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 명군 참전과 여진족: 누르하치의 외교활동을 중심으로
Ⅲ. 재정의 악화: 화북의 중과세와 전비 지출
Ⅳ. 민란으로의 발전
Ⅴ. 맺음말
Ⅱ. 명군 참전과 여진족: 누르하치의 외교활동을 중심으로
Ⅲ. 재정의 악화: 화북의 중과세와 전비 지출
Ⅳ. 민란으로의 발전
Ⅴ. 맺음말
본문내용
환 병사들이 급향 및 포상의 부실을 이유로 소란을 일으켰고 만력 23년에는 山東 반도의 해안 요충지인 登州를 방비하던 浙兵이 철군 방침에 반발하여 병란을 일으켰다 정병철, <<천붕지열의 시대 - 명말청초의 華北사회>>, p. 59-60.
. 특히 浙兵의 소란 행위는 그들이 누리던 상대적으로 후한 급향을 삭감당하고, 급기야 철군·해산으로 인해 직업을 상실하게 되자 이에 저항한 것이다.
명군이 철군 과정에서 보인 행태는 단순히 급향에 대한 반발에서 일어난 소란에 국한되지 않았다. 일부 군사들은 원대복귀나 해산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귀환 경로인 遼東, 山東, 天津 일대로 산개한 경우가 많았고 이들은 각 지역사회에 큰 위협요소가 되었다. 萬曆 27년 6월, 종전 후 遼東을 거쳐 입관 귀환하던 四川 출신의 병사들이 通州에서 소란을 일으키다가 대오를 이탈하여 북경에 잠입한 사건이 가장 대표적 예이다. 정병철, <명말의 華北사회와 조선의 왜란>, 102.
이들은 당시 四川에서 楊應龍의 반란이 재발하여 四川 지방으로 조속히 귀환해야 할 상황이었는데, 이들이 복귀를 거부하며 벌인 행동이 이처럼 확대된 것이다.
이상의 민변과 병란들은 17세기에 본격적으로 발생한 전국적인 반란의 모태를 보여준다. 즉, 명조의 직접적 멸망을 가져온 각지의 반란은 왜란 직후 발생한 민변, 병란을 유발했던 기제가 동일하게 작용한 것이며, 이후 지속되었던 사회 모순의 심화로 그 규모와 빈도가 더 커졌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요컨대, 壬辰倭亂으로 인한 일반민들의 고초는 각지에서 민란 발생으로 이어졌고 군 기강 해이로 대열에서 이탈한 병사들 또한 병란을 일으켰으며, 이들 민란과 병란은 明 末의 전국적 반란으로 확대되어 明朝의 멸망을 불러왔다.
Ⅴ. 맺 음 말
임진왜란은 그 규모와 전개에서 그 이전의 전쟁과는 다른 국제전의 양상을 띠었다. 그 명칭 또한 다양하여 중국에서는 抗倭援朝 또는 萬曆朝鮮戰爭, 일본에서는 文錄·慶長之役으로 불리고 있다. 이런 명칭의 다양함 자체가 임진왜란이 가진 성격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임진왜란을 동아시아 3국의 국제전으로 인식한 후, 그 속에서 明이 입은 영향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전쟁의 발발 시기가 아시아 정세 급변 시기와 일치한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본문에서는 임진왜란이 명에 미친 영향을 3가지로 나누어 분석해보았다. 제일 처음으로는, 明軍 참전 과정에서 누르하치의 여진족이 어떠한 활동을 펼쳤고 이후 영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누르하치는 倭亂이 초래한 힘의 공백기에서, 섣불리 행동하기 보다는 외교 중심의 활동을 통해 세력 확장의 기반을 다졌고 결국 이는 淸의 興起와 明淸交替로 이어졌다. 또한 전쟁 과정에서 明이 소모한 경제력에 주목하여 전진기지이자 병참기지인 華北 사회가 겪었던 인적·물적 징발과 요역의 삼중고는 북경을 둘러싸고 있는 지역의 심각한 동요를 일으켰고, 戰費로 사용된 막대한 銀의 유출은 이미 그 기초가 흔들리던 명의 재정에 결정적 타격을 입혀 明朝의 衰落에 큰 원인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재정의 악화는 增稅와 加派 등의 重課稅 정책으로 이어져 이미 民困 상태이던 백성들의 반발로 이어졌고, 파병 과정에서 헤이해진 군대는 본연의 임무를 상실하고 사회 소요 세력으로 전락했다. 백성들에 의한 민란과 대열에서 이탈한 군인들의 소요 사태는 17세기의 대규모 반란으로 이어져 明朝의 반란에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상을 살펴보면, 明의 衰落과 멸망 그리고 明淸交替에는 위의 세 요인들이 유기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壬辰倭亂 參戰으로 인한 경제력 소모는 국력 약화와 민심 동요로 나타났고 이것은 民亂과 兵亂으로 이어져 종국에는 明朝를 망하게 하였다. 또 明의 참전으로 인해 성장할 수 있었던 누르하치의 여진족은 결국 淸이라는 새롭고도 강력한 국가 세력으로 등장하여 반란으로 망한 明을 대신해 중국 본토를 차지하고 이후 동아시아 정세가 淸에 의해 주도되는 새로운 형국을 낳은 것이다. 따라서 壬辰倭亂은 16~17세기의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를 결정지었던 매우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였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 참 고 문 헌 -
단행본
오금성 외. <<명청시대 사회경제사>>. 서울: 이산, 2009.
정병철. <<천붕지열의 시대, 명말청초의 華北사회>>. 광주: 전남대학교 출판부, 2008.
최소자. <<명청시대 중·한관계사 연구>>.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7.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서울: 역사비평사, 1999.
Hawley, Samuel J.. The Imjin War: Japan's sixteenth-century invasion of Korea and attempt to conquer China. Berkley: Institute of East Asian Studies, 2005.
논문
계승범. <임진왜란과 누르하치>. <<임진왜란 - 동아시아 삼국전쟁>>. 서울: 휴머니스트, 2007.
정병철. <명말의 華北사회와 조선의 왜란>. <<명청사연구>> 10 (1999): 89-104.
________. <명말청초의 화북사회 연구 - 동란기 산동권의 사회경제적 제양상>.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6.
최소자. <명말 중국적 세계질서의 변화 - 임진·정유왜화를 중심으로>. <<명말청초기의 조 명>>. 서울: 한울, 1990.
________. <임진란시 명의 파병에 대한 논고 - 파병의 배경과 군사활동에 대한 평가>. <<동양사학연구>> 11 (1977): 63-95.
________. <임진왜란 전후 명과 조선>. <<사명당 유정>>. 서울: 지식산업사, 2000.
케네스 M. 스워프. <순망치한>. <<임진왜란 - 동아시아 삼국전쟁>>. 서울: 휴머니스트, 2007.
한명기. <임진왜란 시기 명의 내정간섭과 직할통치론>. <<동아시아 역사의 환류>>. 서울: 지식산업사, 2000.
Cammann, Schuyler. "Origins of the Court and Official Robes of the Ch'ing Dynasty." Artibus Asiae 12 (1949): 189-201.
. 특히 浙兵의 소란 행위는 그들이 누리던 상대적으로 후한 급향을 삭감당하고, 급기야 철군·해산으로 인해 직업을 상실하게 되자 이에 저항한 것이다.
명군이 철군 과정에서 보인 행태는 단순히 급향에 대한 반발에서 일어난 소란에 국한되지 않았다. 일부 군사들은 원대복귀나 해산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귀환 경로인 遼東, 山東, 天津 일대로 산개한 경우가 많았고 이들은 각 지역사회에 큰 위협요소가 되었다. 萬曆 27년 6월, 종전 후 遼東을 거쳐 입관 귀환하던 四川 출신의 병사들이 通州에서 소란을 일으키다가 대오를 이탈하여 북경에 잠입한 사건이 가장 대표적 예이다. 정병철, <명말의 華北사회와 조선의 왜란>, 102.
이들은 당시 四川에서 楊應龍의 반란이 재발하여 四川 지방으로 조속히 귀환해야 할 상황이었는데, 이들이 복귀를 거부하며 벌인 행동이 이처럼 확대된 것이다.
이상의 민변과 병란들은 17세기에 본격적으로 발생한 전국적인 반란의 모태를 보여준다. 즉, 명조의 직접적 멸망을 가져온 각지의 반란은 왜란 직후 발생한 민변, 병란을 유발했던 기제가 동일하게 작용한 것이며, 이후 지속되었던 사회 모순의 심화로 그 규모와 빈도가 더 커졌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요컨대, 壬辰倭亂으로 인한 일반민들의 고초는 각지에서 민란 발생으로 이어졌고 군 기강 해이로 대열에서 이탈한 병사들 또한 병란을 일으켰으며, 이들 민란과 병란은 明 末의 전국적 반란으로 확대되어 明朝의 멸망을 불러왔다.
Ⅴ. 맺 음 말
임진왜란은 그 규모와 전개에서 그 이전의 전쟁과는 다른 국제전의 양상을 띠었다. 그 명칭 또한 다양하여 중국에서는 抗倭援朝 또는 萬曆朝鮮戰爭, 일본에서는 文錄·慶長之役으로 불리고 있다. 이런 명칭의 다양함 자체가 임진왜란이 가진 성격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임진왜란을 동아시아 3국의 국제전으로 인식한 후, 그 속에서 明이 입은 영향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전쟁의 발발 시기가 아시아 정세 급변 시기와 일치한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본문에서는 임진왜란이 명에 미친 영향을 3가지로 나누어 분석해보았다. 제일 처음으로는, 明軍 참전 과정에서 누르하치의 여진족이 어떠한 활동을 펼쳤고 이후 영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누르하치는 倭亂이 초래한 힘의 공백기에서, 섣불리 행동하기 보다는 외교 중심의 활동을 통해 세력 확장의 기반을 다졌고 결국 이는 淸의 興起와 明淸交替로 이어졌다. 또한 전쟁 과정에서 明이 소모한 경제력에 주목하여 전진기지이자 병참기지인 華北 사회가 겪었던 인적·물적 징발과 요역의 삼중고는 북경을 둘러싸고 있는 지역의 심각한 동요를 일으켰고, 戰費로 사용된 막대한 銀의 유출은 이미 그 기초가 흔들리던 명의 재정에 결정적 타격을 입혀 明朝의 衰落에 큰 원인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재정의 악화는 增稅와 加派 등의 重課稅 정책으로 이어져 이미 民困 상태이던 백성들의 반발로 이어졌고, 파병 과정에서 헤이해진 군대는 본연의 임무를 상실하고 사회 소요 세력으로 전락했다. 백성들에 의한 민란과 대열에서 이탈한 군인들의 소요 사태는 17세기의 대규모 반란으로 이어져 明朝의 반란에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상을 살펴보면, 明의 衰落과 멸망 그리고 明淸交替에는 위의 세 요인들이 유기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壬辰倭亂 參戰으로 인한 경제력 소모는 국력 약화와 민심 동요로 나타났고 이것은 民亂과 兵亂으로 이어져 종국에는 明朝를 망하게 하였다. 또 明의 참전으로 인해 성장할 수 있었던 누르하치의 여진족은 결국 淸이라는 새롭고도 강력한 국가 세력으로 등장하여 반란으로 망한 明을 대신해 중국 본토를 차지하고 이후 동아시아 정세가 淸에 의해 주도되는 새로운 형국을 낳은 것이다. 따라서 壬辰倭亂은 16~17세기의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를 결정지었던 매우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였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 참 고 문 헌 -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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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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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자. <명말 중국적 세계질서의 변화 - 임진·정유왜화를 중심으로>. <<명말청초기의 조 명>>. 서울: 한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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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mann, Schuyler. "Origins of the Court and Official Robes of the Ch'ing Dynasty." Artibus Asiae 12 (1949): 189-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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