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다. 한비자가 순자에게 직접 배웠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곽밀약이나 가이쯔까 같은 학자들이 의문을 제기했지만, 순자의 사상이 한비자에게 수용되어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순자의 사상만이 아니라 춘추 전국 시대의 법가 전통과 도가, 묵가, 유가의 사상이 한비자의 체계에 흡수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전국 시대 말기 이후 각 학파 사이의 사상적 교류와 융합의 자연스런 경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비자는 청년기는 그의 조국 한나라가 역사상 가장 비참한 처지에 있었던 시기입니다. 한나라는 기원전 5세기 말 경 진나라의 침입을 받은 나라 중의 하나였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작은 나라로 강대한 이웃 나라에게 군대를 잃고 영토를 유린당했습니다. 한비자는 위기에 놓인 조국의 정세를 인식하고 한나라 왕에게 여러 차례 국정 개혁에 관한 상소를 올렸으나 왕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상소가 채용되지 않자 한비자는 자신의 부국 강병 방안을 10여 만 자의 저술로 남겼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 '고분'과 '우두'편을 우연히 읽은 진시황이 "이것이야말로 내가 기다리던 사상이다. 내가 이 사람을 만나 같이 일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기원전 234년,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하자 한나라 왕은 한비자를 진에 사신으로 보내 위기를 넘기려 하였습니다. 한비자는 진시황을 설득하여 조국의 위기를 구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도리어 진시황은 한비자를 자기 편으로 쓰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사와 요가의 획책으로 한비자는 감옥에서 사약을 받았습니다. 진시황이 뒤에 죽이라는 결정을 취소하였으나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기원전 233년이라고 하므로, 한비자는 대략 기원전 280년 경에 태어나서 233년에 죽은 것입니다.
한비자의 저서는 처음에 '한자(韓子)'라고 불렸습니다. 책 이름이 '한비자'로 바뀐 것은 송나라 이후의 일입니다. 송대에 유교가 새롭게 부흥하면서, 불교와 도교가 유행했던 당나라 때에 유학을 부르짖었고 대문장가로서 당송 팔대가에 든 한유(韓愈)를 높여 '한자'라 부르게 도어 원래 '한자'로 불리던 책이 '한비자'가 되었습니다. 유학이 세력을 얻자 한비자가 밀려난 셈입니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한비자>는 20권 55편으로, 한비자의 저술과 후인들의 글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어느 것이 한비자 자신의 저작인지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의견이 다르지만, '고분', '오두', '현학', '정법'등은 한비자의 저작이라고 믿을 수 있는 편들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한비자의 생애는 진나라와 한나라의 정치적 관계와 진시황, 이사라는 인물과 관계가 깊습니다. 기원전 3세기 전반에 진나라는 강적 초나라를 거듭 무찌르고 그 영토를 많이 병합시켰습니다. 한비자와 함께 순자에게 배우고 뒤에 진시황의 신하가 된 이사의 힘으로 마지막 승리는 이루어졌습니다. 이사는 먼 나라의 힘을 빌어 가까운 나라를 치는 '원교 근공'의 외교술과 적국에 첩자를 보내 민심을 교란하고 정보를 훔치는 방법으로 이 사업을 성공시켰다고 합니다. 지리상으로 진나라에 가장 가까웠던 한나라는 진나라의 영토 확장 정책에 가장 위협을 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기원전 약 250년 경, 진나라는 여러 나라 가운데서 경제력과 군사력이 강한 나라가 되었고, 제도를 고쳐서 중앙 집권적 관료 제도를 확립했습니다. 천하를 통일하고 최초의 통일 제국을 다스릴 기초를 마련한 것입니다. 한비자는 비록 진나라에서 죽었지만, 그의 이론은 진나라의 통치 제도에 이론적으로 기여하고 이후 중국 역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 법가 사상의 의의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한비자의 철학은 세 가지 중심 이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기 때문에 국가는 강력한 통제와 조종을 통하여 부강을 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군주는 법과 세와 술로 민중과 백관을 통솔하며, 그 제재 방식은 종교적, 도덕적인 것이 아닌 사회 조직의 정점에 선 왕의 권세와 법의 강제에 의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가치 판단의 기준은 현실적으로 효과있는 결과를 낳았느냐 아니냐이고, 따라서 '고대의 도와 원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상황을 연구하고 대처 방안을 내는 것'이 관리들의 임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법의 공정한 시행과 중앙 집권화된 관료 제도, 사회의 경제적 기초의 강조 등을 통하여 한비자는 정치 철학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고, 다른 학파보다 현실적인 정치관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법가 사상은 자유와 자발성이 아니라 복종과 강제를 강조하여 군주 전제주의를 이룬 것입니다. 이 사상은 민중에게 정치에 대한 의논이나 생각을 하지 말고 다만 복종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분명히 이런 이론은 민주주의 원칙과 거리가 있지만, 주나라 식 봉건 제도를 넘어서 효율적인 관리 제도를 확립하는 이론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에 힘입어 진시황은 중국 천하를 통일하였습니다. 또한 법가 사상은 유교의 도덕론과 결합하여 중국 사회를 2000년 동안 전제 군주제로 이끌어 온 이론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어떤 면에서 법가 사상의 현실적 합리성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기에는 과거의 철학을 유가와 법가로 대립시키고, 법가 진영에 속한 사상을 유물론의 입장에 선 진보적 사상이라고 평가하였습니다. 이것은 법가의 현실적 인간관, 역사의 진보에 대한 인식에 주목하고 현실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실천적 지향이 강한 철학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당연히 법가 사상이 긍정적으로 평가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그러나 법가의 이론이 비교적 과학적 인식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들의 법은 군주의 무한 권한에 의존하는 통치술의 의미가 강했습니다. 또한 인간관도 인간을 오직 통치의 대상으로만 볼 뿐, 자율성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어서 중앙 집권적 전제 군주 국가가 합법적으로 독재를 행사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사회의 현실적 토대를 기준으로 이론을 전개하고, 현실의 변화에 따라 옛 제도를 바꾸어야 하며, 이론은 현실적 실효성을 가져야 한다는 법가의 정신은 아직도 가치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한비자는 청년기는 그의 조국 한나라가 역사상 가장 비참한 처지에 있었던 시기입니다. 한나라는 기원전 5세기 말 경 진나라의 침입을 받은 나라 중의 하나였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작은 나라로 강대한 이웃 나라에게 군대를 잃고 영토를 유린당했습니다. 한비자는 위기에 놓인 조국의 정세를 인식하고 한나라 왕에게 여러 차례 국정 개혁에 관한 상소를 올렸으나 왕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상소가 채용되지 않자 한비자는 자신의 부국 강병 방안을 10여 만 자의 저술로 남겼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 '고분'과 '우두'편을 우연히 읽은 진시황이 "이것이야말로 내가 기다리던 사상이다. 내가 이 사람을 만나 같이 일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기원전 234년,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하자 한나라 왕은 한비자를 진에 사신으로 보내 위기를 넘기려 하였습니다. 한비자는 진시황을 설득하여 조국의 위기를 구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도리어 진시황은 한비자를 자기 편으로 쓰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사와 요가의 획책으로 한비자는 감옥에서 사약을 받았습니다. 진시황이 뒤에 죽이라는 결정을 취소하였으나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기원전 233년이라고 하므로, 한비자는 대략 기원전 280년 경에 태어나서 233년에 죽은 것입니다.
한비자의 저서는 처음에 '한자(韓子)'라고 불렸습니다. 책 이름이 '한비자'로 바뀐 것은 송나라 이후의 일입니다. 송대에 유교가 새롭게 부흥하면서, 불교와 도교가 유행했던 당나라 때에 유학을 부르짖었고 대문장가로서 당송 팔대가에 든 한유(韓愈)를 높여 '한자'라 부르게 도어 원래 '한자'로 불리던 책이 '한비자'가 되었습니다. 유학이 세력을 얻자 한비자가 밀려난 셈입니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한비자>는 20권 55편으로, 한비자의 저술과 후인들의 글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어느 것이 한비자 자신의 저작인지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의견이 다르지만, '고분', '오두', '현학', '정법'등은 한비자의 저작이라고 믿을 수 있는 편들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한비자의 생애는 진나라와 한나라의 정치적 관계와 진시황, 이사라는 인물과 관계가 깊습니다. 기원전 3세기 전반에 진나라는 강적 초나라를 거듭 무찌르고 그 영토를 많이 병합시켰습니다. 한비자와 함께 순자에게 배우고 뒤에 진시황의 신하가 된 이사의 힘으로 마지막 승리는 이루어졌습니다. 이사는 먼 나라의 힘을 빌어 가까운 나라를 치는 '원교 근공'의 외교술과 적국에 첩자를 보내 민심을 교란하고 정보를 훔치는 방법으로 이 사업을 성공시켰다고 합니다. 지리상으로 진나라에 가장 가까웠던 한나라는 진나라의 영토 확장 정책에 가장 위협을 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기원전 약 250년 경, 진나라는 여러 나라 가운데서 경제력과 군사력이 강한 나라가 되었고, 제도를 고쳐서 중앙 집권적 관료 제도를 확립했습니다. 천하를 통일하고 최초의 통일 제국을 다스릴 기초를 마련한 것입니다. 한비자는 비록 진나라에서 죽었지만, 그의 이론은 진나라의 통치 제도에 이론적으로 기여하고 이후 중국 역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 법가 사상의 의의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한비자의 철학은 세 가지 중심 이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기 때문에 국가는 강력한 통제와 조종을 통하여 부강을 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군주는 법과 세와 술로 민중과 백관을 통솔하며, 그 제재 방식은 종교적, 도덕적인 것이 아닌 사회 조직의 정점에 선 왕의 권세와 법의 강제에 의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가치 판단의 기준은 현실적으로 효과있는 결과를 낳았느냐 아니냐이고, 따라서 '고대의 도와 원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상황을 연구하고 대처 방안을 내는 것'이 관리들의 임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법의 공정한 시행과 중앙 집권화된 관료 제도, 사회의 경제적 기초의 강조 등을 통하여 한비자는 정치 철학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고, 다른 학파보다 현실적인 정치관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법가 사상은 자유와 자발성이 아니라 복종과 강제를 강조하여 군주 전제주의를 이룬 것입니다. 이 사상은 민중에게 정치에 대한 의논이나 생각을 하지 말고 다만 복종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분명히 이런 이론은 민주주의 원칙과 거리가 있지만, 주나라 식 봉건 제도를 넘어서 효율적인 관리 제도를 확립하는 이론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에 힘입어 진시황은 중국 천하를 통일하였습니다. 또한 법가 사상은 유교의 도덕론과 결합하여 중국 사회를 2000년 동안 전제 군주제로 이끌어 온 이론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어떤 면에서 법가 사상의 현실적 합리성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기에는 과거의 철학을 유가와 법가로 대립시키고, 법가 진영에 속한 사상을 유물론의 입장에 선 진보적 사상이라고 평가하였습니다. 이것은 법가의 현실적 인간관, 역사의 진보에 대한 인식에 주목하고 현실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실천적 지향이 강한 철학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당연히 법가 사상이 긍정적으로 평가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그러나 법가의 이론이 비교적 과학적 인식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들의 법은 군주의 무한 권한에 의존하는 통치술의 의미가 강했습니다. 또한 인간관도 인간을 오직 통치의 대상으로만 볼 뿐, 자율성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어서 중앙 집권적 전제 군주 국가가 합법적으로 독재를 행사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사회의 현실적 토대를 기준으로 이론을 전개하고, 현실의 변화에 따라 옛 제도를 바꾸어야 하며, 이론은 현실적 실효성을 가져야 한다는 법가의 정신은 아직도 가치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