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전족
* 중국 고대 성문화의 특징
중국의 열린 침실 속 아내와 첩
성을 예술화한 작품들
* 중국 고대 성문화의 특징
중국의 열린 침실 속 아내와 첩
성을 예술화한 작품들
본문내용
우리의 문화와 유사한 점들이 많지만 성문화와 부부 침실문화에 대해서는 다소 차이 가 있었다.
옛날 중국의 일부다처제는 적게는 수 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의 처첩들이 한 지붕 아래 동거하며 대가족의 형태를 이루고 살았다. 서로 혈연관계가 없는 여자들이 한 지붕 아래에서 한 남자만을 바라보고 생활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말썽이 많고 시기와 질투로 싸움이 잦을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중국에서 일부다처제가 성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하나는, 후사를 잇는 대사였고 다른 하나는, 팽창된 남자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양반들이 첩을 거느리기도 했었다. 또한 대를 잇는 일은 매우 중요한 대사로 여겼기에 씨받이 의 풍습도 있었다.
중국 사람들은 자식을 많이 낳아 기르는 것이 행복한 삶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기에 일부다처제의 호색 전통은 중국인의 성행위와 성적 관념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중의 하나 가 바로 열린 침실이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부부의 침실은 은밀하게 숨겨진 공간이지만 고대 중국인의 에로스적인 침실은 오히려 반공개적이었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침실의 내부는 밖에서도 쉽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구조였다. 우리나라처럼 굳이 손가락에 침을 묻혀 창호지 구멍을 뚫지 않아도 방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공개적이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속삭이는 소리부터 여자의 신음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는데 이렇게 부부의 생활 이 타인에게 노출되어도 별로 개의치 않았던 것이 중국인의 침실문화라고 할 것이다.
침실의 물리적 구조는 인간의 정신적 구조의 발로이다.
한국 사람들에게 침실의 공개성은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일로 오늘날 우리는 방음이 잘 되어 있는 아파트에서도 부부관계 중 소음 에 대해 상당히 신경 쓰고 조심하고 있지를 않은가? 그러고 보면 고대 중국인들은 성생활을 지극히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타인이 훔쳐볼까 수치스러워하거나 상스러운 것으로 비하하지 않았던 것 같다.
더구나 일부다처제의 생활 속에서 젊고 예쁜 처첩을 여럿 거느렸을 경우, 처첩이 늙어 나이 먹었다고 천대하지 말라는 것이 중국의 남편으로서의 도리라고 한다.
특히 고대의 침실에 들어가 보면 대단히 공개적인 성생활과 프리섹스를 누렸다고 해도 과언 이 아니다. 남편이 애처와 성교를 할 때 하녀나 애첩이 한 방에 같이 있으면서 시중을 드는 것 은 보편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이런 것은 중국의 춘화를 보아도 잘 나타나 있는데 남자가 애첩 과 성교를 할 때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시녀나 다른 애첩이 남자의 몸을 뒤에서 밀어 주고 애첩 과 성교가 끝나면 남자를 밀어주던 애첩과 다시 성교를 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정말 중국인들의 정력이 막강함을 자랑하는 그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의 결혼 풍습이다. 아직도 중국의 농촌지역에서는 이런 풍습이 잔존하고 있는데 중국 결혼식의 클라이맥스는 신랑 신부에게 여러 가지 즐겁고 에로틱한 방식의 난제를 풀게 하며 장난을 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놀이문화 가운데 친척, 친지들이 신랑 신부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훔쳐보거나 엿 듣는 것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부의 치맛자락 속으로 들어가기 놀이나 첫날밤 신부를 벌거벗겨 놓고 신랑의 친척들이 신랑과 한판 승부를 벌이는 놀이도 있다고 한다. 이러 한 것도 물론 침실문화가 공개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침실의 공개성을 관용으로 생각했던 중국인들의 전통 침실은 성적 자유분방함과 에로틱한 성 문화의 일부였던 것 같다.
성을 예술화한 작품들
정력에좋다고 하여 중국인들이 즐기던 전족 모양의 술잔
옛날 중국의 일부다처제는 적게는 수 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의 처첩들이 한 지붕 아래 동거하며 대가족의 형태를 이루고 살았다. 서로 혈연관계가 없는 여자들이 한 지붕 아래에서 한 남자만을 바라보고 생활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말썽이 많고 시기와 질투로 싸움이 잦을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중국에서 일부다처제가 성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하나는, 후사를 잇는 대사였고 다른 하나는, 팽창된 남자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양반들이 첩을 거느리기도 했었다. 또한 대를 잇는 일은 매우 중요한 대사로 여겼기에 씨받이 의 풍습도 있었다.
중국 사람들은 자식을 많이 낳아 기르는 것이 행복한 삶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기에 일부다처제의 호색 전통은 중국인의 성행위와 성적 관념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중의 하나 가 바로 열린 침실이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부부의 침실은 은밀하게 숨겨진 공간이지만 고대 중국인의 에로스적인 침실은 오히려 반공개적이었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침실의 내부는 밖에서도 쉽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구조였다. 우리나라처럼 굳이 손가락에 침을 묻혀 창호지 구멍을 뚫지 않아도 방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공개적이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속삭이는 소리부터 여자의 신음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는데 이렇게 부부의 생활 이 타인에게 노출되어도 별로 개의치 않았던 것이 중국인의 침실문화라고 할 것이다.
침실의 물리적 구조는 인간의 정신적 구조의 발로이다.
한국 사람들에게 침실의 공개성은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일로 오늘날 우리는 방음이 잘 되어 있는 아파트에서도 부부관계 중 소음 에 대해 상당히 신경 쓰고 조심하고 있지를 않은가? 그러고 보면 고대 중국인들은 성생활을 지극히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타인이 훔쳐볼까 수치스러워하거나 상스러운 것으로 비하하지 않았던 것 같다.
더구나 일부다처제의 생활 속에서 젊고 예쁜 처첩을 여럿 거느렸을 경우, 처첩이 늙어 나이 먹었다고 천대하지 말라는 것이 중국의 남편으로서의 도리라고 한다.
특히 고대의 침실에 들어가 보면 대단히 공개적인 성생활과 프리섹스를 누렸다고 해도 과언 이 아니다. 남편이 애처와 성교를 할 때 하녀나 애첩이 한 방에 같이 있으면서 시중을 드는 것 은 보편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이런 것은 중국의 춘화를 보아도 잘 나타나 있는데 남자가 애첩 과 성교를 할 때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시녀나 다른 애첩이 남자의 몸을 뒤에서 밀어 주고 애첩 과 성교가 끝나면 남자를 밀어주던 애첩과 다시 성교를 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정말 중국인들의 정력이 막강함을 자랑하는 그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의 결혼 풍습이다. 아직도 중국의 농촌지역에서는 이런 풍습이 잔존하고 있는데 중국 결혼식의 클라이맥스는 신랑 신부에게 여러 가지 즐겁고 에로틱한 방식의 난제를 풀게 하며 장난을 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놀이문화 가운데 친척, 친지들이 신랑 신부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훔쳐보거나 엿 듣는 것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부의 치맛자락 속으로 들어가기 놀이나 첫날밤 신부를 벌거벗겨 놓고 신랑의 친척들이 신랑과 한판 승부를 벌이는 놀이도 있다고 한다. 이러 한 것도 물론 침실문화가 공개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침실의 공개성을 관용으로 생각했던 중국인들의 전통 침실은 성적 자유분방함과 에로틱한 성 문화의 일부였던 것 같다.
성을 예술화한 작품들
정력에좋다고 하여 중국인들이 즐기던 전족 모양의 술잔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