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머리말
2.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
1) 독립신문 창간의 배경
(1)정치적 배경
(2) 경제적 배경
(3) 사회․사상적 배경
2) 독립협회의 창립
3. 독립협회의 정치활동과 만민공동회
1) 독립협회의 사상
(1) 자주독립사상
(2) 자유민권 사상
(3) 자강 개혁 사상
2) 만민공동회의 활동
4. 맺음말
2.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
1) 독립신문 창간의 배경
(1)정치적 배경
(2) 경제적 배경
(3) 사회․사상적 배경
2) 독립협회의 창립
3. 독립협회의 정치활동과 만민공동회
1) 독립협회의 사상
(1) 자주독립사상
(2) 자유민권 사상
(3) 자강 개혁 사상
2) 만민공동회의 활동
4. 맺음말
본문내용
00명을 불러 권재형을 통하여 칙어를 전포하였다. 이날의 황제 친유는 고종의 입장에서는 크게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볼 수 있다. 황제와 수구파정부는 만민공동회의 약속을 이행하는 뜻으로 중추원 관제를 실시하기 위해 11월 29일 중추원 의관 50명을 선정 지명하였다. 결국 황제와 수구파의 지지세력이 총 정원의 3분의 2에 달하는 33석이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황제와 정부의 이러한 중추원 의관 임명에 만족하지 않았으나, 황제와 수구파를 포섭하기 위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황제 친유 직후의 시위운동 해산기간을 활용하여 독립협회·만민공동회와 시민들의 공고한 연대를 다지기 위해서, 황국협회에 투쟁하다 숨진 金德九의 장례를 12월 1일 萬民葬으로 성대하게 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즉 김덕구 만민장은 의식으로서만이 아니라,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운동의 일환이었다. 김덕구 만민장은 쌍용정으로부터 연지까지의 운구에서부터 벌써 시위의 성격을 띠어갔다. 찬양회 부인회원들의 노제, 이화학당 여학생들의 찬미가, 子童義士會라는 어린이 단체 등은 수많은 만민공동회 회원들과 시민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만민공동회의 김덕구 만민장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실제로 김덕구 만민장 거행 후 황국협회 일반회원이 동요하고, 황국협회 회원들 사이에 분규가 일어났으며 보부상들도 동조하여 만민공동회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황제와 수구파는 친유 약속을 어기고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상승기세를 누르고 수구파를 관직에 진출시켰다. 만민공동회는 이것이 황제와 수구파의 본격적인 반격의 시작이라고 판단하고 종로에 모여 만민공동회를 재개하고 직접 국정개혁운동을 계속 진행하였다.
국정개혁의 상소는 ①헌의 6조의 실시 ②5흉의 재판과 처벌 ③보부상 혁파의 즉각 실행을 요구하였고 계속 2차·3차 상소를 올리면서 황제가 친히 약속한 국정개혁의 조속한 실행을 촉구하였다. 만민공동회의 활동에 기독교들이 참석하고 대회장소도 종로에서 광화문의 六曹앞 문전으로 옮기어 정부에 더욱 직접적인 압력을 넣기 시작하였다. 만민공동회는 12월 16일 광화문 앞에서 적발한 보부상 간부 4명을 경무관에게 인도하여 그들의 음모를 조사해 줄 것을 요구하여 자백한 사실을 바탕으로 황제께 상소를 올리었다. 이 때 황제는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기 위한 방책의 하나로 중추원을 열어 여기서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의 요구조건을 다루게 하고, 만민공동회는 해산케 할 것을 구상하였다. 황제가 12월 14일 중추원 개원준비를 명했고 여기서 중추원 재기가담자 11명을 선출했는데 개혁파 8인과 애국적 수구파3인 선출되었다. 중추원의 11명의 재기가담자 공천 결의안은 곧 정부에 제출되었다. 그러나 그 11명중 황제가 기피하는 인물이며 대역죄인의 죄명을 지고 있는 박영효가 들어있는 것이 트집을 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황제 고종은 그간의 만민공동회의 자주 민권 자강운동과 중추원의 재기가담자 11인의 천거에 의한 개혁정부 수립 요구에 부딪혀 대책수립에 부심하면서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신정부 수립과 개혁정책의 실시를 고려하였다. 하지만 민영기 등이 군대로써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킬 것을 권고 주장하자 어떤 방책을 선택할 것인가를 결정하지 못하였다.
4.맺음말
1800년대 후반 근대화의 바람은 오랜 세월동안 굳게 걸어 놓은 조선의 빗장도 풀기 시작했다. 갑신정변, 갑오개혁 등. 그러나 이런 개화운동은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위로부터의' 부르주아적 개혁운동이라는 점이다. 민중에 뿌리박지 못한 개화파의 위로부터의 개혁은 대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결국 실패하게 되었다.
개혁이 지속적으로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민중의 지지가 필요했다. 그래서 '위로부터의' 개혁은 '독립신문' 및 독립협회에 의한 계몽운동을 통하여 개화사상이 대중 속으로 점차 침투하였고, 이를 토대로 하여 만민공동회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대중적 정치운동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독립협회와 이전의 개화파들을 비교해 보면 그 운동방법에 있어 차이는 있지만,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여 독립의 내실을 거두고자 했다는 점에서 공통된 목표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독립협회의 활동이 기존의 개화운동에 연속되면서, 그 약점을 극복하고 보다 발전적인 형태를 띄게 됨으로써 가지게 된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항을 들 수 있다. 첫째, 종래의 개화파가 입헌군주제를 지향한데 비해 독립협회의 경우 '애군애민'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우면서도 부르주아적 공화주의로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둘째, 독립협회는 개화운동을 광범위한 대중운동으로 전환시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민주주의적인 원리에 따라서 국정개혁을 이루고자 하였다.
특히, 독립신문은 종래 신지식과 신학문에 격리되어 있던 서민층을 각성시키고, 자유민권사상의 신장을 도모하고 봉건적 압정과 침체 속에 억눌려 있던 대중의 에너지를 발안시킴으로써, 국정개혁과 자주독립의 원동력을 개발하고, 개화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독립협회는 아관파천 이후 발생하였던 친러적인 수구파 인물들의 득세와 그에 따른 한국의 경제적·정치적 주권이 실추되자 상소와 집회라는 만민공동회를 통해 이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 비판은 당시 수구적 정부에 큰 타격을 가하여 당시 한국의 군사 및 재정고문이었던 러시아인을 귀국시켰고 한러은행의 문을 닫게 하였으며, 절영도 조차문제의 취소를 가져와 러시아의 극동정책 중심을 한국에서 만주로 옮기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끝으로, 민권신장과 의회설립 운동을 통해 민주주의적인 내용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이처럼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이라고 하는 유력한 언론의 무기와 만민공동회라는 대중운동으로 지원 받으면서 한국의 개화운동에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 그 성과를 요약하자면, 첫째, 한국민중의 민족적 자주의식을 앙양시킨 것이다. 둘째, 한국민중에게 자유민권사상을 보급시켜 권리의식을 높였고 이로 인하여 봉건적 신분제도를 지탱해 온 명분관념을 급격히 붕괴시켰다. 셋째, 국권옹호와 민권신장을 목표로 한 독립협회의 정치활동이 만민공동회라는 새로운 형태의 대중운동과 결합하고 그것으로 지탱되어 부분적이나마 일정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황제 친유 직후의 시위운동 해산기간을 활용하여 독립협회·만민공동회와 시민들의 공고한 연대를 다지기 위해서, 황국협회에 투쟁하다 숨진 金德九의 장례를 12월 1일 萬民葬으로 성대하게 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즉 김덕구 만민장은 의식으로서만이 아니라,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운동의 일환이었다. 김덕구 만민장은 쌍용정으로부터 연지까지의 운구에서부터 벌써 시위의 성격을 띠어갔다. 찬양회 부인회원들의 노제, 이화학당 여학생들의 찬미가, 子童義士會라는 어린이 단체 등은 수많은 만민공동회 회원들과 시민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만민공동회의 김덕구 만민장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실제로 김덕구 만민장 거행 후 황국협회 일반회원이 동요하고, 황국협회 회원들 사이에 분규가 일어났으며 보부상들도 동조하여 만민공동회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황제와 수구파는 친유 약속을 어기고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상승기세를 누르고 수구파를 관직에 진출시켰다. 만민공동회는 이것이 황제와 수구파의 본격적인 반격의 시작이라고 판단하고 종로에 모여 만민공동회를 재개하고 직접 국정개혁운동을 계속 진행하였다.
국정개혁의 상소는 ①헌의 6조의 실시 ②5흉의 재판과 처벌 ③보부상 혁파의 즉각 실행을 요구하였고 계속 2차·3차 상소를 올리면서 황제가 친히 약속한 국정개혁의 조속한 실행을 촉구하였다. 만민공동회의 활동에 기독교들이 참석하고 대회장소도 종로에서 광화문의 六曹앞 문전으로 옮기어 정부에 더욱 직접적인 압력을 넣기 시작하였다. 만민공동회는 12월 16일 광화문 앞에서 적발한 보부상 간부 4명을 경무관에게 인도하여 그들의 음모를 조사해 줄 것을 요구하여 자백한 사실을 바탕으로 황제께 상소를 올리었다. 이 때 황제는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기 위한 방책의 하나로 중추원을 열어 여기서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의 요구조건을 다루게 하고, 만민공동회는 해산케 할 것을 구상하였다. 황제가 12월 14일 중추원 개원준비를 명했고 여기서 중추원 재기가담자 11명을 선출했는데 개혁파 8인과 애국적 수구파3인 선출되었다. 중추원의 11명의 재기가담자 공천 결의안은 곧 정부에 제출되었다. 그러나 그 11명중 황제가 기피하는 인물이며 대역죄인의 죄명을 지고 있는 박영효가 들어있는 것이 트집을 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황제 고종은 그간의 만민공동회의 자주 민권 자강운동과 중추원의 재기가담자 11인의 천거에 의한 개혁정부 수립 요구에 부딪혀 대책수립에 부심하면서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신정부 수립과 개혁정책의 실시를 고려하였다. 하지만 민영기 등이 군대로써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킬 것을 권고 주장하자 어떤 방책을 선택할 것인가를 결정하지 못하였다.
4.맺음말
1800년대 후반 근대화의 바람은 오랜 세월동안 굳게 걸어 놓은 조선의 빗장도 풀기 시작했다. 갑신정변, 갑오개혁 등. 그러나 이런 개화운동은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위로부터의' 부르주아적 개혁운동이라는 점이다. 민중에 뿌리박지 못한 개화파의 위로부터의 개혁은 대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결국 실패하게 되었다.
개혁이 지속적으로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민중의 지지가 필요했다. 그래서 '위로부터의' 개혁은 '독립신문' 및 독립협회에 의한 계몽운동을 통하여 개화사상이 대중 속으로 점차 침투하였고, 이를 토대로 하여 만민공동회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대중적 정치운동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독립협회와 이전의 개화파들을 비교해 보면 그 운동방법에 있어 차이는 있지만,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여 독립의 내실을 거두고자 했다는 점에서 공통된 목표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독립협회의 활동이 기존의 개화운동에 연속되면서, 그 약점을 극복하고 보다 발전적인 형태를 띄게 됨으로써 가지게 된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항을 들 수 있다. 첫째, 종래의 개화파가 입헌군주제를 지향한데 비해 독립협회의 경우 '애군애민'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우면서도 부르주아적 공화주의로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둘째, 독립협회는 개화운동을 광범위한 대중운동으로 전환시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민주주의적인 원리에 따라서 국정개혁을 이루고자 하였다.
특히, 독립신문은 종래 신지식과 신학문에 격리되어 있던 서민층을 각성시키고, 자유민권사상의 신장을 도모하고 봉건적 압정과 침체 속에 억눌려 있던 대중의 에너지를 발안시킴으로써, 국정개혁과 자주독립의 원동력을 개발하고, 개화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독립협회는 아관파천 이후 발생하였던 친러적인 수구파 인물들의 득세와 그에 따른 한국의 경제적·정치적 주권이 실추되자 상소와 집회라는 만민공동회를 통해 이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 비판은 당시 수구적 정부에 큰 타격을 가하여 당시 한국의 군사 및 재정고문이었던 러시아인을 귀국시켰고 한러은행의 문을 닫게 하였으며, 절영도 조차문제의 취소를 가져와 러시아의 극동정책 중심을 한국에서 만주로 옮기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끝으로, 민권신장과 의회설립 운동을 통해 민주주의적인 내용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이처럼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이라고 하는 유력한 언론의 무기와 만민공동회라는 대중운동으로 지원 받으면서 한국의 개화운동에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 그 성과를 요약하자면, 첫째, 한국민중의 민족적 자주의식을 앙양시킨 것이다. 둘째, 한국민중에게 자유민권사상을 보급시켜 권리의식을 높였고 이로 인하여 봉건적 신분제도를 지탱해 온 명분관념을 급격히 붕괴시켰다. 셋째, 국권옹호와 민권신장을 목표로 한 독립협회의 정치활동이 만민공동회라는 새로운 형태의 대중운동과 결합하고 그것으로 지탱되어 부분적이나마 일정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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