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제1장 설교와 성경
제2장 설교와 교회
제3장 설교와 문화
제4장 설교와 방법론
제2장 설교와 교회
제3장 설교와 문화
제4장 설교와 방법론
본문내용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설교하고 있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어떻게 우리 자신을 안일하게 방치할 수 있단 말인가? 분명히 설교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초청하는 것이다. 우리의 설교는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으로써 적합한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 서서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서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빠르고 쉽게 설교를 준비하는 방법을 선호할 수 있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 설교가 인정할 만하고 가치 있는 설교인가 하는 문제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청중들에게 유용한 설교인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많은 요구들로 뒤덮여 있는 사역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가 되기 위해,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어떻게 우리 자신을 준비해야 할까? 우리에게 적합하면서도 신뢰할 만한 설교 방법론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많은 설교자들은 성경의 단 한 구절을 본문으로 택하여 설교하는 훈련을 받았다. “형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이고,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이라.”와 같이 우리가 단 한 줄의 본문을 택했다면, 우리는 단일 주제를 성경본문의 덩어리로부터 추출해 낸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린 것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본문의 전체 스토리를 상실한다.
이성적인 설교학은 성경의 구절들을 마치 그것들이 정지되어 있는 정물화처럼 취급한다. 성경본문을 연구한다면 그림 안에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서 보충 설명하고, 설교에서 언급하게 될 어떤 것을 취하게 된다. 그렇게 설교를 준비하면서 우리는 박식한 역사비평학을 따르는 주석서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구절들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정적인 정물화가 아니다. 그것들은 이야기처럼 움직임을 가지며, 에피소드와 에피소드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생생한 대화들을 주고받으면서 진행해 간다. 한 개념에서 다른 개념으로 계속해서 움직인다. 그것은 한 편의 시와 같이 이미지들의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방법을 따라서 설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의미는 사상이나 사건의 움직임 속에서 생성되며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결코 정적인 진리가 아니며, 하나의 이해로부터 다른 것으로의 움직임을 포함한다.
종종 전통적인 설교는 본문에서 대지들을 추출해 내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사랑’에 대해 설교하려고 한다면, 주제에 관한 사항들을 분류하여 나타내게 괸다. 즉, 다음과 같은 식으로 설교의 주제를 분류할 수 있다. ① 가족들 간의 사랑 ② 교회 안에서의 사랑 ③ 세상 가운데서의 사랑. 이러한 대지로 분류한 것에 결론을 맺기 위해 예화를 한편 곁들이게 되면 설교준비가 완성된다.
이렇게 분류하는 식의 대지 만들기 설교에서는 무엇이 문제인가? 그러한 설교형태는 본질적으로 지루함을 야기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첫째, 둘째, 셋째 하면서 설교자는 쉽게 분류된 대지를 펼쳐 보이지만 회중석에 있는 청중들에게는 참으로 듣기 어려운 설교가 된다는 점이 문제이다.
이러한 대지설교에 있어서 서론은 마지막 문장과 같은 암시가 포함된다. 즉 “그래서 사랑은 우리가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세상 가운데서 마땅히 실천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와 같은 결론적인 이야기를 암시하고서 시작된다. 그러한 암시문장이 전통적인 설교에서는 아주 쓸 만한 형태로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회중들은 설교의 핵심을 미리 밝혀주는 문장을 대하면서 세 개의 대지로 언급될 사항들을 미리 알아차리게 된다. 무엇이 언급될 것인지 미리 알고서 시작되는 설교에서는 특별히 놀라운 사실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첫 번째 대지, “가족간의 사랑”에 대한 말씀이 9분 걸린다면 우리는 설교자가 다음 단계로 전환하기 위한 연결구를 통하여 다음 두 번째 대지 “교회 안에서의 사랑”으로 전환하기까지 언제 두 번째가 나올 것인가 하는 기다림 속에서 계속되는 신경과민을 경험하게 된다. 설교자는 청중들이 지루해할 것을 염려하면서 두 번째 대지는 7분으로 줄이고 더 많은 예화를 첨가한다. 그리고 설교자가 마지막 대지, “세상 속에서의 사랑”으로 전환할 때, 청중들로부터 거의 신음소리가 터져 나올 지경에 이른다.
이러한 대지설교가 수월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설교자들에게만 그렇게 느껴진다는 데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설교방법론은 정적이다. 또한 움직임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흥분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설교들이 청중들에게 효과적으로 들릴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게 한 번 물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의미 있고 소중한 순간을 말할 때 어떤 범주 혹은 단계를 나누어서 묘사하는가? 그렇지 않다.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로 말하거나 묘사하려고 하는 것을 규명하기 위해 서로 관계된 사항을 들어가면서 어떤 의미를 제시하려고 하지 않는가?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서는 목록을 만든다. 식료품 목록이나 혹은 여러 세탁물들, 즉 많은 여자 속옷과 셔츠, 많은 양말들을 분류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를 위해서 대화목록을 작성하는가? 즉 “제 말을 좀 들어주십시오. 저는 다음 세 가지 이유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와 같이 말이다. 아마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가운데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옮겨가면서 서로에게서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하고 제공받기도 하면서 깊은 사랑의 대화를 나눌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목록을 분류하여, '첫째, 둘째, 셋째….' 하면서 대화하지는 않는다. 학교 교실에서도 학습을 위한 교훈적인 방법을 지혜롭게 재정의 하고 있다.
오직 설교 강단만이 ‘아직도 대지를 만드는 것’에 매달려 있다. 복음을 설교함에 있어서 우리는 고정되어 버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우리 앞에 걸려 있는 포스터와 같은 말씀이나 대지를 나누어 논의하는 식으로 전해지는 말씀이 아니다. 설교자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를 향해서 우리의 청중들과 함께 여행한다. 그러한 여행은 아주 다른 설교방법론을 요구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설교하고 있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어떻게 우리 자신을 안일하게 방치할 수 있단 말인가? 분명히 설교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초청하는 것이다. 우리의 설교는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으로써 적합한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 서서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서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빠르고 쉽게 설교를 준비하는 방법을 선호할 수 있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 설교가 인정할 만하고 가치 있는 설교인가 하는 문제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청중들에게 유용한 설교인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많은 요구들로 뒤덮여 있는 사역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가 되기 위해,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어떻게 우리 자신을 준비해야 할까? 우리에게 적합하면서도 신뢰할 만한 설교 방법론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많은 설교자들은 성경의 단 한 구절을 본문으로 택하여 설교하는 훈련을 받았다. “형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이고,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이라.”와 같이 우리가 단 한 줄의 본문을 택했다면, 우리는 단일 주제를 성경본문의 덩어리로부터 추출해 낸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린 것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본문의 전체 스토리를 상실한다.
이성적인 설교학은 성경의 구절들을 마치 그것들이 정지되어 있는 정물화처럼 취급한다. 성경본문을 연구한다면 그림 안에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서 보충 설명하고, 설교에서 언급하게 될 어떤 것을 취하게 된다. 그렇게 설교를 준비하면서 우리는 박식한 역사비평학을 따르는 주석서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구절들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정적인 정물화가 아니다. 그것들은 이야기처럼 움직임을 가지며, 에피소드와 에피소드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생생한 대화들을 주고받으면서 진행해 간다. 한 개념에서 다른 개념으로 계속해서 움직인다. 그것은 한 편의 시와 같이 이미지들의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방법을 따라서 설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의미는 사상이나 사건의 움직임 속에서 생성되며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결코 정적인 진리가 아니며, 하나의 이해로부터 다른 것으로의 움직임을 포함한다.
종종 전통적인 설교는 본문에서 대지들을 추출해 내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사랑’에 대해 설교하려고 한다면, 주제에 관한 사항들을 분류하여 나타내게 괸다. 즉, 다음과 같은 식으로 설교의 주제를 분류할 수 있다. ① 가족들 간의 사랑 ② 교회 안에서의 사랑 ③ 세상 가운데서의 사랑. 이러한 대지로 분류한 것에 결론을 맺기 위해 예화를 한편 곁들이게 되면 설교준비가 완성된다.
이렇게 분류하는 식의 대지 만들기 설교에서는 무엇이 문제인가? 그러한 설교형태는 본질적으로 지루함을 야기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첫째, 둘째, 셋째 하면서 설교자는 쉽게 분류된 대지를 펼쳐 보이지만 회중석에 있는 청중들에게는 참으로 듣기 어려운 설교가 된다는 점이 문제이다.
이러한 대지설교에 있어서 서론은 마지막 문장과 같은 암시가 포함된다. 즉 “그래서 사랑은 우리가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세상 가운데서 마땅히 실천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와 같은 결론적인 이야기를 암시하고서 시작된다. 그러한 암시문장이 전통적인 설교에서는 아주 쓸 만한 형태로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회중들은 설교의 핵심을 미리 밝혀주는 문장을 대하면서 세 개의 대지로 언급될 사항들을 미리 알아차리게 된다. 무엇이 언급될 것인지 미리 알고서 시작되는 설교에서는 특별히 놀라운 사실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첫 번째 대지, “가족간의 사랑”에 대한 말씀이 9분 걸린다면 우리는 설교자가 다음 단계로 전환하기 위한 연결구를 통하여 다음 두 번째 대지 “교회 안에서의 사랑”으로 전환하기까지 언제 두 번째가 나올 것인가 하는 기다림 속에서 계속되는 신경과민을 경험하게 된다. 설교자는 청중들이 지루해할 것을 염려하면서 두 번째 대지는 7분으로 줄이고 더 많은 예화를 첨가한다. 그리고 설교자가 마지막 대지, “세상 속에서의 사랑”으로 전환할 때, 청중들로부터 거의 신음소리가 터져 나올 지경에 이른다.
이러한 대지설교가 수월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설교자들에게만 그렇게 느껴진다는 데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설교방법론은 정적이다. 또한 움직임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흥분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설교들이 청중들에게 효과적으로 들릴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게 한 번 물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의미 있고 소중한 순간을 말할 때 어떤 범주 혹은 단계를 나누어서 묘사하는가? 그렇지 않다.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로 말하거나 묘사하려고 하는 것을 규명하기 위해 서로 관계된 사항을 들어가면서 어떤 의미를 제시하려고 하지 않는가?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서는 목록을 만든다. 식료품 목록이나 혹은 여러 세탁물들, 즉 많은 여자 속옷과 셔츠, 많은 양말들을 분류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를 위해서 대화목록을 작성하는가? 즉 “제 말을 좀 들어주십시오. 저는 다음 세 가지 이유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와 같이 말이다. 아마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가운데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옮겨가면서 서로에게서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하고 제공받기도 하면서 깊은 사랑의 대화를 나눌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목록을 분류하여, '첫째, 둘째, 셋째….' 하면서 대화하지는 않는다. 학교 교실에서도 학습을 위한 교훈적인 방법을 지혜롭게 재정의 하고 있다.
오직 설교 강단만이 ‘아직도 대지를 만드는 것’에 매달려 있다. 복음을 설교함에 있어서 우리는 고정되어 버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우리 앞에 걸려 있는 포스터와 같은 말씀이나 대지를 나누어 논의하는 식으로 전해지는 말씀이 아니다. 설교자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를 향해서 우리의 청중들과 함께 여행한다. 그러한 여행은 아주 다른 설교방법론을 요구한다.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