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도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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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안정해서 이정한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고 특히 색채 자체가 백자와 잘 어울리지 않는 다는 판단이 있었다.
그런데 청화안료로 일관하고 있던 조선백자에 획기적인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18세기에 일반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면서 사무역을 통해 들어온 중국과 일본의 다책새 백자가 유행하면서 부분적으로 시작되었다. 특히 19세기에 관요백자의 일각에서 유행하였던 청화와 철화,진사를 같이 쓰는 다채색 기법과 청화나 진사안료를 전면에 바르는 기법, 그리고 부조와 같은 양각기법 등이 서로 어울려 다양한 장식효과를 나타내고 있는데, 이러한 경향들은 수입된 다채색백자가 끼친 영향으로 볼 수 있다.
15,16세기의 백자 - 정돈된 딱딱함
15세기 전반의 백자 자료로는 현재 남아 있는 예가 없다. 그러나 문헌 기록에 따르면 광주, 고령 등에서 백자를 제작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자의 작은 그 당시의 분청자에 비하면 매우 적은 양으로 현재 고아주 벚천리 군둑골과 내곡에 소재한 상감백자 가마터에서 출토되는 백자펴능로 짐작된다. 담청회백색의 백자로 대접이나 항아리의 외면에 굵은 음각선으로 연당초문, 모란문, 초문 등을 간략하게 나타낸 뒤 철채를 하여 흑상감으로 나타낸 상감백자들과 최백자들로 이시기 백자의 모습을 알려주고 있다.
16세기 전반에 들어 백자의 발달은 더욱 촉진되어 양질의 백자와 청화백자의 제작이 15세기 후반을 이어 더욱 발전해 간다. 광주에는 도마리 분원의 뒤를 이어 무갑리, 우산리, 번천리 등의 지역에서 분원이 설치되어 활발하게 제작 활동을 벌여간다.
16세기 후반에는 성리학의 발달에 따라 전국적으로 서원이 설립되고 향약이 보급되어 사람들의 세력이 확대되었다. 특히 향약의 보급과 서원의 설립은 성리학의 발달을 촉진시켜 백자의 실생활화를 가져왔으며 분청자의 백자화가 계속 되어 백자에 흡수되는 현상을 가져왔다.
17세기 - 조선적인 세계의 재발견
17,8세기에 들어가면 중국은 백자나 청화백자 위에 에나멜로 삼채, 오채, 칠채를 칠하여 화려한 채색자기를 만들고 일본은 그것을 배워 중국 자기와 똑같이 만들어 유럽에 수출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전부 오랑캐의 짓이라고 하여 세계를 바라보지 않고 내부로 들어간다. 청이 들어서면서 청과의 교류가 중단되어 청료를 구할 수 없게 되자 간결한 순백자와 함께 예전에 철화분청자를 만들 때 사용하였던 산화철로 철화백자를 많이 만들게 된다.
17세기 후반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상처가 아물며 조선적인 성리학의 발전으로 실학이 성립되고 조선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움직임이 정치, 사회, 문화에 반영되는 시기였다. 도자에 있어서도 백자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사용되었다. 회색의 백자에서 유백색의 백자로 바뀌어가며 둥근 달항아리가 제작되었고 철화 기법으로 운룡문, 초화문, 매죽문 등이 자유롭게 시문된 철화백자가 발전하였으며 초화문의 간결한 청화백자가 등장한 시기였다.
철화백자는 태토 위에 붓을 사용하여 산화철의 철사 안료로 문양을 그린 뒤 유약을 입혀 번조한 것이다. 철사란 산화제이철을 주성분으로 한 일종의 안료로 적색점토질의 분말을 이루고 있는 상태이며 비교적 순도가 높다. 이 산화제이철에 의한 붉은색은 번조 온도, 번조 시간 및 번조 분위기에 따라 달라져 섭씨 800도에서는 피와 같은 적색이 나며 1,000도 이상에서는 자흑색이 된다. 조선시대 철화백자는 대부분 환원염으로 번조되며 번조 분위기에 따라 철색, 자흑색을 띠는 예가 대부분이다.
18세기 - 고전적인 백자의 완성
18세기는 숙종, 영조, 정조의 시기로 조선시대 후기 문화의 전성기였다. 실학의 발전이 두드러졌으며 농업 생산력의 향상과 상품, 화폐 경제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문예에 있어서도 시조, 판소리, 서민문학, 진경산수화와 풍속화의 유행으로 문화의 황금기를 누렸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백자에 있어서 고전적인 유백색, 설백색의 백자와 간결한 청화백자가 제작되었으며 그 제작의 중심이 광주의 금사리와 분원리였다.
1700년을 전후해서 백자의 색이 회백색에서 유백색, 설백색으로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금사리 가마에서는 유백색의 백자를 바탕으로 풍만하게 이루어진 둥근 달항아리를 비롯한 다양한 항아리와 굽이 높아진 각종 제기, 각과 면을 다듬은 병과 항아리, 청화로 간결하게 매화, 대나무, 패랭이, 난초, 국화꽃 등이 시문된 병과 항아리와 사발과 접시들, 추초문으로 불리는 야생의 풀들이 간결하게 시문된 청화백자 등의 제작이 시작되었음을 알려 준다.
18세기 후반에는 청화백자가 활발히 제작되어 다양한 무늬의 기명이 제작된다. 항아리의 경우 어깨 부분과 목 부분에 여의두문대나 연판문대 등이 장식되기 시작하였고 무늬의 주제도 산수, 매조, 인물, 동식물, 장생문 등의 회화적인 것이 보인다. 각병, 각항아리, 각접시 등의 기명이 더욱 활발하게 제작되었고 필통, 필가, 연적 등 문방구류의 제작도 활발해 진다. 특히 청백색의 백자 제작이 18세기 말에 시작되어 양각, 음각, 상형, 투각의 깔끔하고 청초한 조선 후기 백자가 만들어졌다. 또한 산화동을 안료로 한 동화백자의 제작이 분원과 영흥 등의 지방에서 개성있게 이루어졌다.
19세기 - 더욱 정취 깊은 한국적인 세계
백자는 18세기의 뒤를 이어 분원리 가마에서 더욱 활발하게 제작되었으며 청화백자를 중심으로 음각, 양각, 투각, 상형의 순백자가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또한, 생활용기가 다양한 형태로 제작 사용되어 한국적인 세계를 보여준 백자의 전성기였다. 문양에 있어서도 한국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십장생의 사슴과 불로초, 운학과 거북, 소나무와 바위, 해와 달의 멋들어진 모습과 운룡의 힘찬 필치, 운봉의 활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이 시기는 백자와 청화백자가 분원리 가마 특유의 청백자를 바탕으로 기형과 문양에서 더욱 정취깊은 한국적인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문방구류와 제기류의 놀라운 바전과 장생문의 유행은 이 시기 백자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우리 옛 도자기, 빛깔있는책들, 대원사, 윤용이
알기쉬운 한국도자사, 학고재, 유홍준 윤용이
우리도자이야기, 재단법인세계도자기엑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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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5.13
  • 저작시기2007.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35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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