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왕사신
2. 이 선
3. 김 농
4. 황 신
5. 고 상
6. 정 섭
7. 이방응
8. 나 빙
Ⅲ. 결론
Ⅱ. 본론
1. 왕사신
2. 이 선
3. 김 농
4. 황 신
5. 고 상
6. 정 섭
7. 이방응
8. 나 빙
Ⅲ. 결론
본문내용
능하여 종이 창, 회벽, 햇빛, 달빛에 비친 대나무를 그리고 “눈앞의 대나무[面前之竹]”에서 “마음속의 대나무[胸中之竹]”를 거쳐 “손 안의 대나무[手中之竹]”에 도달하는 예술적 변화를 이루었고 시적인 정취와 그림의 경지에서 절개와 기개를 칭송하고 민간의 고통에도 관심을 갖는 포부를 표현하였다. 그는 또한 “참된 기운, 참된 뜻, 참된 정취의 삼진의 묘[眞氣, 眞義, 眞趣三眞之妙]”가 있었다. 옛 사람의 작품태도[成法]에 대해서는 “반은 배우고 반은 버리며[學一半, 撤一半]”, “스스로 발전할 곳을 찾을 것[自探靈苗]”을 주장하여 옛 사람에게 구속되지 않고 시서화에 독창적인 유파를 이루었다. 그는 가난하고 미천한 인생을 살았으나 인자함과 사랑의 정신으로 가득했던 시인이기도 했으며, 하늘과 땅을 거실로 생각하는 산승(山僧)이고 싶어 했으며, 순박하고 묵직한 화가였다. 정섭도 김농처럼 도장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으며, 그의 작품은 그림과 도장이 조화롭게 어울려 별스러운 맛을 더해준다.
그는 글씨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호탕하고 상쾌하며 고삐에 메이지 않아 특별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 <육분반서(六分半書)>는 예서와 팔분을 융해하여 행서와 해서에 삽입하였고, 또한 여기에 난초나 대나무를 그리는 화필을 첨가하여 스스로 독특한 풍격의 서체를 만들었다. 이러한 서체에 대하여 그는 일찍이 시를 지어 말하길 “날마다 연못에 임하여 먹을 가니 어찌 향내 나는 분과 아름다움을 다툴까? 화법을 알고 서법에 통하면 난초와 대나무도 마치 초서나 예서와 같다.”라고 하였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아재죽도(衙齋竹圖)>, <난죽석도(蘭竹石圖)> 등이 있다.
7. 이방응(李方應, 1693년~1695년)
자는 청강(晴江)이고 어릴 적 자는 용각(龍角). 호는 규중(仲)ㆍ선리(仙李)라 하였다. 강소의 남통주(南通州) 사람이다. 그는 오랜 관리 생활을 하였으면서도 강직한 성격을 고치지 못하여 벼슬이 오르지 못하였고, 때로는 투옥되고 파직되기도 하였다. 난중매와 화훼를 잘 그린 그는 큰 그림이나 작은 그림이나 모두 있는 힘을 다해 그렸는데 50대 작품이 더욱 그렇다. 그의 그림은 구도와 필치가 자유분방하고 격식에 구애되지 않아 기취(奇趣)가 있으며, 서위(徐渭)의 화풍과 닮았다는 말도 들었다. 4폭의 그림이 함께 있는 화훼화책(花卉畵冊) 중의 하나인 이 그림은 화제, 구도 등이 다 기이하다. 즉, 난초 한포기는 거꾸로 그리고 다른 한포기는 바로 그린점이 그렇다. 또한 난 잎도 기괴할 정도로 얽혀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난석도(蘭石圖)>, <죽석도(竹石圖)>, <풍죽도(風竹圖)>, <고송도(古松圖)> 등이 있다.
8. 나빙(羅聘, 1733년~1799년)
나빙의 자는 족부(簇夫)이고, 호는 양봉(兩峰)ㆍ금우산인(金牛山人)ㆍ화지사승(花之寺僧)이다. 강소의 양주 사람으로, 원적은 안휘의 휘주이다.
김농이 77세로 세상을 뜰 때 나빙은 30대의 한창 나이로 김농의 제자였다. 금농의 예술을 전면적으로 발전시켰고 <귀취도(鬼趣圖)>를 그려 현실을 풍자한 것으로 유명하다. 나빙은 인물, 산수, 화조, 매죽, 불상, 화훼 등 어떤 그림이라도 교묘하게 잘 그렸지만 그의 괴상한 성격 탓인지 귀신과 괴물그림에 더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그의 그림에서는 수많은 괴석이나 인물과는 다른 독특한 점들을 엿볼 수 있다. 구도와 화법이 다르고 분위기가 모두 다르다. 또한 작가만의 언어로 표현된 독자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그림이 많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정명거사상>, <형만민국(荊蠻民國)>, <청석구원도(淸汐舊院圖)>, <화훼도> 등이 있다.
Ⅲ. 결론
양주팔괴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그들에게서 또한 그들의 작품에서 어떤 점을 배워야 할까?’ 라는 생각을 곰곰이 해보게 되었다. 따라서 조금 조심스럽긴 하지만 현재의 예술가들이 지향해야 할 바를 이들 양주팔괴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시대에 살고 있다. 정보를 마음껏 선택할 수 있으며, 자기와 맞는 것을 적절히 골라내어 또 다시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언제든 시간과 여유만 있다면 옛 사람들의 예술 작품도 손쉽게 감상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감상하고 거기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정보는 습득된 지식으로 남을 수 없게 된다. 양주팔괴가 양주에서 활동한 목적은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그들이 후세에 다시 재조명을 받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들의 작품에서는 그들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강희제 후기와 옹정제를 거쳐 건륭제 중기까지 활동을 했다. 이 시기는 청대가 가장 번영했던 때이기도 하다. 당시 공업과 상업이 번성한 양주에는 직업적 문인화가들이 대거 모여들었으며, 그들 대다수는 신분이 비천했고 불우한 인생 역정을 겪으며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비슷한 인생 경험, 사상과 감정, 인생관, 성격과 기호를 가진 그들은 예술에서 개성의 발휘와 독창성의 추구를 중시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주관과 내심을 표현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결국 그들의 작품에 심오한 사회적 내용과 사상적 내함(內涵)을 부여했다. 그들은 수묵의 사의적 회화 기법을 운용하며, 간략한 필묵으로 물상의 정신을 전달하는데 뛰어났다. 그들의 대담하고 독창적이며 청신하고 분방한 화풍은 ‘기괴’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들의 작품은 동시대 사람들에겐 기괴하다 하여 좋은 평을 받지 못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우리가 예술 작품을 통해 드러내야 하는 것들을 그들은 충실히 발휘하였기 때문에 더욱 높이 평가 받는 것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처럼 자연에서 배우고, 자신의 개성을 표출하며, 자신의 법을 사용하고, 사의에 힘쓰며, 인품을 가꾸며, 수양을 넓혀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펼쳐나가야 하겠다.
<참고문헌>
박은화 옮김, 『간추린 중국미술의 역사』, 시공사, 2008.
담단경 편저, 『中國藝術史』, 열하당, 1991.
제임스 캐일 지음, 『中國繪史』, 열하당, 2002.
곽노봉 역, 『中國書藝80題』, 동문선, 1997.
저우스펀 지음, 『揚州八怪』, 창해, 2006.
그는 글씨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호탕하고 상쾌하며 고삐에 메이지 않아 특별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 <육분반서(六分半書)>는 예서와 팔분을 융해하여 행서와 해서에 삽입하였고, 또한 여기에 난초나 대나무를 그리는 화필을 첨가하여 스스로 독특한 풍격의 서체를 만들었다. 이러한 서체에 대하여 그는 일찍이 시를 지어 말하길 “날마다 연못에 임하여 먹을 가니 어찌 향내 나는 분과 아름다움을 다툴까? 화법을 알고 서법에 통하면 난초와 대나무도 마치 초서나 예서와 같다.”라고 하였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아재죽도(衙齋竹圖)>, <난죽석도(蘭竹石圖)> 등이 있다.
7. 이방응(李方應, 1693년~1695년)
자는 청강(晴江)이고 어릴 적 자는 용각(龍角). 호는 규중(仲)ㆍ선리(仙李)라 하였다. 강소의 남통주(南通州) 사람이다. 그는 오랜 관리 생활을 하였으면서도 강직한 성격을 고치지 못하여 벼슬이 오르지 못하였고, 때로는 투옥되고 파직되기도 하였다. 난중매와 화훼를 잘 그린 그는 큰 그림이나 작은 그림이나 모두 있는 힘을 다해 그렸는데 50대 작품이 더욱 그렇다. 그의 그림은 구도와 필치가 자유분방하고 격식에 구애되지 않아 기취(奇趣)가 있으며, 서위(徐渭)의 화풍과 닮았다는 말도 들었다. 4폭의 그림이 함께 있는 화훼화책(花卉畵冊) 중의 하나인 이 그림은 화제, 구도 등이 다 기이하다. 즉, 난초 한포기는 거꾸로 그리고 다른 한포기는 바로 그린점이 그렇다. 또한 난 잎도 기괴할 정도로 얽혀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난석도(蘭石圖)>, <죽석도(竹石圖)>, <풍죽도(風竹圖)>, <고송도(古松圖)> 등이 있다.
8. 나빙(羅聘, 1733년~1799년)
나빙의 자는 족부(簇夫)이고, 호는 양봉(兩峰)ㆍ금우산인(金牛山人)ㆍ화지사승(花之寺僧)이다. 강소의 양주 사람으로, 원적은 안휘의 휘주이다.
김농이 77세로 세상을 뜰 때 나빙은 30대의 한창 나이로 김농의 제자였다. 금농의 예술을 전면적으로 발전시켰고 <귀취도(鬼趣圖)>를 그려 현실을 풍자한 것으로 유명하다. 나빙은 인물, 산수, 화조, 매죽, 불상, 화훼 등 어떤 그림이라도 교묘하게 잘 그렸지만 그의 괴상한 성격 탓인지 귀신과 괴물그림에 더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그의 그림에서는 수많은 괴석이나 인물과는 다른 독특한 점들을 엿볼 수 있다. 구도와 화법이 다르고 분위기가 모두 다르다. 또한 작가만의 언어로 표현된 독자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그림이 많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정명거사상>, <형만민국(荊蠻民國)>, <청석구원도(淸汐舊院圖)>, <화훼도> 등이 있다.
Ⅲ. 결론
양주팔괴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그들에게서 또한 그들의 작품에서 어떤 점을 배워야 할까?’ 라는 생각을 곰곰이 해보게 되었다. 따라서 조금 조심스럽긴 하지만 현재의 예술가들이 지향해야 할 바를 이들 양주팔괴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시대에 살고 있다. 정보를 마음껏 선택할 수 있으며, 자기와 맞는 것을 적절히 골라내어 또 다시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언제든 시간과 여유만 있다면 옛 사람들의 예술 작품도 손쉽게 감상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감상하고 거기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정보는 습득된 지식으로 남을 수 없게 된다. 양주팔괴가 양주에서 활동한 목적은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그들이 후세에 다시 재조명을 받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들의 작품에서는 그들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강희제 후기와 옹정제를 거쳐 건륭제 중기까지 활동을 했다. 이 시기는 청대가 가장 번영했던 때이기도 하다. 당시 공업과 상업이 번성한 양주에는 직업적 문인화가들이 대거 모여들었으며, 그들 대다수는 신분이 비천했고 불우한 인생 역정을 겪으며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비슷한 인생 경험, 사상과 감정, 인생관, 성격과 기호를 가진 그들은 예술에서 개성의 발휘와 독창성의 추구를 중시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주관과 내심을 표현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결국 그들의 작품에 심오한 사회적 내용과 사상적 내함(內涵)을 부여했다. 그들은 수묵의 사의적 회화 기법을 운용하며, 간략한 필묵으로 물상의 정신을 전달하는데 뛰어났다. 그들의 대담하고 독창적이며 청신하고 분방한 화풍은 ‘기괴’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들의 작품은 동시대 사람들에겐 기괴하다 하여 좋은 평을 받지 못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우리가 예술 작품을 통해 드러내야 하는 것들을 그들은 충실히 발휘하였기 때문에 더욱 높이 평가 받는 것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처럼 자연에서 배우고, 자신의 개성을 표출하며, 자신의 법을 사용하고, 사의에 힘쓰며, 인품을 가꾸며, 수양을 넓혀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펼쳐나가야 하겠다.
<참고문헌>
박은화 옮김, 『간추린 중국미술의 역사』, 시공사, 2008.
담단경 편저, 『中國藝術史』, 열하당, 1991.
제임스 캐일 지음, 『中國繪史』, 열하당, 2002.
곽노봉 역, 『中國書藝80題』, 동문선, 1997.
저우스펀 지음, 『揚州八怪』, 창해, 2006.
추천자료
중국의 교육
영화 패왕별희 감상문
중국화폐 위안화에 대하여
노무관리사례
떠오르는 용 중국 서평
[홍콩반환]홍콩차이나 주권반환에 따른 경제적 성과 및 개방정책
2인자로서 저우언라이가 보여줬던 리더십과 그 리더십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알아보시오.
백두산의 역사, 생태환경, 자원 및 오염정황
[핵폐기물]방사성 폐기물(핵폐기물)의 분류, 방사성 폐기물(핵폐기물)의 특이성, 방사성 폐기...
[중국정치사상, 등소평사상(마오쩌둥사상과 덩샤오핑사상)]중국정치사상의 역사, 중국정치사...
중국 통사 요약과 느낀점 <상식과 교양으로 읽은 중국의 역사> (하, 상(은), 주, 춘추전국, ...
[상사중재론] 중국 중재제도의 주요 내용과 문제점
중국의 변화 모색 - 모택동(마오쩌둥/毛澤東) & 등소평(덩샤오핑/鄧小平)
아시아 경영론 -중국 은행업 시장분석(5C분석 & SWOT분석)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