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선덕여왕>을 통해 본 신라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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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드라마<선덕여왕>을 통해 본 신라시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신 라

Ⅲ. 신라와 드라마 <선덕여왕>

Ⅳ. 드라마 속 인물은 실존했을까?

Ⅴ. 드라마 속 문화재 - 첨성대
(1) 첨성대의 의의와 구조
(2) 첨성대의 의미

Ⅵ신라의 신분제도 - 골품제

Ⅶ. 끝맺는 말

본문내용

관측하던 곳일까? 그런 목적으로 지어졌을까? 그렇다면, 첨성대에서는 별을 어떻게 관측했을까?
망원경이 없었던 그 시대에 별을 관측하기 위해서는 천문대가 굳이 필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천문대라는 것이 큰 의미가 있었다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첨성대는 일종의 상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선덕여왕 자신의 건강과 나라의 안위를 기원하고, 천문학을 관장하는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 말이다. 특히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은 자신의 권위를 백성에게 세울 만한 상징이 필요했을 테고, 첨성대야말로 제격이었다. 인터넷 프레시안 뉴스 칼럼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 첨성대의 진실 참고
그렇다고 해서 첨성대가 별을 관측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하늘을 보며 별을 관측할 때 광공해라는 것이 문제 되는데, 이런 광공해로부터 독립된 공간이 필요했을 것이고, 첨성대의 원통이 그런 공간으로 기능했을 것이다.
즉, 첨성대는 천문대임이 분명하지만 그 역할과 기능이 관측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상징적 기능도 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Ⅵ. 신라의 신분 제도 - 골품제
신라 시대의 신분제도로 골품제도가 있었다. 혈통의 높고 낮음에 따라 신분을 구분한 제도이며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骨制)와 귀족과 일반백성을 두품제(頭品制)로 구분하였다. 관직 진출, 혼인, 의복·가옥·수레 등의 규모와 장식 등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엄격하게 규제하였다.
골품제는 신라 국가 형성기 이래의 정치체제 및 사회발전 과정에서 형성되어,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장기간 존속하였으며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도 왕족과 일반백성을 구분하는 제도로 유지되었다.
골품제는 모두 8개의 신분층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골족은 성골(聖骨)과 진골(眞骨)로 구분되었으며, 두품층은 6두품에서 1두품까지 있었는데 숫자가 클수록 신분이 높았다. 성골은 골족 가운데서도 왕이 될 수 있는 최고의 신분이었다. 진골 역시 왕족으로서 신라 지배계층의 핵심을 이루면서 모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골과 진골은 원래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성골과 진골 모두 왕족 출신으로 원래는 진골만 존재하였다. 그러던 것이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계의 후손들이 자신들을 다른 진골들과 구분하기 위해 성골이라 부른 것으로 보인다. 동륜의 손녀이자 진평왕(26대)의 장녀인 선덕여왕(27대)이 여자로서 왕위에 오를 때, 왕위계승의 근거를 “성골의 남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진골 출신 가운데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태종무열왕(29대) 김춘추는 진지왕(25대)의 손자였다. 그리고 김춘추의 아버지이자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龍樹)는 드라마에서와는 달리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를 때 생존해 있었다. 드라마에서 용수공은 전장에 나갔다가 전사하는 것으로 나왔음.
똑같이 진흥왕의 후손인 용수와 선덕 중 선덕만이 성골이었다는 점은, 용수와 구별되는 선덕여왕 계열에서 동륜을 시발점으로 하여 다른 가계와 구분하기 위해 자신들의 가계를 신성화시킨 결과인 것으로 추정된다.
골품제도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신분에 따라 맡을 수 있는 관등의 상한선을 규정한 것이다. 신라 17개 관등 가운데 제1관등인 이벌찬(伊伐飡)에서 제5관등인 대아찬(大阿飡)까지는 진골만이 할 수 있었고, 다른 신분층은 대아찬 이상의 관등에 올라갈 수 없었다. 신분에 따른 관직 임명시 제기되는 하급신분층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상한 관등에 몇 개의 관등을 더 세분해서 두는 중위제(重位制)가 실시되었으나 골품제 자체의 근본적인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이 밖에도 골품제는 공복(公服)의 빛깔, 착용할 수 있는 옷감의 종류, 관(冠)의 재질, 요대(腰帶) 및 신발의 재질, 수레에 사용하는 장식품의 종류, 일상생활의 용기까지도 골품에 따라 차등 있게 구분하였다. 법흥왕대에 정비된 골품제는 삼국통일 전쟁을 겪으면서 크게 변화하여, 문무왕 14년에는 경위와 외위의 상등관계를 정하고 양자 간의 공식적인 교류를 인정하는 단일 관등체제를 형성함으로써 경주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골품제에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또한 통일신라시기의 사회경제적인 변화는 신라 정치의 운영원리인 골품제를 변화시키는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진골 귀족간의 왕위계승 다툼이 치열해지는 신라 하대에는 골품제가 변화된 사회현실을 수용하지 못한 채 폐쇄적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골품제의 한계에 회의를 지닌 계층의 불만이 누적되고, 계속된 자연 재해와 수취체계의 모순으로 농민들의 생활이 극도로 불안정해짐에 따라 골품제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붕괴 위기에 처하였다. 신라사회 운영의 한 축을 담당하였던 골품제는 신라의 멸망과 함께 소멸되었다.
신라시대의 골품제가 신분제의 하나인 것은 틀림없지만, 이는 후대인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신분제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일반 평민이나 노비와 같은 천인에 대한 규정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모든 사회 운영이 골품제에 의해 모두 규정된 것은 아니고, 골품제는 단지 관계 진출과 같은 부문에 한정 적용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Naver 백과사전 ‘골품제도’ 참고.
Ⅶ. 끝맺는 말
예전에 <바람의 화원>이라는 드라마를 재미있게 본 적이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김홍도와 신윤복. 두 미술가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 역시 역사 속 두 인물을 중심으로 허구의 설정을 붙여 만들어졌지만, 그 소재와 발상, 그 내용, 교과서에서 암기를 해야 했던 인물과 그림들을 흥미와 그 그림이 가진 의미를 통해 느낄 수 있게 해주었었다.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는 <선덕여왕> 역시 허구가 보태진 내용이지만, 평소 관심 없던 신라,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 볼 수 있게 해주었음은 틀림없다. 청소년 시절 교과서에서 골품이니 화백회의니, 화랑이니 했던 지루하고 추상적인 것들이 실제로 재현된 모습으로 보니 굉장히 멋지고 아름다고 흥미롭게 느껴진다.
하나의 드라마가 그저 드라마로서가 아니라, 신라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해주는 통로이며, 교과서에서 한번쯤이나 들었을 여러 인물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해주는 것에 깊은 매력을 느낀다. 중반부를 넘어서는 드라마 <선덕여왕>. 그 결말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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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9.10.13
  • 저작시기2009.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56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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