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조광조의 생애
Ⅱ. 조광조의 저술
Ⅲ. 조광조의 사상
1. 성리설
1) 이기설
2) 심성설
2. 의리론
3. 지치주의
Ⅳ. 조광조가 바라는 도덕국가의 이상향
참고문헌
Ⅱ. 조광조의 저술
Ⅲ. 조광조의 사상
1. 성리설
1) 이기설
2) 심성설
2. 의리론
3. 지치주의
Ⅳ. 조광조가 바라는 도덕국가의 이상향
참고문헌
본문내용
었던 질문에서 당시 당면한 문제들도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해결될 수가 있다하고 , 중종대의 정치 , 사회적인 문제는 왕과 사대부의 마음이 공자의 道에서 멀어졌기 때문임을 말하였으며, 당시 조선 사회의 문제점에 대하여 현실적인 접근을 모색하기 이전에 공자의 가르침이 그 사회의 명백한 목표가 되어야 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도의 터전이 되는 마음을 정성스럽게 한 뒤에는 대신을 공경하고 그에게 정치를 위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임금이 혼자의 힘만으로 다스리려고 한다면 바람직한 정치의 실효를 거두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는 이상정치를 행할 수 있는 방책으로 ‘명도’ 와 ‘근독’을 제시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정치란 곧 “도를 밝히는 것(明道)”이며, 정치를 해야 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홀로 있을 때라도 항상 삼가는 태도로 자신이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키면서(謹獨)” 살아가는 군자여야 했던 것이다. 즉 그는 정치란 하늘의 도리를 따라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였다. 아무리 그 지향하는 도리가 크고 선한 것이라 해도 자신이 이를 지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논리였다.
……이에 대하여 조광조는 먼저 정치를 통하여 이룩하고자 하는 크고 선한 이념적인 목표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정치에 임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그러한 가치를 엄격히 지키면서 살아갈 때 성현의 이상정치는 재현될 수가 있다고 확신하였다……
……중종반정이란 학정을 일삼던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새 왕으로서 王弟였던 중종을 옹립한 사건이었다……연산군은 그 학정의 책임을 추궁당한 셈이지만, 그의 학정을 묵인하고 그 치하에서 고관을 역임한 인물들은 새로운 시대인 중종대에도 공신에 책봉되었던 것이다.
……그는 선비들이 기풍을 함양하지 않으면 나라의 장래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조광조가 현실을 무시하고 무턱대고 원칙론만을 주장한 사람은 아니었다.
……중종에게는 항상 삼가고 믿을 만한 신하들에게 국사를 맡길 것을 충고하였다. 그것이 이상적인 정치를 이룰 수 있는 방책임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가 말한 대신들은 “자신에게 닥칠 어려움을 미리 겟나에 넣지 않는” 충성스러운 신하들이었다.
……그에 있어서 올바른 군신간의 관계는 곧 “의로 보아서 군신간이지만, 정으로는 부자와 같은 것”이었다.
……그의 언행은 조선 사대부들의 도덕적인 각성을 크게 촉구하였던 것이다.
……그는 조선왕조의 유교국가적인 이상을 명확하게 제시함으로써 동시대인들의 도덕적인 사명감을 일깨웠다.
참고문헌
고영진, 조광조 실패했지만 성공한 개혁, 역사문제연구소 편, 실패한 개혁의 역사, 역사비평사, 1998
손문호, 조선조 중기의 개혁 사상 조광조를 중심으로, 사회과학연구, 1996
이종호, 정암 조광조 영원한 개혁의 순교자, 일지사, 1999
조승호, 정암조광조의 개혁정치 연구, 강원사학 제 6집
정성희, 조광조의 도학정치 사상, 동양철학연구, 2002
정두희, 조광조 실천적 지식인의 삶,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아카넷 , 2000
최락도, 우리시대에 조광조가 있다면, 푸른샘, 2002
그에게 있어서 정치란 곧 “도를 밝히는 것(明道)”이며, 정치를 해야 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홀로 있을 때라도 항상 삼가는 태도로 자신이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키면서(謹獨)” 살아가는 군자여야 했던 것이다. 즉 그는 정치란 하늘의 도리를 따라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였다. 아무리 그 지향하는 도리가 크고 선한 것이라 해도 자신이 이를 지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논리였다.
……이에 대하여 조광조는 먼저 정치를 통하여 이룩하고자 하는 크고 선한 이념적인 목표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정치에 임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그러한 가치를 엄격히 지키면서 살아갈 때 성현의 이상정치는 재현될 수가 있다고 확신하였다……
……중종반정이란 학정을 일삼던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새 왕으로서 王弟였던 중종을 옹립한 사건이었다……연산군은 그 학정의 책임을 추궁당한 셈이지만, 그의 학정을 묵인하고 그 치하에서 고관을 역임한 인물들은 새로운 시대인 중종대에도 공신에 책봉되었던 것이다.
……그는 선비들이 기풍을 함양하지 않으면 나라의 장래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조광조가 현실을 무시하고 무턱대고 원칙론만을 주장한 사람은 아니었다.
……중종에게는 항상 삼가고 믿을 만한 신하들에게 국사를 맡길 것을 충고하였다. 그것이 이상적인 정치를 이룰 수 있는 방책임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가 말한 대신들은 “자신에게 닥칠 어려움을 미리 겟나에 넣지 않는” 충성스러운 신하들이었다.
……그에 있어서 올바른 군신간의 관계는 곧 “의로 보아서 군신간이지만, 정으로는 부자와 같은 것”이었다.
……그의 언행은 조선 사대부들의 도덕적인 각성을 크게 촉구하였던 것이다.
……그는 조선왕조의 유교국가적인 이상을 명확하게 제시함으로써 동시대인들의 도덕적인 사명감을 일깨웠다.
참고문헌
고영진, 조광조 실패했지만 성공한 개혁, 역사문제연구소 편, 실패한 개혁의 역사, 역사비평사, 1998
손문호, 조선조 중기의 개혁 사상 조광조를 중심으로, 사회과학연구, 1996
이종호, 정암 조광조 영원한 개혁의 순교자, 일지사, 1999
조승호, 정암조광조의 개혁정치 연구, 강원사학 제 6집
정성희, 조광조의 도학정치 사상, 동양철학연구, 2002
정두희, 조광조 실천적 지식인의 삶,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아카넷 , 2000
최락도, 우리시대에 조광조가 있다면, 푸른샘,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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