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고려사 1권
고려사 2권
고려사 2권
본문내용
일에 대신들인 염상(廉相), 왕규(王規), 박수문(朴守文) 등이 왕을 모시고 있었다. 왕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한나라 문제(文帝)는 말하기를 천하 만물이 생겨 나서 죽지 않는 것이 없으니 죽음은 천지의 이치요 만물의 자연이다. 어찌 너무 슬퍼하겠느냐고 하였으니 옛날 명철한 왕들은 마음을 이렇게 먹었던 것이다. 내가 병에 걸린 지 벌써 20여 일이 지났다. 죽는 것을 돌아 가는 것처럼 생각하노니 무슨 근심이 있으랴? 한 문제의 말이 곧 나의 의사이다. 오래 동안 해결하지 못한 안팎 중요 사무들은 그대들이 태자 무와 함께 처리하고나서 나에게 보고하라!”병오일에 왕의 병이 위독하여졌다. 왕이 신덕전(神德殿)에 나가서 학사 김악(金岳)에게 명령하여 유조(遺詔)를 쓰게 하였는바 초고가 이루어진 뒤로는 왕이 말을 더하지 못하였다.좌우 신하들이 큰 소리로 목메어 울부짖으니 왕은 이것이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신하들이 대답하기를,“성상(聖上-임금)이 백성의 부모가 되었다가 오늘 갑자기 여러 신하들을 버리고 가려 하시니 저희들이 슬픔을 참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웃으면서 말하기를“덧없은 인생이란 옛날부터 으레 이런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이 끝난 후 조금 있다가 죽었다.왕이 왕위에 있은 지가 26년이요, 향수는 67세였다. 내외 백관들에게 유언하여 다 동궁(태자)의 처분을 받게 하였다. 초상 장사 및 왕릉의 제도들은 한문제(漢文帝)와 위문제(魏文帝)의 옛규례를 좇아 일체를 검박하게 하였다.왕은 그의 포부가 크고 원대하였으며 국사를 공정하게 처리하고 상벌을 공평히 하며 절약을 숭상하고 현명한 신하들을 등용하며 유교를 중하게 여겼다.시호를 신성(神聖)이라 하고 묘호를 태조(太祖) 라고 하였다. 송악산 서쪽 기슭에 장사지내니 능호는 현릉(顯陵)이었다.목종(穆宗) 5년에는 원명(元明)으로, 현종(顯宗) 5년에는 광렬(光烈)로, 동 18년에는 대정(大定)으로, 문종(文宗) 10년에는 장효(章孝)로, 인종(仁宗) 18년에는 인용(仁勇)으로, 고종(高宗) 40년에는 용렬(勇烈)로 각각 시호를 더 붙이었다.
○ 李齊賢贊曰 忠宣王嘗言 我太祖規模德量生於中國當不宋太祖 宋太祖事周世宗世宗賢主也 待宋太祖甚厚宋太祖亦爲 ○ 리제현찬왈 충선왕상언 아태조규모덕량생어중국당부감송태조 송태조사주세종세종현주야 대송태조심후송태조역위之盡力 及恭帝幼政出太后迫于群情而受周禪盖出於不得已也 我太祖事弓裔猜暴之君三韓之地裔有其二太祖之功也 以不 지진력 급공제유충정출태후박우군정이수주선개출어부득이야 아태조사궁예시폭지군삼한지지예유기이태조지공야 이부世之功處必疑之地可謂危矣 而國人歸心將士推戴然猶固讓欲徇延陵之節 弔伐之事亦豈得已哉 其好生惡殺而信賞必罰推誠 세지공처필의지지가위위의 이국인귀심장사추대연유고양욕순연릉지절 조벌지사역기득이재 기호생악살이신상필벌추성功臣而不假以權 創業垂統固宜一揆矣至若宋祖 以江南李氏比之睡臥榻則石晉所賂契丹山後之十六州盖視爲中物旣收 공신이부가이권 창업수통고의일규의지약송조 이강남리씨비지한수와탑칙석진소뢰계단산후지십륙주개시위탁중물기수北漢將長驅以定秦漢之彊耳 我太祖卽位之後金傅未賓甄萱未虜而屢幸西都親巡北鄙其意亦以東明舊壤爲吾家靑氈必席卷而 북한장장구이정진한지강이 아태조즉위지후김부미빈견훤미로이루행서도친순북비기의역이동명구양위오가청전필석권이有之 豈止操搏鴨而已哉 由是觀之雖大小之勢不同二祖規模德量所謂易地皆然者也 忠宣聰明好古中原博雅之士如王構閻 유지 기지조계박압이이재 유시관지수대소지세부동이조규모덕량소위역지개연자야 충선총명호고중원박아지사여왕구염復姚遂蕭奭趙孟虞集皆遊其門盖嘗與之尙論也.
부요수소석조맹부우집개유기문개상여지상론야.이제현(李齊賢)의 평 : 충선왕(忠宣王)은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었다.“우리 태조(왕건)의 포부와 도량으로 만일 중국에 태어 났다면 송태조(宋太祖)보다 못하지 않았을 것이다. 송 태조는 주 세종(周世宗)을 섬겼는바 세종은 착한 임금이었다. 그가 송 태조를 대단히 우대하였고 송태조도 역시 그를 위해 진력하였다. 그러나 공제(恭帝)가 어리고 태후가 정권을 잡게 되자 여러 사람들의 희망에 못이겨 주나라 정권의 위양을 받게 되었는바 그것은 대개 부득이한 사정이었다. 우리 태조는 궁예와 같은 시기가 많고 포악한 임금을 섬겼는바 당시 삼한 지역의 3 분의 2를 궁예가 가지게 된 것은 태조의 공이었다.당시 태조는 비상한 공을 세우고도 반드시 의심 받을 만한 지위에 처하여 있었으니 정말 위태로운 처지었다. 그 때에 나라 사람들이 태조에게 뜻을 두고 있었고 장병들이 그를 추대하였으나 그러나 태조는 오히려 굳이 사양하여 연릉(延陵)의 절개를 지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한 편으로 백성들의이익 을 위하여 죄 있는 임금을 숙청하는 일을 그만 둘 수는 없었다. 살리는 것을 좋아하고 죽이는 것을 싫어하며 공 있는 자를 반드시 상주고 죄 있는 자를 반드시 처벌하며 공신들에게 성의를 다하여 권도를 쓰지 않았다. 왕업을 성취하여 후세에 전한 점에 있어서 우리 태조와 송태조의 한 일은 마찬가지이다. 송태조는 강남(江南-당 나라) 이씨(李氏)를 침대에서 코골고 자는 것에 비교하였으니 석진(石晉)이 거란에 넘겨 준 산후(山後)의 16주쯤은 대체로 자루 안에 든 물건을 집어 내는 것처럼 쉽게 생각하였고 북한(北漢)을 점령한 후에는 장차 승승장구하여 진(秦) 한(漢)의 옛중국 강토를 평정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우리 태조는 왕위에 오른 뒤에 아직 김부(金傅)가 항복하여 오지 않았고 견훤(甄萱)이 사로잡히기 전이었지마는 가끔 서도(西都)에 거동하여 친히 북방 변경을 순찰하였으니 그의 뜻은 역시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옛강토를 우리 나라의 귀중한 유산으로 확신하고 반드시 이를 석권(席捲)하여 가지려고 한것이었다. 그 규모가 어찌 닭을 잡고 오리를 치는 거기에만 그쳤겠는가.이러한 일들로 미루어 본다면 비록 그들의 처한 형편에 대소의 차이는 있지마는 두 태조의 포부와 도량은 이른바 처지를 바꾸어 놓고 보면 다 같다는 것이다.”충선왕은 총명하고 옛력사를 좋아하였는바 중국의 박아(博雅)한 선비들로서 왕구(王構), 염복(閻復), 요수(姚遂), 소석(蕭奭), 조맹부, 우집(虞集) 등과 같은 사람들이 다 그와 교제하였으니 충선왕의 이 말은 대개 그들과 함께 고사에 대하여 논의한 것이었다.
○ 李齊賢贊曰 忠宣王嘗言 我太祖規模德量生於中國當不宋太祖 宋太祖事周世宗世宗賢主也 待宋太祖甚厚宋太祖亦爲 ○ 리제현찬왈 충선왕상언 아태조규모덕량생어중국당부감송태조 송태조사주세종세종현주야 대송태조심후송태조역위之盡力 及恭帝幼政出太后迫于群情而受周禪盖出於不得已也 我太祖事弓裔猜暴之君三韓之地裔有其二太祖之功也 以不 지진력 급공제유충정출태후박우군정이수주선개출어부득이야 아태조사궁예시폭지군삼한지지예유기이태조지공야 이부世之功處必疑之地可謂危矣 而國人歸心將士推戴然猶固讓欲徇延陵之節 弔伐之事亦豈得已哉 其好生惡殺而信賞必罰推誠 세지공처필의지지가위위의 이국인귀심장사추대연유고양욕순연릉지절 조벌지사역기득이재 기호생악살이신상필벌추성功臣而不假以權 創業垂統固宜一揆矣至若宋祖 以江南李氏比之睡臥榻則石晉所賂契丹山後之十六州盖視爲中物旣收 공신이부가이권 창업수통고의일규의지약송조 이강남리씨비지한수와탑칙석진소뢰계단산후지십륙주개시위탁중물기수北漢將長驅以定秦漢之彊耳 我太祖卽位之後金傅未賓甄萱未虜而屢幸西都親巡北鄙其意亦以東明舊壤爲吾家靑氈必席卷而 북한장장구이정진한지강이 아태조즉위지후김부미빈견훤미로이루행서도친순북비기의역이동명구양위오가청전필석권이有之 豈止操搏鴨而已哉 由是觀之雖大小之勢不同二祖規模德量所謂易地皆然者也 忠宣聰明好古中原博雅之士如王構閻 유지 기지조계박압이이재 유시관지수대소지세부동이조규모덕량소위역지개연자야 충선총명호고중원박아지사여왕구염復姚遂蕭奭趙孟虞集皆遊其門盖嘗與之尙論也.
부요수소석조맹부우집개유기문개상여지상론야.이제현(李齊賢)의 평 : 충선왕(忠宣王)은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었다.“우리 태조(왕건)의 포부와 도량으로 만일 중국에 태어 났다면 송태조(宋太祖)보다 못하지 않았을 것이다. 송 태조는 주 세종(周世宗)을 섬겼는바 세종은 착한 임금이었다. 그가 송 태조를 대단히 우대하였고 송태조도 역시 그를 위해 진력하였다. 그러나 공제(恭帝)가 어리고 태후가 정권을 잡게 되자 여러 사람들의 희망에 못이겨 주나라 정권의 위양을 받게 되었는바 그것은 대개 부득이한 사정이었다. 우리 태조는 궁예와 같은 시기가 많고 포악한 임금을 섬겼는바 당시 삼한 지역의 3 분의 2를 궁예가 가지게 된 것은 태조의 공이었다.당시 태조는 비상한 공을 세우고도 반드시 의심 받을 만한 지위에 처하여 있었으니 정말 위태로운 처지었다. 그 때에 나라 사람들이 태조에게 뜻을 두고 있었고 장병들이 그를 추대하였으나 그러나 태조는 오히려 굳이 사양하여 연릉(延陵)의 절개를 지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한 편으로 백성들의이익 을 위하여 죄 있는 임금을 숙청하는 일을 그만 둘 수는 없었다. 살리는 것을 좋아하고 죽이는 것을 싫어하며 공 있는 자를 반드시 상주고 죄 있는 자를 반드시 처벌하며 공신들에게 성의를 다하여 권도를 쓰지 않았다. 왕업을 성취하여 후세에 전한 점에 있어서 우리 태조와 송태조의 한 일은 마찬가지이다. 송태조는 강남(江南-당 나라) 이씨(李氏)를 침대에서 코골고 자는 것에 비교하였으니 석진(石晉)이 거란에 넘겨 준 산후(山後)의 16주쯤은 대체로 자루 안에 든 물건을 집어 내는 것처럼 쉽게 생각하였고 북한(北漢)을 점령한 후에는 장차 승승장구하여 진(秦) 한(漢)의 옛중국 강토를 평정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우리 태조는 왕위에 오른 뒤에 아직 김부(金傅)가 항복하여 오지 않았고 견훤(甄萱)이 사로잡히기 전이었지마는 가끔 서도(西都)에 거동하여 친히 북방 변경을 순찰하였으니 그의 뜻은 역시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옛강토를 우리 나라의 귀중한 유산으로 확신하고 반드시 이를 석권(席捲)하여 가지려고 한것이었다. 그 규모가 어찌 닭을 잡고 오리를 치는 거기에만 그쳤겠는가.이러한 일들로 미루어 본다면 비록 그들의 처한 형편에 대소의 차이는 있지마는 두 태조의 포부와 도량은 이른바 처지를 바꾸어 놓고 보면 다 같다는 것이다.”충선왕은 총명하고 옛력사를 좋아하였는바 중국의 박아(博雅)한 선비들로서 왕구(王構), 염복(閻復), 요수(姚遂), 소석(蕭奭), 조맹부, 우집(虞集) 등과 같은 사람들이 다 그와 교제하였으니 충선왕의 이 말은 대개 그들과 함께 고사에 대하여 논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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