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론과 정한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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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정한론과 정한논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정한론의 개념

2. 정한론의 형성배경

3. 정한론의 등장

4. 정한논쟁

5. 정한론에 대한 조선의 대응과 반응

6. 결론

7. 참고자료

본문내용

체직되고 모리야마 등은 8월에 정부의 명에 따라 퇴거하여 외교교섭은 중단되었다.
(2) 개국직전의 대일교섭과 침략의 시작
일본 동래부와 교섭이 정지되자, 외무출사 히로쑤는 1875년 3월에 외무경 데라지마(寺島宗直)에게 측량을 가장하여 군함 1-2척을 조선 근해에 파견해 위협하라고 상신하였다. 데라지마는 산죠와 이와쿠라의 승인을 얻고 해군대보와 협의하여 군함 3척을 한국연해에 파견할 것을 확정하였다.
이리하여 운양호는 이노우에(井上響)의 지휘아래 1875년 4월 부산에 침투하였다. 해군성의 서해 연해로 측량하라는 명을 받고 나가사키를 출항하여 연해를 측량하는 체 하며 북상하였다. 운양호는 앞서 프랑스 함대와 미국함이 침공한 후 어떤 외국함선도 접근할 수 없었던 한강상류 강화근해의 요새지로 접근할 수 있었다. 결국 불법적 무력 시위로 운양호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운양호사건이 전해지자 일본 조야에서는 정한론이 재연되었다. 9월부터 모리야마와 기도의 주앙에 따라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무력 위협으로 개항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앞서 청국의 태도를 타진하기 위해 모리아리를 파견하였다.
당시 외교를 담당하던 이홍장은 국내 문제와 국제분쟁이 확장되어 한국 문제에 간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국에 일본과의 조약 이해관계를 말하고 개항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 당시 한국정부에서도 대 일본에의 교섭론이 긍정성을 띠게 되었다. 고종도 이에 수긍하였지만 타협안은 때가 늦어 버렸다. 일본의 선보사 히로쑤는 11월 20일 부산에 도착, 일본의 전권대사가 강화부로 진입할 것을 통보하자 훈도 훈석운은 서계중 皇勅등 자귀를 수정하면 서계를 봉납할 것이라는 조건으로 일본특사의 파견의 중지를 교섭하였으나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이듬해 고종 13년 (1876) 개회파 인사이며 문정관인 역관 오경시의 보고에 따라 한.일간의 최초의 근대적 의미로써의 개항조약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던 것이다.
(3) 문호개방과 조야의 반응
일본에 의한 위협적이고 일방적인 조건아래 문호 개방의 교섭이 이루어지자 일반 국민은 민씨 정권의 무능에 격분하였다. 최익현 등이 척화의 소를 올리자 김병국, 홍순목 등도 척화론을 주장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시원 임대신이 의정부에서 연일 회의를 거듭하였으나 결정은 못내리고 있었다. 청나라 사신도 한국이 일본의 개항요구를 듣는 것이 유리하다는 이홍장의 뜻을 전하였는데 이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한편 박규수와 오경석의 개국 주장은 쇄국책을 버리고 개국으로 전환하는데 막후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결국 조정의 의견은 개항으로 결정되었다. 1876년의 개랑조약을 체결하기까지 1860년대 후반 이후 약 10년 간에 걸친 집요한 정한 논쟁이 이 시기에 적중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므로 1876년 강화도 조약은 일본 정한론의 최종적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6. 결론
이상 본고에서 정한 논쟁을 논함에 있어 그 출발을 막번 중기에서부터의 조선 멸시관으로 보았고, 막번 말기의 침략론과 그 맥을 같이 하였음을 밝혔다. 그리고 정한논쟁이 강화도 조약까지 이르렀음을 알아보았다. 일본의 정한론이 명치정부 자체의 국한된 정책 과정으로 판단하는 것은 일본의 침략적 맥락을 잘못짚은 결과이다. 따라서 한국 정벌론은 하나의 논리로써 막말에 성숙되었음을 파악해야만 한다. 그 침략 대상은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대륙전체에 미치고 있다는 점을 파고 들어가야 한다. 明治維新 이전에 형성된 자기 인식과 세계 인식의 바탕위에 이 명치초기의 침략논쟁이 입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왜 그러한 가능한 모든 곳으로의 침략대상이 한국으로 좁혀졌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상호-조선과 일본-인식의 괴리 때문이었다는 논리가 타당하다. 오카 요시타게(岡義武)의 말을 마지막으로 본고를 맺고자 한다.
“1873년의 정한론이란 조선의 그때까지 지니고 있던 세계 질서관과 일본의 토쿠가와(德川)시대를 통하여 다듬고 정립시킨 自己인식과 세계인식에 바탕한 東亞世亞世界觀의 상호 충돌에서 생겨난 일본의 挑戰的 논의였다. 때문에 明治 維新부의 첫 대외 충돌은 한국과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중략.....이런 맥락에서 운양호사건으로 불리우는 강화도 도발. 침략에 의해 맺어진 강화도 조약(1876)은 바로 일본의 새로운 자기 인식에서 입각한 동아시아 세계질서를 조선에게 인정시킨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7. 참고자료
강동진, 일본근대사, 한길사
장용걸, 정한론과 조선 인식, 보고사
이현희, 정한론의 배경과 영향, 한국학술정보
  • 가격1,600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9.08.12
  • 저작시기2009.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49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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