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협회에 대해 조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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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독립협회에 대해 조사하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독립협회 소개

2. 독립협회의 결성배경

3. 독립협회의 활동

4. 독립협회의 인물

5. 독립협회의 역사적 의의

본문내용

에 대의제를 추가하여, 우리나라 개화운동을 일보 전진시킨 것이며 개화기 개혁목표의 단계적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4. 독립협회의 인물
(서재필 & 이상재)
①. 서재필
본관 대구
호 송재
영어명 제이슨(Philip. Jaisohn)
활동분야 독립운동
출생지 전남 보성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77)
1884년 12월 김옥균·홍영식(洪英植)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켜 18세의 젊은 나이로 병조참판 겸 정령관(正領官)이 되었으나 정변의 실패로 일본을 거쳐 1885년 미국으로 망명, 1889년 조지워싱턴대학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세균학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본국의 명성왕후 일파가 몰락하자 1896년 귀국 후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정부예산을 얻어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한편, 이상재· 이승만 등과 독립협회를 결성하고 모화관을 인수·개축하여 독립회관으로 하였다. 1897년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으나 수구파 정부와 일부 외국인의 책동으로 다시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펜실베이니아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다가 3·1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잡지 《The Evening Ledger》와 제휴, 한국문제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한국에 친화적인 성향의 미국인을 규합하는 한국친우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후 상해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활약, 1922년 워싱턴군축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연판장을 제출하고, 1925년 호놀룰루의 범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 일본의 침략을 폭로·규탄하였다. 1947년 미군정 장관 J.R.하지의 초청으로 귀국, 미군정청고문으로 있는 동안 국민의 추앙을 받았으나 이승만과의 불화 및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미국에 있던 그의 유해는 전명운의사의 유해와 함께 1994년 4월 8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②. 이상재
본관 한산
호 월남
본명 계호
활동분야 사회운동
출생지 충남 서천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1881년 신사유람단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 갈 때 수행원이 되어 도일(渡日), 동행하였던 홍영식·김옥균 등과 깊이 사귀었다. 1884년 우정국 총판 홍영식의 권유로 우정국 주사가 되어 인천에서 근무하다가, 갑신정변 후 낙향하였다.
1895년 학부참사관 중추원 1등의관을 거쳐 의정부 총무국장이 되었다. 서재필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 부회장이 되어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1898년 독립협회사건으로 구금되었다가 10일 후 석방되어 의정부 총무국장을 사임하였다. 1902년 개혁당사건으로 3년간 복역하는 동안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특사로 출옥, 1905년 의정부참찬에 임명되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파견 준비차 내밀히 한규설·이상설의 집을 왕래하던 중 체포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2개월 후 석방되었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듬해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종교부 총무 및 교육부장을 겸임하던 중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교섭을 받았으나 참가를 거부하였다.
또한 1927년 양단 된 국내독립운동의 2대 계파(사회주의 계와 민족주의 계)를 단일하게 묶는 신간회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고 한달후 병사하였다. 장례는 한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집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5. 독립협회의 해산배경과 의의.
- 황국협회
독립협회에 대항하려고 정부가 조직한 단체를 말한다. 1896년(건양 1)에 서재필을 중심으로 조직된 독립협회가 개화를 외쳐 국민의 신망을 얻자 이를 탄압하기 위해 수구파인 당시 참정대신 조병식이 1898년 보부상 중심의 황국중앙총상회를 조직한 후 회장이 되었다가 얼마 후에 황국협회라 개칭하고, 이유인·홍종우·이기동·고영근 등을 내세워 독립협회에 도전하였다. 구성원의 대부분은 보부상이었으나 평민뿐만 아니라 조관·사민으로서 입회하는 자도 많았다.
황국협회는 독립협회측에서 작성한 것처럼 꾸민 고시문을 내걸고, ‘독립협회가 왕정을 폐하고 공화정체를 세울 목적으로 민심을 선동하는 벽보를 붙였다’고 왕에게 무고하였다. 이에 이상재 등 17명이 검거되고 독립협회는 해산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독립협회 회원들은 집회금지명령에도 불구하고 만민공동회를 열어, 고시문 사건이 모함이라는 상소를 하고 계속 항쟁하자 고종은 독립협회 간부들을 석방하고 독립협회를 재차 합법단체로 인정하는 한편, 황국협회의 조병식 일파를 구금했다. 이에 황국협회 회원들은 과천군수 길영수와 홍종우 등의 사주 아래 만민공동회를 습격하여 다수의 부상자를 냈다.
이후 독립협회는 종로에, 황국협회는 마포에 본진을 두고 지구전을 폈으나, 1899년 고종이 만민공동회의 지도자들을 체포하여 최정식을 사형에 처하고, 이승만을 종신형에 처하는 등 강경조치를 취함에 따라 독립협회는 해산되고, 뒤이어 황국협회도 유명무실하게 되어 자연히 해산되었다.
즉, 황국협회는 개화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수구세력의 어용단체로서 보부상들이 중심이 되어 주로 테러행위를 자행하였다.
-독립협회의 역사적 의의
독립 협회의 활동 과정에서 나타난 사상은 자주 국권 사상, 자유 민권 사상, 자강 개혁 사상으로 집약된다
첫째, 자주 국권 사상은 자주 독립 국가를 건설하려는 근대적 민족주의 사상이었다. 독립 협회는,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자주 독립하는 길은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국권을 지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 민중을 배경으로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열강의 내정 간섭과 이권 요구를 물리치는 등 자주 국권 운동을 전개하였다.
둘째, 자유 민권 사상은 국민의 자유와 평등 및 국민 주권의 확립을 통하여 근대 국민 국가를 건설하려는 민주주의 사상이었다. 독립 협회는 민중에게 민권의 민주주의 이념을 사회 일반에 전파하였다.
셋째, 자강 개혁 사상은 자주적인 근대 개혁을 통하여 국력을 배양하려는 근대화 사상이었다. 독립 협회는 과거의 개화 세력과는 달리 민중을 개화 운동과 결합시켜 근대적 민중 운동을 일으켰고, 민중에 의한 자주적인 근대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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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11.20
  • 저작시기20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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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6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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