데올로기와 강요된 교육으로 길러진다.
사회가 요구하는 성공을 반드시 지향해야하며 자본의 논리에 복종해야한다. 새삼스럽지만 우리 대부분은 자본에 의한 식민 지배를 이미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멋진 집에서 폼 나게 놀면서도 먹고사는 데에 지장이 없는 것이라면 우리의 처지는 아프리카의 식민 지배를 받는 원주민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 모두가 바로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인 것이다. 그 위에는 제국주의나 자본주의 같은 소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지배자가 군림을 하고 있다. 존재의 탈식민화는 이 지배자에 대한 독립투쟁이 되는 것이다.
[참고 자료]
프란츠 파농, 남경태 역,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그린비, 2004
프란츠 파농, 이석호 역, 검은피부 하얀가면, 인간사랑, 1998
앤드루 샤오, 오드리아 림, 김은영 역, 저항자들의 책, 쌤앤파커스, 2012
김지현, 탈식민주의의 얼굴들(파농 사이드 바바 스피박), 역락, 2012
이석호, 아프리카 탈식민주의문화론과 근대, 동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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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3.29
  • 저작시기2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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