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전쟁 100년, 인식의 흐름 - 해방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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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1945년 ∼ 1950년대

2) 1960년 ∼ 1970년대

2) 1960년 ∼ 1970년대

본문내용

강소 중심의 연구에 의문을 제기하고 농민군 도소의 활동에 주목할 것을 촉구하였다.
폐정개혁안에 대한 연구는 오지영의 ≪동학사≫ 초고본과 간행본간에 차이가 있다는 점에 주목되고 있다. 신용하는 이를 조목이 제기된 시기의 차이에 따른 것으로 초고본은 집강소 설치 이후 작성했다가 간행본에서 수정한 것이라고 보았다. 김태웅은 초고본의 조목은 7월에 정부와 합의한 안건이며 간행본의 것은 집강소 설치 후 농민군 스스로 만든 정강이라고 하였다.
④ 농민군의 상대편, 적대세력에 관한 연구
농민군 내부의 계급구성에 관해 주목한 연구들이 지나치게 농민군 내부의 계급구성의 차이, 대립에만 주목한 까닭에 봉건반봉건의 기본적인 대결구도 자체를 도외시하는 경우가 생겨났는데 농민군의 상대에 대한 분석은 이러한 기본적 대립구도를 다시 환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에대해서는 경상도 북서 지역의 보수 지배층의 동향을 분석한 신영우의 연구가 있다.
⑤ 농민전쟁의 구체적 과정을 새롭게 해명한 연구
한우근의 농민전쟁의 전개과정에 관한 연구 외에는 없던 시기에 향토사학자인 최현식의 ≪갑오동학혁명사≫(1980)를 들 수 있다. 그는 자료수집과 답사를 통해서 농민전쟁의 전개과정을 재구성하였다. 그는 답사를 통해 농민전쟁 발발 지역의 우리말 지명을 밝혀내고 현지의 지형에 근거하여 농민전쟁의 전투 등을 재구성해 냈다. 신용하는 그동안 고부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1차 농민전쟁이 3월 20일 무장봉기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밝혔다.(1993≪동학과 갑오농민전쟁≫)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군은, 관군의 반격으로 500여 명의 전사자를 낸 데 이어, 청군(淸軍)과 일군(日軍)이 개입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우세한 장비를 갖춘 정부군과 지구전을 벌인다는 것은 불리한 데다가, 청 ·일 양군이 충돌 직전에 있는 위급한 시기에 정부군과 싸움을 계속한다는 것은 대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정부의 선무공작에 순응하고, 폐정개혁안의 수락을 조건으로 강화하고 전주성에 철병하였다.
이때의 폐정개혁 12개 조항은 다음과 같다.
① 동학교도와 정부와의 숙원을 없애고 공동으로 서정(庶政)에 협력할 것,
② 탐관오리의 죄상을 자세히 조사 처리할 것,
③ 횡포한 부호를 엄중히 처벌할 것,
④ 불량한 유림과 양반을 징벌할 것,
⑤ 노비문서를 불태울 것,
⑥ 칠반천인(七班賤人)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의 머리에 쓰게 한 평양립(平壤笠)을 폐지할 것,
⑦ 청상과부의 재혼을 허가할 것,
⑧ 무명의 잡부금을 일절 폐지할 것,
⑨ 관리 채용에 있어 지벌(地閥)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⑩ 일본과 상통하는 자를 엄벌할 것,
⑪ 공사채(公私債)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은 모두 면제할 것,
⑫ 토지는 균등하게 분작(分作)하게 할 것 등이다.
동학은 이를 실시하기 위하여 전라도 53개군에 집강소(執綱所)라는 일종의 민정기관을 설치하였다. 동학의 폐정개혁 12개 조항은 갑오경장을 통하여 계급타파 ·인재등용 ·과부재혼 ·노예폐지, 탐관오리의 처벌, 천민차별의 철폐 등 그 일부가 수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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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1.20
  • 저작시기2006.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76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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