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목 차
Ⅰ. 서 론
Ⅱ. 문자와 문물의 도입
1. 한자의 전래
2. 문화 ˑ 문물 ˑ 서적의 도입과 전파
Ⅲ. 시대별 문자 생활자
1. 삼국 이전 문자 생활자
2. 삼국 문자 생활자
3. 고려 문자 생활자
Ⅳ. 시대별 문고의 특징
1. 삼국
2. 후삼국
3. 고려
Ⅴ. 결 론
참고문헌
Ⅰ. 서 론
Ⅱ. 문자와 문물의 도입
1. 한자의 전래
2. 문화 ˑ 문물 ˑ 서적의 도입과 전파
Ⅲ. 시대별 문자 생활자
1. 삼국 이전 문자 생활자
2. 삼국 문자 생활자
3. 고려 문자 생활자
Ⅳ. 시대별 문고의 특징
1. 삼국
2. 후삼국
3. 고려
Ⅴ. 결 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어휘부이므로 각각 그런 의미를 가진 ‘上, 同’을 빌려 올수 있고 ‘-은’ 형태부로 이루어 진점을 생각하면 그런 소리를 가진 ‘隱’을 빌려올 수 있으므로 ‘上同隱’와 같이 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어휘부는 독자를 , 형태부는 가자를 사용함으로 문장을 표현하였다.
라. 한자 차용표기법의 구별
한자차용표기법은 한자차용방법이나 표기 범위 또는 기록물의 성격 등에 따라서 다시 고유명사(固有名詞) 표기, 이두(吏讀), 향찰(鄕札), 구결(口訣) 로 구별된다.
첫째, 고유명사의 표기란 인명, 지명, 관직명 등의 어휘만을 한자를 빌려서 기록한 것이다.
둘째, 이두(吏讀)는 국어의 문장을 기록하기 위하여,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그 조사와 어미 그리고 일부 명사와 부사를 표기한 것이다. 이두는 주로 관리들의 공문서류인 이문에 쓰였다. 즉 조선시대까지도 사용되었다. 이두는 이문에서 한자를 이용하여 우리말을 표기하는 표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법을 총칭하는 것을 광의의 이두로 보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고유명사 표기, 향찰 이두 향찰 구결의 관계 :한자의 음과 훈을 차용하여 우리말을 기록하던 향찰과 이두, 구결은 동일한 원리가 작용된다는 점에서 동일한 개념으로 파악되고 용도가 서로 다르다는 점에서 별개의 개념으로 파악된다. 향찰, 이두, 구결의 발생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고려 초기 향찰식 표기법(운문 표기)이 소멸된 후 한자 차용표기법은 두 분류로 나뉘어 발달하였다. 하나는 아전 서리를 중심으로 하는 이속들의 문서기록을 통하여 발달한 이두문이고, 다른 하나는 한문을 학습하는 지식자들의 경서해독을 돕기 위한 수단으로 발달한 구결문 이다. 향찰이 모든 계층의 신라인들이 함께 사용하던 표기법 이었던데 반하여 이두와 구결은 서로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목적으로 사용했다는 차이점이 잇다. 향찰이 문장 전체를 우리말로 표기하고 있지만 이두는 특수한 공문투어와 문법적 형태소만을 차자로 표기하였다. 또 구결은 문법적 형태소만을 차자로 적어 한자차용표기의 사용범위가 한정, 축소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두와 향찰, 고유명사표기는 국어(우리말)을 표기하기위하여 (표현하기위하여) 사용한 것이고 구결은 한문을 이해하기 위하여 보조적으로 사용한 것이란 면에서 구별 될 수 있다.
, 구결을 모두 포함한 개념이다. 이두란 명칭은 15세기의 ‘최만리의 상소문’과 ‘훈민정음의 정인지에 의한 서문’에 처음 나타나는데, 그전에는 ‘吏書’(제왕운기 1287년) 吏道(대명률직해,1395)라 불리었고 이후에는 吏吐(이문잡례), 吏札(이찰,동국여지승람) 吏頭(유서필지)이문(전율통보)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두는 대체로 5세기경에 고구려에서 발생하여 신라에 전달된 것으로 본다. 고구려의 자료로는 5세기경의 고구려의 성벽에 새겨진 명문(銘文)들이 있고 신라의 자료로는 서봉총(瑞鳳)에서 발견된 은합우에 새겨진, 역시 5세기경의 명문이 있다. 신라로 전해진 이두는 그 뒤 임신서기석, 화엄경사경조성기,갈항사석탑기 등의 기록에 모습을 남기고 고려로 이어졌다. 고려에서는 자적선사 능운탑비음기, 정두사 오층석탑조성형지기, 상서도관첩 등의 금석문 또는 문서가 50-60종 남아있다. 고려에서는 <향약구급방>이란 의서를 간행하였다. 조선조에서도 많은 이두자료가 남아있는데 특히 비변사등록 등의 거대한 자료에도 이두가 사용되었다.
이두의 발달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단계는 국어의 어순으로 표기하면서 어휘부는 독자를 사용하고 형태부는 무시하거나 독자를 사용하여 표기하는 것이다.
2단계는 국어의 형태부까지를 표기하는 것으로서 이 때 사용되는 한자는 본뜻은 무시된채, 음상만 차용된 가자를 사용하는 방법이 나타난 것이다. 예를 들면 조사‘을’에 대하여 ‘乙’ 사용하는 등이 그것이다.
이 제2단계 표기법은 8세기 중엽의 자료인 신라 화엄경사경 조성기와 길항사 석탑기에 나타나는데 이시기는 설총이 활동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이와 관련하여 제2단계의 표기법을 설총이 이두를 창시하였다는 기록으로 해석하는 일도 있다.
셋째, 향찰은 한자의 음과 훈을 이용하여 국어의 문장을 온전하게 표현한 것이다. 향찰은 향가를 표기하는데 사용된 차자표기법이다. 한자로 기록되었으나 한자의 음과 훈을 차용하여 우리말 어순에 따라 기록한 것으로 ,주로 어휘적인요소 형태소(체언, 부사, 감탄사)는 한자의 훈, 문법적형태소는 한자의 음을 빌려서 표기했다. 이 표기법에 의한 자료는 신라 향가 26수가 있다. 이 자료들은 모두 고려시대에 문자로 정착된 것이지만, 민간에 널리 유포된 표기법으로서 문자의 보수성을 감안하면 신라의 자료로 간주된다.
향찰표기에는 음차자로만 된 표기와 훈차자로만 된 표기, 그리고 음차와 훈차를 함께 사용한 표기 등이 있다. 이로 볼 때 향찰은 고유명사표기 그리고 이두표기와 같은 차자표기법의 완성된 형태로 보인다. 그래서 향찰은 우리국어표기를 집대성한 것이라고도 이야기 한다. 이두는 소리하나하나를 모두 표기하지는 않았지만 향찰은 소리하나하나를 다 표기했다는데 이두와 향찰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향찰식 표기자료는 고려시대 도이장가 이두식(吏讀式) 표기로 된 향가(鄕歌) 형식의 노래로, 8구체(句體)를 4구씩 2분하여 지었다. 1120년(예종15) 왕이 서경(西京:平壤)에 행차하여 팔관회(八關會)가 열렸을 때, 그 자리에 개국공신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의 가상(假像)을 만들어 참석하게 한 것을 보고, 왕이 그들의 공을 추도하여 지은 노래이다.
를 마지막끝으로 문헌에서 사라진다. 향찰이 이렇게 빨리 사라진 원인은 표기체계의 자체의 불완전성과 한자문화의 침투로 볼 수 있다.
넷째, 구결은 한문의 의미 파악에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하여 국어표현의 형태부를 삽입할 때 한자의 음과 훈을 이용하여 표기한 것이다. 이두와 향찰이 국어표현과 관련된 것에 반하여 구결은 한자나 한문의 이해와 관련된 것이다. 구결은 우리나라 사람이 한문을 읽을 때 문맥을 분명히 이해하기 위하여 구절마다 삽입하던 국어의 조사, 이(是), 爲(하니) 같은 기능어를 말한다. 구결은 ‘토’ 또는 ‘현토’, ‘입
라. 한자 차용표기법의 구별
한자차용표기법은 한자차용방법이나 표기 범위 또는 기록물의 성격 등에 따라서 다시 고유명사(固有名詞) 표기, 이두(吏讀), 향찰(鄕札), 구결(口訣) 로 구별된다.
첫째, 고유명사의 표기란 인명, 지명, 관직명 등의 어휘만을 한자를 빌려서 기록한 것이다.
둘째, 이두(吏讀)는 국어의 문장을 기록하기 위하여,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그 조사와 어미 그리고 일부 명사와 부사를 표기한 것이다. 이두는 주로 관리들의 공문서류인 이문에 쓰였다. 즉 조선시대까지도 사용되었다. 이두는 이문에서 한자를 이용하여 우리말을 표기하는 표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법을 총칭하는 것을 광의의 이두로 보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고유명사 표기, 향찰 이두 향찰 구결의 관계 :한자의 음과 훈을 차용하여 우리말을 기록하던 향찰과 이두, 구결은 동일한 원리가 작용된다는 점에서 동일한 개념으로 파악되고 용도가 서로 다르다는 점에서 별개의 개념으로 파악된다. 향찰, 이두, 구결의 발생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고려 초기 향찰식 표기법(운문 표기)이 소멸된 후 한자 차용표기법은 두 분류로 나뉘어 발달하였다. 하나는 아전 서리를 중심으로 하는 이속들의 문서기록을 통하여 발달한 이두문이고, 다른 하나는 한문을 학습하는 지식자들의 경서해독을 돕기 위한 수단으로 발달한 구결문 이다. 향찰이 모든 계층의 신라인들이 함께 사용하던 표기법 이었던데 반하여 이두와 구결은 서로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목적으로 사용했다는 차이점이 잇다. 향찰이 문장 전체를 우리말로 표기하고 있지만 이두는 특수한 공문투어와 문법적 형태소만을 차자로 표기하였다. 또 구결은 문법적 형태소만을 차자로 적어 한자차용표기의 사용범위가 한정, 축소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두와 향찰, 고유명사표기는 국어(우리말)을 표기하기위하여 (표현하기위하여) 사용한 것이고 구결은 한문을 이해하기 위하여 보조적으로 사용한 것이란 면에서 구별 될 수 있다.
, 구결을 모두 포함한 개념이다. 이두란 명칭은 15세기의 ‘최만리의 상소문’과 ‘훈민정음의 정인지에 의한 서문’에 처음 나타나는데, 그전에는 ‘吏書’(제왕운기 1287년) 吏道(대명률직해,1395)라 불리었고 이후에는 吏吐(이문잡례), 吏札(이찰,동국여지승람) 吏頭(유서필지)이문(전율통보)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두는 대체로 5세기경에 고구려에서 발생하여 신라에 전달된 것으로 본다. 고구려의 자료로는 5세기경의 고구려의 성벽에 새겨진 명문(銘文)들이 있고 신라의 자료로는 서봉총(瑞鳳)에서 발견된 은합우에 새겨진, 역시 5세기경의 명문이 있다. 신라로 전해진 이두는 그 뒤 임신서기석, 화엄경사경조성기,갈항사석탑기 등의 기록에 모습을 남기고 고려로 이어졌다. 고려에서는 자적선사 능운탑비음기, 정두사 오층석탑조성형지기, 상서도관첩 등의 금석문 또는 문서가 50-60종 남아있다. 고려에서는 <향약구급방>이란 의서를 간행하였다. 조선조에서도 많은 이두자료가 남아있는데 특히 비변사등록 등의 거대한 자료에도 이두가 사용되었다.
이두의 발달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단계는 국어의 어순으로 표기하면서 어휘부는 독자를 사용하고 형태부는 무시하거나 독자를 사용하여 표기하는 것이다.
2단계는 국어의 형태부까지를 표기하는 것으로서 이 때 사용되는 한자는 본뜻은 무시된채, 음상만 차용된 가자를 사용하는 방법이 나타난 것이다. 예를 들면 조사‘을’에 대하여 ‘乙’ 사용하는 등이 그것이다.
이 제2단계 표기법은 8세기 중엽의 자료인 신라 화엄경사경 조성기와 길항사 석탑기에 나타나는데 이시기는 설총이 활동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이와 관련하여 제2단계의 표기법을 설총이 이두를 창시하였다는 기록으로 해석하는 일도 있다.
셋째, 향찰은 한자의 음과 훈을 이용하여 국어의 문장을 온전하게 표현한 것이다. 향찰은 향가를 표기하는데 사용된 차자표기법이다. 한자로 기록되었으나 한자의 음과 훈을 차용하여 우리말 어순에 따라 기록한 것으로 ,주로 어휘적인요소 형태소(체언, 부사, 감탄사)는 한자의 훈, 문법적형태소는 한자의 음을 빌려서 표기했다. 이 표기법에 의한 자료는 신라 향가 26수가 있다. 이 자료들은 모두 고려시대에 문자로 정착된 것이지만, 민간에 널리 유포된 표기법으로서 문자의 보수성을 감안하면 신라의 자료로 간주된다.
향찰표기에는 음차자로만 된 표기와 훈차자로만 된 표기, 그리고 음차와 훈차를 함께 사용한 표기 등이 있다. 이로 볼 때 향찰은 고유명사표기 그리고 이두표기와 같은 차자표기법의 완성된 형태로 보인다. 그래서 향찰은 우리국어표기를 집대성한 것이라고도 이야기 한다. 이두는 소리하나하나를 모두 표기하지는 않았지만 향찰은 소리하나하나를 다 표기했다는데 이두와 향찰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향찰식 표기자료는 고려시대 도이장가 이두식(吏讀式) 표기로 된 향가(鄕歌) 형식의 노래로, 8구체(句體)를 4구씩 2분하여 지었다. 1120년(예종15) 왕이 서경(西京:平壤)에 행차하여 팔관회(八關會)가 열렸을 때, 그 자리에 개국공신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의 가상(假像)을 만들어 참석하게 한 것을 보고, 왕이 그들의 공을 추도하여 지은 노래이다.
를 마지막끝으로 문헌에서 사라진다. 향찰이 이렇게 빨리 사라진 원인은 표기체계의 자체의 불완전성과 한자문화의 침투로 볼 수 있다.
넷째, 구결은 한문의 의미 파악에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하여 국어표현의 형태부를 삽입할 때 한자의 음과 훈을 이용하여 표기한 것이다. 이두와 향찰이 국어표현과 관련된 것에 반하여 구결은 한자나 한문의 이해와 관련된 것이다. 구결은 우리나라 사람이 한문을 읽을 때 문맥을 분명히 이해하기 위하여 구절마다 삽입하던 국어의 조사, 이(是), 爲(하니) 같은 기능어를 말한다. 구결은 ‘토’ 또는 ‘현토’,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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