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스미디어와 대중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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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매스미디어와 대중문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패션
1) 사회적 배경
2) 패션경향
(1) 진의 변화
(2) 기능복의 도입
(3) 남성들의 패션에 대한 관심 증대
(4) 유니섹스
(5) 펑크패션
2. 대중음악
1) 트로트의 열풍
2) 대학가요제
3. 영화
4. TV
1) 앵커의 등장
2) 유신 방송법
3) 프로그램 및 연예인 이름의 국산화
4) TV 일일 연속극의 붐
5) 반공 드라마와 정책 홍보 드라마
Ⅲ. 결론

본문내용

쟁으로 TV 수신기는 급속히 늘기 시작했다. TV가 점점 대중화되면서 그 내용도 변화의 길을 겪게 되었다. 부유층만이 TV 수신기를 보유할 수 있었을 때엔 아무래도 중상층 취향을 고려해야 했으나 점점 더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수신기 대중화에 따른 내용의 통속화가 시도된 것이다. 그런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1973년에 나타난 일일연속극 붐이었다.
한국 최초의 일일연속극은 1964년에 방영된 TBC의 <눈이 나리는데>였다. 이는 기술적 한계 때문에 스튜디오에 사전에 녹화한 것이 아닌 생방송으로 제작되었으며, 제작 여건상 무리를 범한 것으로 25회로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1969년 1월 표준녹화기의 도입으로 기술적인 어려움이 해결되자, 1969년 5월 KBS의 <신부 1년생>이 태어났고, 1969년 8월 8일에 개국한 MBC TV는 개국하면서 집중적으로 일일극을 편성하기 시작했다.
TBC의 <아씨>는 1970년 3월 2일부터 1971년 1월 9일까지 253회 방영되었는데, 당시로선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한 예가 있는데, 아씨의 남편이 한창 외도를 하며 아씨를 냉대하는 장면들이 속출되고 있을 무렵 부인들이 떼를 지어 방송국으로 몰려와 남편을 작품에서 죽여주든가 개심시켜 달라고 사뭇 협박조를 간청을 하던 일이 그것이다. 또한 <아씨>의 인기가 어찌나 대단했던지 <아씨>가 방송되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각 영화사들이 경쟁적으로 영화화를 시도하여 드라마가 끝나기도 전에 이미 2편의 영화가 상영되었으며 주제가도 히트를 쳐 많은 사람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아씨>의 대성공에 힘입어 1971년 일일연속극은 전년에 비해 9편에서 13편으로 늘었고 주간극은 12편에서 9편으로 줄었다. 20분을 주축으로 한 일일극이 오후 7시에서 10시에 이르는 주시청 시간대에 편성되어 '기간전략품목'으로 정착되었다. 당연히 방송사들의 일일연속극 경쟁도 매우 치열했으며, 반면 사회 교양 프로그램은 점점 줄어들으니, 바야흐로 오락 프로그램의 전성시대가 온 것이다.
KBS TV가 1972년 4월 2일부터 211회 방영한 <여로>의 인기도 대단했다.
MBC TV는 <여로>에 대항해 일일극 <새엄마>를 편성했는데, <새엄마>는 1972년 8월 30일부터 1973년 12월 28일까지 방영되어 우리 나라 일일극 최장수를 기록했으며, 이른바 '김수현 드라마' 시대를 알리는 드라마이기도 했다.
<여로>와 <새엄마>의 인기는 1973~74년에 일일극 홍수 사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은 일일극을 낳게 했다. 3개 채널을 합해 하루 15편 안팎의 텔레비전 드라마가 방영되는 기현상을 빚기까지 했다.
이러한 일일연속극 성공의 저변에는 이전의 라디오 드라마 전성시대가 일반 수용층, 특히 여성층에게 심어 놓은 '연속 드라마'에 대한 애착과 습성이 있었다. 그러한 성향이 궤도 수정이 고려되지 않은 채 텔레비전에 적용됨으로써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의 성격이나 방향을 결정짓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일일극 붐 조성의 이유에는 일일극이 가진 대중성 외에 그 특유의 수익성이 존재했다. 즉 일일극은 5-6편을 하루에 녹화할 수 있어 단회로 끝나는 드라마에 비해 제작비 단가가 훨씬 싸며 작가와 스튜디오 및 제작진의 부족을 최대한으로 커버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작비에 비해 시청자와의 접촉도가 높다는 이점 때문에 광고주의 환영을 받아서 너도나도 일일극의 스폰서가 되고 싶다고 나선 것, 시간이 짧아(20분 단위) 앞뒤의 프로그램 광고, 또 사이에 스포츠 광고를 넣을 수 있었던 점도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이처럼 일일극의 제작 동인은 철저하게 대중성과 수익성이었다.
5) 반공 드라마와 정책 홍보 드라마
박 정권은 '퇴폐 드라마'의 조기 종료, 편수의 감축, 방송시간대 제한 등과 같은 지침을 하달하는 동시에 소재를 유도해 일일극의 파급력과 인기를 이용하려는 적극적인 정책을 구사하였다. 그러한 소재 유도의 결과 반공극이 많이 제작되었지만, 이미 기존 일일극의 재미를 맛본 시청자들의 눈높이에 맞추고자 했던 제작자들의 시도는 정책 당국의 불만을 자아냈다.
그래서 방송국이 선택한 드라마 형태는 '반공 드라마'보다 한 단계 세련된 홍보 감각을 보여 주는 '정책 홍보성 드라마'였다. 1975년 4월 15일부터 10월 5일까지 398회를 기록한 KBS의 <팔도강산>이 대표적인 '정책 홍보성 드라마'다.
Ⅲ. 결론
70년대의 정치, 경제는 당대의 대중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TV 수상기의 보급으로 일일 드라마의 열풍과 영화의 위축이라는 결과를 가져왔고, 反사회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펑크족의 패션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경제력의 향상과 박정권의 정책으로 TV수상기가 보급되면서 TV 프로그램은 많은 변화를 불러왔다. 교양프로그램이 줄어들고 일일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오락프로그램이 증가되었으며, 박정권에 편승한 MBC 방송사를 선두로 앵커가 최초로 등장하고 프로그램 이름과 연예인 이름의 국산화 등 작은 소동도 생겼다.
이와 반대로 TV의 보편화 속에서 영화는 점점 위축되어 갔다. 방송의 제제에만 끝나지 않은 정부는 영화에도 많은 제제를 가했고, TV와는 반대로 영화는 이런 유신정권에 맞는 정책 수단이 되지 않는다하여 많은 영화가 통제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0년대부터 이어져온 문예영화흐름이 이때에도 주조를 이루었으며, 그 외에도 멜로드라마, 10대 영화 그리고 당시의 유신정책과 맞아 떨어지는 반공, 군사, 새마을, 계몽영화들이 홍수를 이루었다.
패션 또한 경제력의 향상으로 인해 여성 패션의 변화, 남성들의 레져웨어와 스포츠웨어에의 관심 증대, 기능복의 도입 등의 변화를 보였으며, 사회정책에 反하는 패션인 펑크패션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음악에 있어서 월남 전쟁이 있으므로 해서 트로트와 고고 음악이 판을 쳤다. 고고 음악은 또한 대학가요제와 맞물려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70년대의 대중문화는 정부의 통제아래 절제된 문화였으며, 反사회적인 양상을 띠었기도 하지만 상업적정치적 목적이 다분한 저급문화 당시 사회에서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으로서 고급문화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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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6.29
  • 저작시기20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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