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노직이 상정하고 있는 최소국가의 성립과 자립인의 발생
Ⅱ. 재분배(再分配)에 대한 노직의 입장
Ⅲ. 자립인에 대한 보상이 만들어내는 굴레
Ⅳ. 개인의 단순화(單純化)화 엘리트적인 사고방식
Ⅴ. 사례의 까칠함: 재분배를 시기(envy)심의 발로라 제시함에 대한 딴지
Ⅵ. 윈윈(win-win)
Ⅶ. 지배적 보호협회에서의 권력은 과연 생겨나지 않을 것인가?
Ⅷ. 성장과 분배의 문제
Ⅸ. 마치며
Ⅹ. 참고 문헌
Ⅱ. 재분배(再分配)에 대한 노직의 입장
Ⅲ. 자립인에 대한 보상이 만들어내는 굴레
Ⅳ. 개인의 단순화(單純化)화 엘리트적인 사고방식
Ⅴ. 사례의 까칠함: 재분배를 시기(envy)심의 발로라 제시함에 대한 딴지
Ⅵ. 윈윈(win-win)
Ⅶ. 지배적 보호협회에서의 권력은 과연 생겨나지 않을 것인가?
Ⅷ. 성장과 분배의 문제
Ⅸ. 마치며
Ⅹ. 참고 문헌
본문내용
과정이라는 것을 비판할 근본적인 입장을 어떻게 제시하여야 할 것인가? 자유주의 입장에 선 롤즈와 노직은 같은 자유주의자이면서도 그 견해를 달리한다. 나는 롤즈의 견해도, 노직의 견해도 절대적으로 옳은 선택은 없다고 생각한다. 한 쪽은 너무나 형이상학적인 측면에서 인간을 낙관한 측면이 없지 않고, 노직의 입장에서는 한 인간을 너무 단순화시키고 그의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법한 착한 아이로 만들어버린 것 같다. 그러나 합당한 부분에 있어 손을 드는 것은 현명하다고 보는데, 그것이 앞서 논의되어 온 재분배에 관한 문제라 할 수 있겠다. 아무튼 그들의 대립점이 되는 이러한 문제를 나는 단순히 성장과 분배의 문제로 치환시켜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내 생각의 기본 구조는, 성장과 분배의 문제는 함께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므로, 어느 하나가 일방적으로 부각될 경우에는 어찌되었건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성장의 부각은 사회적인 박탈감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각각의 개인들이 절대적인 평등이라는 출발선상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출발 선상부터 기회의 평등은 부정된다. 일부는 자신의 부모가 축적한 부(富)를 이용하여 교육을 더 많이 받을 기회를 가지고, 이는 종국에 더 나은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요건을 갖게 만든다. 그렇게 공평하지 못한 출발선상에서 일부 재화를 많이 가진 사람들이 노동자들을 고용하면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은 고려하지 못할 것인가? 한편, 평등이라는 것의 가치는 무임승차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자칫하면 놀고먹고 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장과 분배의 문제는 한꺼번에 맞물려 돌아가야 할 것이다. 이들에게 적절한 보상책을 쥐어주어 성장을 할 수 있는 동력원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지 이들에게 재갈을 물려 더욱더 하강 곡선을 그릴 수밖에 없는 침체된 성장을 이룩해선 안 된다. 그들 간의 격차를 형성하는 이러한 행동은 사회적인 위화감을 조성하여 단기간에는 그 성과가 드러날지는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는 누군가가 누구를 일방적으로 지배해버리는 결과가 나오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지속적인 분배정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대표적인 재분배의 과정은 교육이 아닐까 생각한다. 일정 수준의 교육 조건이 온 국민에게 충족 된다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출발 선상에서의 기회의 평등을 갖게 된다. 이는 더 많은 사람이 사회적 이익을 창출하는 가능성을 넘겨주는 것이다. 이러한 재분배는 곧 성장을 이끄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Ⅸ. 마치며
아나키즘에(anarchism) 대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an-arch-ism의 an은 부정을 나타내며, arch는 극(極)을 가리킨다. 권력의 극을 부정하는 것이 아나키즘이다. 이는 권력의 집중을 반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극(一極)에서 다극(多極)체제로 집중된 힘이나 권력을 하향 분산시켜야 한다. 그러나 노직이 말하는 극단적 자유주의의 입장을 취한다면, 우리는 권력의 하향 분산이 아니라, 권력이 상향 집중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나는 이 에세이를 쓰면서 내가 마치 소설가가 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노직이 제시하는 가정에 대한 논의를 부정하면서 반례로 든 나의 예시역시 소설 같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의 논박을 사례 대 사례로 논박함은, 그의 이론을 대다수 이해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거니와 적절한 코멘트가 아닐 수도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나의 방식으로 그의 입장에 반대하면 반대할수록 작금의 현실 상황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고, 극단적으로 현실에 그의 이론을 접목시킨다면 부정적인 부분(성장 중시, 소속자를 위한 사상적 기반)이 부각되어 나에게 나타남을 느낄 수 있다. 이를 조목조목 부정함으로써 내가 더욱더 절실한 재분배자 - 윈-윈을 말한 것처럼, 극단적인 것은 아니다 - 라는 것을 이 책을 읽고서 발견하게 된 놀라울 따름이다.
Ⅹ. 참고 문헌
로버트 노직. 남경희 역.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 문학과 지성사. 1983.
홍성우. “로버트 노직의 최소국가론” 『국제문학학회』. 역사, 사회, 철학 1권, 1991, pp. 227-256.
장동진. “노직의 정치이론: 최소국가론” 『社會科學論集』. 제25권, 1994, pp. 177-199.
최정윤. “미국의 자유주의: 롤스(Rawls) 노직(Nozick)의 논쟁” 『미국학』. 20권 단일호, 1997, pp. 187-204.
Ⅸ. 마치며
아나키즘에(anarchism) 대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an-arch-ism의 an은 부정을 나타내며, arch는 극(極)을 가리킨다. 권력의 극을 부정하는 것이 아나키즘이다. 이는 권력의 집중을 반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극(一極)에서 다극(多極)체제로 집중된 힘이나 권력을 하향 분산시켜야 한다. 그러나 노직이 말하는 극단적 자유주의의 입장을 취한다면, 우리는 권력의 하향 분산이 아니라, 권력이 상향 집중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나는 이 에세이를 쓰면서 내가 마치 소설가가 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노직이 제시하는 가정에 대한 논의를 부정하면서 반례로 든 나의 예시역시 소설 같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의 논박을 사례 대 사례로 논박함은, 그의 이론을 대다수 이해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거니와 적절한 코멘트가 아닐 수도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나의 방식으로 그의 입장에 반대하면 반대할수록 작금의 현실 상황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고, 극단적으로 현실에 그의 이론을 접목시킨다면 부정적인 부분(성장 중시, 소속자를 위한 사상적 기반)이 부각되어 나에게 나타남을 느낄 수 있다. 이를 조목조목 부정함으로써 내가 더욱더 절실한 재분배자 - 윈-윈을 말한 것처럼, 극단적인 것은 아니다 - 라는 것을 이 책을 읽고서 발견하게 된 놀라울 따름이다.
Ⅹ. 참고 문헌
로버트 노직. 남경희 역.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 문학과 지성사. 1983.
홍성우. “로버트 노직의 최소국가론” 『국제문학학회』. 역사, 사회, 철학 1권, 1991, pp. 227-256.
장동진. “노직의 정치이론: 최소국가론” 『社會科學論集』. 제25권, 1994, pp. 177-199.
최정윤. “미국의 자유주의: 롤스(Rawls) 노직(Nozick)의 논쟁” 『미국학』. 20권 단일호, 1997, pp. 187-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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