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성당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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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명동성당에 관하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답사준비와 답사 일정 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2

Ⅱ. 명동성당의 한국 근현대사적 의의 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 2
1. 들어가며 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 2
2. 명동성당의 건립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 2
3. 한국의 역사 속 명동성당
(1) 일제시대 명동성당 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 3
(2) 1970년대 명동성당 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 4
(3) 1980년대 명동성당 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 6
(4) 오늘날의 명동성당 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 8

Ⅲ. 명동성당 답사 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 9

Ⅳ. 개인별 답사 후기 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 10

Ⅴ. 참고문헌 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 12

본문내용

써가면서 경주니, 유럽일주니 하는 말을 하기가 민망해졌다. 평소에 서울에 10여 년 이상 살면서 단순히 서울에 대한 막연한 매력만 느끼고 있었지 그렇게 의미가 깊은 곳인지 몰랐다. 이번 수업을 통해서 더욱 더 서울을 사랑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우리는 서울에 대해 하찮게 생각하거나 비중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조상들의 희생과 노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그리고 소중히 간직하지 않는 모습들을 느낄 수 있었다. 을지로와 종로 사이에 나석주 열사가 동양 척식 주식회사를 향해 폭탄을 투척했던 터가 사람들이 양심 없이 버려놓은 쓰레기들로 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의 양심이다. 이것을 봤을 때 저 세상에 있는 나석주 열사가 자신의 희생을 얼마나 후회하고 있을지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명동 성당에 갔을 때, 예전에 고궁에 갔을 때 우리의 옛 흔적이 많이 소실되어 있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웠다.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스가 관광대국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자신들의 조상들이 물려준 문화유산들을 소중히 다뤘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화가 우리보다 더 월등해서가 아니란 뜻이다. 지금이라도 그나마 남아있는 것을 소중하게 지켰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명동성당 답사를 위해 자료조사를 하면서 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바로 신앙과 사회참여다. 명동성당은 90년대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민주화의 성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시 탈정치화, 보수화가 되어가고 있다. 비단 명동성당만의 일이 아니다. 나도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지금의 종교계를 보고 있으면 답답하다. 속으로는 세속화 되어 가면서 정작 자신의 기득권을 잃어버리게 됐을 땐, 권력과 영합하고 정교분리라는 그럴듯한 변명으로 사회의 정의 실현에 둔감한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나는 개신교 신자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개신교의 대부분의 교파는 독재 정권에 침묵했다. 아마 헌정초기부터 장로 대통령의 영향으로 기득권의 상당수가 개신교의 요직을 맡아놓은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현재의 정권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내고 이른바 사회참여라는 것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더욱 더 내 마음이 무겁다. 왜냐하면 일부 기득권들 때문에 선의의 개신교 신자들이 이기주의자 취급을 받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수치를 당하는 모습을 그대로 지켜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앙과 사회 참여 사이에서 하나의 신앙인으로서 균형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것은 신앙적인 교리와 그리고 사회에 대한 지식, 그리고 끊임없는 학습과 반성을 통한 통찰력만이 그 균형을 지키고 진정한 신앙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계기를 통해 나의 정체성에 대해 더욱 더 생각해 봤고 그리고 이 땅의 한 민족으로서, 그리고 앞으로 있을 몇 백 년 후의 나의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도록 다짐했다.
3.
처음에는 광주나 마산 쪽으로 멀리 가 볼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가까운 곳인데도 잘 찾아보면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장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고심한 끝에 우리는 명동 성당을 택했다. 명동은 쇼핑하러 자주 가는 장소이지만, 정작 우리 중에 명동 성당을 갔다 와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처음 가 본 명동성당은 생각보다 많이 컸고 여러 건물들이 많았다. 경로를 따라서 답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오랜 역사의 발자취가 담긴 명동성당을 천천히 거닐며 꼼꼼히 관찰했다.‘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쯤에 앉아서 인권과 민주화와 통일에 대해서 얘기 했겠구나’ 서로 추측해보며, 한국인의 혼이 담긴 장소에 있다는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최근 성당의 동의를 받지 않은 집회는 불허한다고 선언해서 그런지 농성이 점점 줄어들고는 있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명동성당이 과거 그래왔던 것처럼 우리나라의 정신적 중심지가 되어 한국 사회가 시민 사회로 이행해 가는데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장이 되길 바란다.
4.
나는 부산에서 쭉 살아왔기 때문에 명동성당은 늘 TV로만 봐왔던 곳이었다. 큰 집회나 시위를 할 때 사람들이 자주 가는 곳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명동성당을 답사를 위해 조사하면서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자들과 압제에 쫓기는 자들의 피난처이자 성지로 한국사에 자리매김하고 있는 명동성당. 이런 사실을 알게 되자 명동성당으로 가는 일에 기대감이 생겼다. 하지만 명동성당의 첫인상은 굉장히 초라했다. 그리 크지 않은 부지에 몇 안 되는 낡은 건물들, 그리고 건너편의 난잡한 상가들은 성지라는 표현을 민망하게 만들 정도였다. 적어도 한국사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라면 좀 더 국가에서 관리를 해서 명소로 만들어야 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 중요한건 겉이 아니고 속이었다. 딱히 명동성당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성모마리아 조각상 앞에서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는 사람들과 때마침 하고 있던 성당 안에서 아이들의 성가 합창은 보수공사중인 성당의 외부와는 달리 매우 숙연하고 장엄했다. 고딕식 건축양식과 높게 솟은 성당의 첨탑은 명동성당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명동성당의 여기저기를 걸으면서 ‘여기서 사람들이 한국의 민주화를 외쳤겠구나’하는 생각을 하니 뭔가 과거 민주화를 외치던 시대를 걷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명동성당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공부하거나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조사를 거친 후 한번 가봐야 할 곳인 것 같다.
Ⅴ. 참고문헌
임정의, 「명동성당 100년」. (서울: 코리언북스, 2002)
윤선자, 「한국근대사와 종교」. (서울: 국학자료원, 2002)
박원순, 「역사가 이들을 무죄로 하리라」. (서울: 두레, 2003)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15 - 서울」, (서울: 돌베게, 2004)
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서울: 돌베게, 1999)
유시춘, 「우리 강물이 되어」. (서울: 경향신문사, 2005)
김수환,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서울: 평화방송. 평화신문, 2004)
임물과 사상 편집부, 「시사인물사전」. (서울: 인물과 사상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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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1.26
  • 저작시기20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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