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실학(실학사상)의 역사적 배경
Ⅱ. 실학(실학사상)의 개념
Ⅲ. 실학(실학사상)의 성격
Ⅳ. 실학(실학사상)의 시대적 상황
1. 서학의 전래
2. 고증학의 영향
3. 조선 내부의 정치․사회적 변화
Ⅴ. 실학(실학사상)의 유파
1. 실사구시(實事求是)
2. 경세치용(經世致用)
3. 이용후생(利用厚生)
Ⅵ. 실학(실학사상)의 관심분야
Ⅶ. 실학(실학사상)의 개혁론
1. 농업 중심의 개혁론
1) 유형원
2) 균전론
3) 이익
4) 한전론
5) 정약용
6) 여전론
7) 정전제론
8) 둔전론
2.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
1) 북학운동
2) 호락논쟁
3) 홍대용
4) 박지원
5) 박제가
6) 이덕무
7) 유수원(1694-1755)
8) 김정희
Ⅷ. 실학(실학사상)의 의의
참고문헌
Ⅱ. 실학(실학사상)의 개념
Ⅲ. 실학(실학사상)의 성격
Ⅳ. 실학(실학사상)의 시대적 상황
1. 서학의 전래
2. 고증학의 영향
3. 조선 내부의 정치․사회적 변화
Ⅴ. 실학(실학사상)의 유파
1. 실사구시(實事求是)
2. 경세치용(經世致用)
3. 이용후생(利用厚生)
Ⅵ. 실학(실학사상)의 관심분야
Ⅶ. 실학(실학사상)의 개혁론
1. 농업 중심의 개혁론
1) 유형원
2) 균전론
3) 이익
4) 한전론
5) 정약용
6) 여전론
7) 정전제론
8) 둔전론
2.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
1) 북학운동
2) 호락논쟁
3) 홍대용
4) 박지원
5) 박제가
6) 이덕무
7) 유수원(1694-1755)
8) 김정희
Ⅷ. 실학(실학사상)의 의의
참고문헌
본문내용
현실적으로 인정한 위에서 농민들에게 차경지나마 균등하게 분급하자는 점진적인 개혁안이다.
8) 둔전론
서유구(1764-1845)가 주장한 지주층의 경영전환을 중심으로 한 농업개혁론이다. 국가나 지주층이 대규모로 농장을 건설하여 농민을 농업노동자로 종사시키고, 국영농장을 관리하기 위해서 경영형 부농층 가운데 전농관을 선발하여 그들의 경영방식으로 경영하게 하였다. 지주-전호제의 기본적인 모순관계를 개혁은 하되 그것의 타도로서가 아니라 질적인 전환을 통하여 그것을 새로운 사회의 경제기구로서 편입하려하였다. 토지제도 이외에 신분제도, 과거제도, 군사제도, 관직제도 등에 관해서도 광범위한 주장하였다. 사농일치의 원칙에서 신분적인 차별을 없이 하고, 교육의 기회를 균등히하여 능력본위로 관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병농일치와 국가의 재정을 좀 먹는 불필요한 관직의 제거 등 주장하였다. 상공업의 발전이나 화폐의 유통에 의한 농촌경제의 침식을 방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2.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
청의 선진문물을 수용하여 상공업의 유통 및 생산기구, 기술 혁신을 지표로 삼았다.
1) 북학운동
18세기 홍대용(1731-1783), 박지원(1737-1805), 박제가(1750-?), 이덕무(1741-1793), 유득공(1749-?) 등에 의하여 시작. 18세기 중반부터는 북벌론을 대신하여 청의 실체를 인정한 바탕 위에서 그 문화를 수용하자는 북학론으로 인식의 대전환이다. 내재적 요인으로는 종래의 성리학적 인식을 극복하였다.
2) 호락논쟁
- 호론 :충청도 지방의 학자들. 인물성이론→ 기존의 화이론적 사유체계를 그대로 계승
- 낙론 :서울지방의 학자들. 인물성동론 → 화이론을 극복하는 논리체계
북학파는 인물성동론 계승. 중화와 이적의 구분을 하지 않음으로써 병자호란 이후 현실성을 잃어가던 북벌론을 대신해 대청의식의 변화. 나아가 사람에 대한 관심인 심성론뿐만 아니라 물체에 대한 관심으로 관심영역이 확대. 이 과정에서 물에 대한 과학적 인식은 생산력에 대한 관심도 증대하였다. 낙론계 노론 집권층의 젊은이들은 자제군관으로 연행사를 수행하여 북경에 가서 건륭문화에 충격을 받고 조선의 낙후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청의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각성이다.
3) 홍대용
연기(청에의 기행문) 임하경룬 의산문답이 있다. 의산문답에서는 실옹과 허자를 등장시켜 문답에 의해 조선학계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자연과 우주의 문제를 연구할 것을 주장하였다.
4) 박지원
노론 벌열 출신. 규장각 검서로 있으면서 북학을 체제 내의 확산에 기여하였다. 열하일기는 청의 우수한 문화를 도입할 것, 상공업의 발전과 상품유통의 원활화, 기술혁신과 생산의 촉진, 해외 통상의 장려를 통한 국부의 증진 등을 주장하였다.
5) 박제가
북학의는 상업이 사농공을 유통시켜 주는 없어서는 안될 산업이라고 인식하고 유식하는 양반층을 상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소비를 장려해서 생산을 자극해야 하며, 부국책으로 해외무역을 장려해야 한다는 근대 경제사상적인 견해이다.
6) 이덕무
청의 기행문인 연기와 백과전서인 청장관전서가 있다.
7) 유수원(1694-1755)
소론 가문. 북학파로 분류되지는 않았다. 영조 31년(1755) 반역의 혐의로 처형당했다. 우서에는 상공업의 발전을 위하여 권력에서 탈락된 양반계층은 상업을 경영할 것, 상업자본의 육성을 위하여 정부가 허가하는 시전의 독점 상업권을 철저히 보장하며 대상인과 군소상인이 자본을 결합하여 대규모적이고 조직적인 상업을 경영할 것, 상설 시장을 설립하고 이를 통한 상업도시를 형성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당시 심각한 문제였던 전황을 해결하는 방안을 상품화폐경제의 확대에서 구북학파들의 주장은 정조대 규장각을 중심으로 하여 수용되기도 19세기에 김정희(1786-1856)에 이르면 사상적인 틀을 완성하면서 새로운 시대사상으로 부각되고 중인층에까지 확산되었다. 청의 고증학을 수용하고 실사구시의 학문정신으로 경서, 금석, 전고 등에 과학적이고 실증적 연구하였다.
8) 김정희
24세 때 父의 연행사로 수행하여 청의 제일의 학자인 옹방강, 완원 등과 사제의 의를 맺고 청의 고증학의 진수를 터득. 귀국하여 북학의 학문적 수준을 일보 전진시켜 사상적 심화를 도모하였다.
Ⅷ. 실학(실학사상)의 의의
실학사상은 서양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르네상스에 맞먹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우리나라의 민족 근대화의 시발이었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실학사상은 사회정치적 상황의 미성숙, 일부 학자들 중심의 운동, 해당 학자들의 정치권력의 미약 등과 같은 이유로 인해 그 크고 귀한 뜻을 만족스럽게 실현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학사상은 다음과 같은 교육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교육이념의 근대화에 기여했다. 실학사상가들이 주장했던 신분을 초월한 교육이 기회균등 사상과 민본주의적 개인차의 중시 등은 현대의 보편적 교육이념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과거제도의 폐단을 비판하고 다양한 대안을 모색했다. 조선의 과거제도는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현실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폐해가 많다. 이러한 과거제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실학사상가들의 노력은 교육사적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민족주체성의 제고를 들 수 있다. 실학사상가들은 대부분 우리 민족의 지리나 산물, 사회 실정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강조했으며, 이익은 [퇴계집]과 [동국사]를 읽도록 권장했으며, 박지원은 [천자문]이나[사략]과 같은 중국의 문자와 역사를 교육 입문서로 읽히고 있는 실정을 비판했다. 이러한 점들은 모두 민족 주체성을 강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김영호, 실학사상의 발흥 - 한국사 14, 국사편찬위원회, 1975
◈ 김용덕, 조선후기사상사연구, 1977
◈ 솔, 한국 실학연구, 한국 실학 연구학회, 1999
◈ 이은순·이배용 외, 한국사회사상사, 지식 산업사, 1996
◈ 주홍성·이홍순·주칠성, 한국의 실학사상, 서울, 삼성출판사, 1994
◈ 천관우, 실학의 선구- 유형원, 한국의 인간상 제4권, 신구문화사, 1965
◈ 최성영, 한국유학사상사ⅳ 下, 서울 : 아세아문화사, 1995
8) 둔전론
서유구(1764-1845)가 주장한 지주층의 경영전환을 중심으로 한 농업개혁론이다. 국가나 지주층이 대규모로 농장을 건설하여 농민을 농업노동자로 종사시키고, 국영농장을 관리하기 위해서 경영형 부농층 가운데 전농관을 선발하여 그들의 경영방식으로 경영하게 하였다. 지주-전호제의 기본적인 모순관계를 개혁은 하되 그것의 타도로서가 아니라 질적인 전환을 통하여 그것을 새로운 사회의 경제기구로서 편입하려하였다. 토지제도 이외에 신분제도, 과거제도, 군사제도, 관직제도 등에 관해서도 광범위한 주장하였다. 사농일치의 원칙에서 신분적인 차별을 없이 하고, 교육의 기회를 균등히하여 능력본위로 관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병농일치와 국가의 재정을 좀 먹는 불필요한 관직의 제거 등 주장하였다. 상공업의 발전이나 화폐의 유통에 의한 농촌경제의 침식을 방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2.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
청의 선진문물을 수용하여 상공업의 유통 및 생산기구, 기술 혁신을 지표로 삼았다.
1) 북학운동
18세기 홍대용(1731-1783), 박지원(1737-1805), 박제가(1750-?), 이덕무(1741-1793), 유득공(1749-?) 등에 의하여 시작. 18세기 중반부터는 북벌론을 대신하여 청의 실체를 인정한 바탕 위에서 그 문화를 수용하자는 북학론으로 인식의 대전환이다. 내재적 요인으로는 종래의 성리학적 인식을 극복하였다.
2) 호락논쟁
- 호론 :충청도 지방의 학자들. 인물성이론→ 기존의 화이론적 사유체계를 그대로 계승
- 낙론 :서울지방의 학자들. 인물성동론 → 화이론을 극복하는 논리체계
북학파는 인물성동론 계승. 중화와 이적의 구분을 하지 않음으로써 병자호란 이후 현실성을 잃어가던 북벌론을 대신해 대청의식의 변화. 나아가 사람에 대한 관심인 심성론뿐만 아니라 물체에 대한 관심으로 관심영역이 확대. 이 과정에서 물에 대한 과학적 인식은 생산력에 대한 관심도 증대하였다. 낙론계 노론 집권층의 젊은이들은 자제군관으로 연행사를 수행하여 북경에 가서 건륭문화에 충격을 받고 조선의 낙후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청의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각성이다.
3) 홍대용
연기(청에의 기행문) 임하경룬 의산문답이 있다. 의산문답에서는 실옹과 허자를 등장시켜 문답에 의해 조선학계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자연과 우주의 문제를 연구할 것을 주장하였다.
4) 박지원
노론 벌열 출신. 규장각 검서로 있으면서 북학을 체제 내의 확산에 기여하였다. 열하일기는 청의 우수한 문화를 도입할 것, 상공업의 발전과 상품유통의 원활화, 기술혁신과 생산의 촉진, 해외 통상의 장려를 통한 국부의 증진 등을 주장하였다.
5) 박제가
북학의는 상업이 사농공을 유통시켜 주는 없어서는 안될 산업이라고 인식하고 유식하는 양반층을 상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소비를 장려해서 생산을 자극해야 하며, 부국책으로 해외무역을 장려해야 한다는 근대 경제사상적인 견해이다.
6) 이덕무
청의 기행문인 연기와 백과전서인 청장관전서가 있다.
7) 유수원(1694-1755)
소론 가문. 북학파로 분류되지는 않았다. 영조 31년(1755) 반역의 혐의로 처형당했다. 우서에는 상공업의 발전을 위하여 권력에서 탈락된 양반계층은 상업을 경영할 것, 상업자본의 육성을 위하여 정부가 허가하는 시전의 독점 상업권을 철저히 보장하며 대상인과 군소상인이 자본을 결합하여 대규모적이고 조직적인 상업을 경영할 것, 상설 시장을 설립하고 이를 통한 상업도시를 형성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당시 심각한 문제였던 전황을 해결하는 방안을 상품화폐경제의 확대에서 구북학파들의 주장은 정조대 규장각을 중심으로 하여 수용되기도 19세기에 김정희(1786-1856)에 이르면 사상적인 틀을 완성하면서 새로운 시대사상으로 부각되고 중인층에까지 확산되었다. 청의 고증학을 수용하고 실사구시의 학문정신으로 경서, 금석, 전고 등에 과학적이고 실증적 연구하였다.
8) 김정희
24세 때 父의 연행사로 수행하여 청의 제일의 학자인 옹방강, 완원 등과 사제의 의를 맺고 청의 고증학의 진수를 터득. 귀국하여 북학의 학문적 수준을 일보 전진시켜 사상적 심화를 도모하였다.
Ⅷ. 실학(실학사상)의 의의
실학사상은 서양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르네상스에 맞먹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우리나라의 민족 근대화의 시발이었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실학사상은 사회정치적 상황의 미성숙, 일부 학자들 중심의 운동, 해당 학자들의 정치권력의 미약 등과 같은 이유로 인해 그 크고 귀한 뜻을 만족스럽게 실현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학사상은 다음과 같은 교육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교육이념의 근대화에 기여했다. 실학사상가들이 주장했던 신분을 초월한 교육이 기회균등 사상과 민본주의적 개인차의 중시 등은 현대의 보편적 교육이념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과거제도의 폐단을 비판하고 다양한 대안을 모색했다. 조선의 과거제도는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현실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폐해가 많다. 이러한 과거제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실학사상가들의 노력은 교육사적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민족주체성의 제고를 들 수 있다. 실학사상가들은 대부분 우리 민족의 지리나 산물, 사회 실정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강조했으며, 이익은 [퇴계집]과 [동국사]를 읽도록 권장했으며, 박지원은 [천자문]이나[사략]과 같은 중국의 문자와 역사를 교육 입문서로 읽히고 있는 실정을 비판했다. 이러한 점들은 모두 민족 주체성을 강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김영호, 실학사상의 발흥 - 한국사 14, 국사편찬위원회, 1975
◈ 김용덕, 조선후기사상사연구, 1977
◈ 솔, 한국 실학연구, 한국 실학 연구학회, 1999
◈ 이은순·이배용 외, 한국사회사상사, 지식 산업사, 1996
◈ 주홍성·이홍순·주칠성, 한국의 실학사상, 서울, 삼성출판사, 1994
◈ 천관우, 실학의 선구- 유형원, 한국의 인간상 제4권, 신구문화사, 1965
◈ 최성영, 한국유학사상사ⅳ 下, 서울 : 아세아문화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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