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국가의 계보와 절대주의
본 자료는 5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해당 자료는 5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5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이슬람국가의 계보와 절대주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들어가며

Ⅰ. 유목민족과 투르크
1. 유목민족
2. 투르크

Ⅱ. 이슬람왕조

Ⅲ. 오스만제국
1. 제국의 성립기
2. 제국의 발전
3. 오스만제국의 전성기
4. 오스만제국의 쇠퇴
5. 쇠퇴와 17세기 개혁 운동
6. 오스만의 말기 - 19세기 개혁 시도

Ⅳ. 유럽의 절대주의와 오스만투르크와의 차이

마치며

본문내용

는 서서히 아나톨리아에서 사회질서의 붕괴를 촉진하였다. 발칸의 루멜리아에 비해 매우 작은 규모의 티마르 보유자들의 불만은 농민의 곤궁과 결합되어 일련의 시끄러운 봉기로 폭발하였다. 1594년부터 1610년까지 그리고 다시 1622년부터 1628년에 젤라리 젤라리 : 16,7세기에 아나톨리아에서 일어난 반란들을 일컫는 말이다. 16세기 초반에 ‘젤랄’이라는 시아 파 회교도가 처음으로 투르크 정부에 대한 반란을 주도하였는데, 그의 이름으로부터 온 말이다.
폭동들이 일어났다. 여기에는 지방적 반란과 사회적 약탈행위 그리고 종교적 부흥운동이 뒤섞여 있었다. 아나톨리아에서 비적 행위와 무정부 상태가 만연되자 오스만 체제의 내부적 사기는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17세기 후반, 평화가 완전하게 회복되지 못하였던 농촌지역에서 계속해서 젤라리 폭동들이 일어났다.
메흐메트 2세 시대에 오스만 제국 기구의 최상층부를 이루고 있던 예니체리 군대와 데브쉬름 계층이 가장 먼저 해체의 전반적 징후를 보였다. 예니체리들은 슐레이만 1세때 결혼과 자녀양육의 권리를 얻게 되어 늘어난 생계비는 인플레이션으로 가중되었고, 생계비를 벌기 위해 비전쟁시에는 수공업 등에 종사하게 되었다. 셀림2세 때에는 자신의 아들을 예니체리에 등록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어, 훈련과 숙련에 의해서 선택된 직업적 군사 엘리트가 점차 세습적인 반(半)장인(수공업, 상업)의 민병대로 성격이 변화되었다. 그에 따라서 예니체리 군대의 규율은 무너지게 되었다.
한편 전에는 오스만의 다른 지배계급과는 엄격한 고립성을 유지해오던 데브쉬름 계층은 자신들의 독특한 정체성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16세기 말에는 토착 무슬림들도 예니체리 군대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었고 1630년대에 데브쉬름 징병제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예니체리 연대는 여전히 면세를 비롯한 다른 전통적 특권들을 보유하였다. 그 때문에 무슬림 사회에서는 예니체리 군대에 들어가려는 지속적인 요구가 있었다. 젤라리 폭동기 동안 사회적 불안이 팽배하자 내적 안전을 위하여 제국의 지방 도시들에 예니체리 수비대가 널리 배치되었다. 그리하여 17세기 중엽 이후 예니체리 병사들은 점차 약간의 훈련의 받았거나 혹은 전혀 훈련을 받지 않은 도시 민병대의 거대한 집단이 되었다.
티마르 체제도 그에 못지않게 근본적인 변질을 겪었다. 시파히들의 경기병 부대는 유럽 무기류의 발전과 기독교 강국들의 상비군 강화로 이제 군사적으로 쓸모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점증하는 부패 속에서 국가는 점점 더 많은 티마르를 비군사적인 목적을 위해서 고위관리들에게 떼어주거나 혹은 그것들을 국고에 다시 귀속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그 결과 17세기 초에 시파히 병력은 급속하게 감소하였다. 그 이후로 오스만의 군대는 고용된 머스켓 총병 부대인 세크반 부대에 주로 의존하게 되었다. 세크반 부대는 원래는 비정규적인 지방의 보조군이었으나 제국의 중심적인 군사편제가 되었다. 동지중해 지역 대부분에서 나타난 경제적 후퇴 상황 속에서 상비군으로서의 세크반 부대의 유지는 오스만 영토의 과세부담을 가중시켰고 또 그것을 화폐화시켰다. 아나톨리아에서 새롭게 경작할 만한 토지는 고갈되었다. 영국과 화란의 해운은 향신료와 비단 무역을 앗아갔다. 반면 전통적인 농업이 잘 유지되었던 이집트는 점차 지역 맘루크 맘루크 : 아랍어로 노예병사를 의미한다. 노예병사들은 1250년부터 1517년까지 시리아와 이집트를 지배하였다. 이것이 ‘노예왕조’ 혹은 ‘맘루크 왕조’이다.
왕조의 지배로 회귀하였다. 국가의 재정적, 정치적 어려움은 왕조가 퇴화함으로써 더욱 가중되었다. 정치적 결정은 갈수록 돈으로 좌우되었고 불안정하게 되었다.
오스만 국가의 통치조직은 갈수록 쇠퇴해갔다. 데브쉬름의 전유물로서 공과에 따라서 승진이 이루어졌던 관직들은 이제 최고입찰자들에게 대거 매각되었다. 그러나 유럽의 매관제와는 달리 매입 이후 관직보유에 대한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관직 매입자들은 자리에서 쫓겨나기 전에 재빨리 자신들의 투자에 대한 수익을 가능한 한 많이 짜내야만 했다. 그리하여 민중에게 수탈의 압력이 가중되었다. 예니체리의 봉급표를 둘러싼 부정이 만연하여 봉급표는 보편적인 행정적 부패의 와중에서 가짜 예니체리들에게 매매되었다. 예니체리들은 이제 제국의 거의 모든 도시에서 마치 썩은 환부처럼 어디에서나 존재하였다. 그들 중 가장 힘있는 자들은 그 이후 오스만 지방 사회의 뚜렷한 특징이 되는 ‘아얀’이라는 지방명사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18세기 동안에 점점 많은 수의 ‘종신토지’ 즉 말리카네가 포르트에 의해서 주어졌는데, 포르트는 이러한 농촌유지들의 단기적 요구를 완화시켰지만 촌락에 대한 그들의 장기적인 권력을 안정화 시켰다. 발칸제도에서 티마르는 나중에 치플리크 제도로 알려지게 된 제도에 그 지위를 내주게 되었고, 발칸 농민의 지위는 다른 동유럽 지역의 농민들과 마찬가지로 공동의 궁핍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마치며
그들의 이름과 왕조마저도 너무나 낯설게만 느껴져졌기 때문일까. ‘이슬람에 대해 모르고 있었어도 너무 몰랐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 보고서였다. 우리는 그동안 서구에 의한, 서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서구식 교육을 받으면서 그들의 문화에만 젖어 있었다. 엄연히 이슬람 세력들도 유럽과 중동의 한 시대를 같이 하면서 그들 나름의 역사를 이루어 가고 있었음에도 우리는 서구의 시각으로만 그들을 바라보았다. 두려움의 존재였기에 서구 유럽은 그들의 문화를 애써 비하하고 그들을 경계하기 위해 그들의 모든 것을 역사의 뒤로 내몰려고 하지는 않았을까? 여기서 마치지만 이슬람에 대한 새로운 매력을 느낀 만큼 문화나 종교, 예술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각을 통해 살펴보고 싶다.
참고문헌
김현일 외,『절대주의 국가의 계보』(서울: 까치글방, 1997).
김호동, 『이슬람 1004년』(서울: 까치글방, 2001).
박지숙,『이슬람』(서울: 김영사, 2002).
이희수,『터키史』(서울: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96).
황병하 외,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이슬람사』(서울: 시공사, 2002).
  • 가격3,000
  • 페이지수15페이지
  • 등록일2009.10.15
  • 저작시기2009.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56839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