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그리스, 로마 조각
2. 르네상스 (Renaissance)에서의 인체표현
3. 서양에서의 인물화 (Figure Painting)
2. 르네상스 (Renaissance)에서의 인체표현
3. 서양에서의 인물화 (Figure Painting)
본문내용
는 18세기 영국의 윌리엄 호가드 호가스 (Hogarth, William, 1697~1764) 영국의 화가 판화가. 런던 출생. 금은세공사 밑에서 수업한 후, 판화와 삽화기술을 습득하고, 당시의 거장 손힐에게 사사하였다. 손힐의 딸과 결혼한 그는 그 후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 초상화 제작에 몰두하여 일가를 이루고 다시 새로운 시도로서 교훈적 테마에 의한 풍속화 위주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가 있는데 그는 시민 생활에서 취재한 교훈적풍자적 풍속화를 즐겨 그렸다. 호가드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결혼 풍속도>에서 보면은 이해 타산이 얽힌 결혼의 전후 상태를 풍자한 것으로 화려했던 결혼 잔치의 잔재 속에서 신혼 부부는 따분한 일을 강요받아 치룬 듯이 허탈감과 권태를 보여주고 있다. 무기력하게 다리를 뻗고 앉아 있는 남자는 향락의 철야로 탈진한 상태이고 피로를 참지 못하는 신부의 흐트러진 자세에선 청순한 신부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반면에 프랑스에서는 상류 사회를 다룬 풍속화가 유행하기도 했는데 랑크레 랑크레 (Lancret, Nicolas, 1690~1743) 프랑스의 로코코 화가. 파리 출생. 처음에는 역사화(歷史畵)를 배웠으나 1712년경 방향을 바꾸어 C.질로의 제자가 되었으며, 같은 제자인 J.A.와토와 알게 되어 큰 영향을 받았다. 제재 구도 수법이 와토와 흡사하여 이로 인해 두 사람이 불화하였다고 한다. 와토에 비해 자연성과 유동성, 발상력이 결여되어 있으나 재기(才氣)와 근면으로 희극(喜劇) 계통의 작품 등을 많이 다루어 당시의 풍속을 솜씨 있게 묘사하였다.
, 부셰 부셰 (Francois Boucher,1703~1770) 파리 출생. 한때 F.르무안에게 사사하였으나, A.와토에게서 보다 많은 것을 배웠다. 1723년 왕립미술원에서 회화대상을 받고, 1727년 이탈리아로 가 당시 이탈리아 최대의 장식화가인 G.티에폴로를 연구한 뒤 귀국하여 1734년 아카데미 회원, 1765년에는 회장이 되었는데 그 동안 궁정화가로서 루이 15세의 제2부인인 퐁파두르부인의 총애를 받아 화단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리스신화에서 취재하여 요염한 여신의 모습을 그렸고, 또 귀족이나 상류계급의 우아한 풍속과 애정장면을 즐겨 그려, 프랑스 로코코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 프라고나르 프라고나르 (Jean-Honore Fragonard, 1732~1806) 남프랑스의 그라스 출생. 파리에서 J.샤르댕에게 배우고, 이어서 F.부셰에게 사사하였다. 1752년 로마대상을 받고,영국으로 유학을 한 후 파리로 돌아와서는 1765년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역사화도 그렸으나, 대부분 여인 아이의 초상, 혹은 목욕하는 여인이나 연인들을 제재로 한 풍속화를 즐겨 그렸으며, 섬세하고 미려한 관능적 정취를 짙게 보여주었다.
등이 그 대표적 화가들이다.
이후 19세기에 이르러 사실주의적 사조는 많은 풍속화를 낳았는데, 온갖 사회계층을 날카롭게 풍자한 도미에 도미에 (Honore Daumier, 1808~1879) : 5세 때 유리직공이며 시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이주하였다. 어려서부터 공증인 사무실의 급사나 서점 점원 일을 하며 고생하였으나, 화가를 지망하여 석판화 기술을 습득하였다. 1830년 《카리카튀르》지 창간에 즈음하여, 이 잡지의 만화기고가로 화단에 데뷔하였고, 1832년 국왕 루이 필리프를 공격하는 정치만화를 기고하여 투옥되었다. 1835년 언론탄압에 의한 이 잡지의 발행금지 후에는 사회 풍속 만화로 전환하여, 주로 《샤리바리》 지상에서 활약하였는데, 분노와 고통을 호소하는 민중의 진정한 모습을 때로는 휴머니스틱하게, 때로는 풍자적인 유머를 담아 그렸다. 그 후 40년간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생태를 풍자하였다.
, 농민화가인 밀레 밀레 (Jeam-Francois Millet, 1814~1875) 프랑스의 화가.
노르망디 지방 그레빌 출생. 1833~1836년 셰르부르에서 그림공부를 하다가 1837년 장학금을 얻어 파리로 진출하여 P.들라로슈의 제자가 되었다. 루브르미술관에서 푸생, 르냉, 샤르댕 등의 영향을 받았으나, 도미에의 작품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1849년 파리 교외의 바르비종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대지와 맺어져 있는 농민생활의 모습과 주변의 자연풍경을 그렸다. 종교적 정감이 감도는 서정성으로 친애감을 자아내고 오늘날까지 유럽 회화사상 유명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 노동자의 생활을 다룬 쿠르베 쿠르베 (Courbet, Gustave 1819~1877) 스위스 국경 가까운 프랑슈콩테주 오르낭 출생. 1840년 아버지의 권유로 법률연구를 위해 파리로 나왔으나 얼마 후 화가를 지망하여 화숙(畵塾)에 다니며 회화습작에 몰두하는 한편 루브르미술관에서 에스파냐와 네덜란드파의 거장들의 작품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당시의 고전주의와 같은 이상화나 낭만주의적인 공상표현을 일체 배격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묘사할 것을 주장한 그의 사상적 입장은, 회화의 주제를 눈에 보이는 것에만 한정 혁신하고 일상생활에 대한 관찰의 밀도를 촉구한 점에서 미술사상 가장 큰 의의를 남긴 것이다.
등이 각기 풍속화를 그렸다. 특히, 윌리엄 호가드의 정신적인 계승자인 도미에는 귀족과 정치인들을 풍자한 캐리커쳐 캐리커처 (caricature): 사건의 양상이나 인간의 자태 등을 그 특징을 잡아 익살스럽게 표현한 그림이나 문장. 어원은 과장된 것, 왜곡된 것 등의 뜻을 지닌 이탈리아어 caricatura에서 나온 말이다. 풍자화 희화 만화 등도 캐리커처의 일종이다. 대개 조소(嘲笑) 우의(寓意) 등을 수반한 과장된 표현으로 시국을 풍자하고 권위에 반항하며 위선을 폭로하는 등의 성격을 띤다.
를 주로 그렸다. 그의 작품<삼등열차>에서는 마치 들쥐같이 꼭 끼여 있는 서민들과 노동자 계층의 여행객들의 모습을 현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는데, 각기 사람들은 서로에게 무관심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들 풍속화의 주된 특징으로는 일상적인 서민들의 모습을 통해 해학과 풍자를 느낄 수 있으며,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의미와 현실적 사회체제의 특징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가 있는데 그는 시민 생활에서 취재한 교훈적풍자적 풍속화를 즐겨 그렸다. 호가드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결혼 풍속도>에서 보면은 이해 타산이 얽힌 결혼의 전후 상태를 풍자한 것으로 화려했던 결혼 잔치의 잔재 속에서 신혼 부부는 따분한 일을 강요받아 치룬 듯이 허탈감과 권태를 보여주고 있다. 무기력하게 다리를 뻗고 앉아 있는 남자는 향락의 철야로 탈진한 상태이고 피로를 참지 못하는 신부의 흐트러진 자세에선 청순한 신부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반면에 프랑스에서는 상류 사회를 다룬 풍속화가 유행하기도 했는데 랑크레 랑크레 (Lancret, Nicolas, 1690~1743) 프랑스의 로코코 화가. 파리 출생. 처음에는 역사화(歷史畵)를 배웠으나 1712년경 방향을 바꾸어 C.질로의 제자가 되었으며, 같은 제자인 J.A.와토와 알게 되어 큰 영향을 받았다. 제재 구도 수법이 와토와 흡사하여 이로 인해 두 사람이 불화하였다고 한다. 와토에 비해 자연성과 유동성, 발상력이 결여되어 있으나 재기(才氣)와 근면으로 희극(喜劇) 계통의 작품 등을 많이 다루어 당시의 풍속을 솜씨 있게 묘사하였다.
, 부셰 부셰 (Francois Boucher,1703~1770) 파리 출생. 한때 F.르무안에게 사사하였으나, A.와토에게서 보다 많은 것을 배웠다. 1723년 왕립미술원에서 회화대상을 받고, 1727년 이탈리아로 가 당시 이탈리아 최대의 장식화가인 G.티에폴로를 연구한 뒤 귀국하여 1734년 아카데미 회원, 1765년에는 회장이 되었는데 그 동안 궁정화가로서 루이 15세의 제2부인인 퐁파두르부인의 총애를 받아 화단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리스신화에서 취재하여 요염한 여신의 모습을 그렸고, 또 귀족이나 상류계급의 우아한 풍속과 애정장면을 즐겨 그려, 프랑스 로코코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 프라고나르 프라고나르 (Jean-Honore Fragonard, 1732~1806) 남프랑스의 그라스 출생. 파리에서 J.샤르댕에게 배우고, 이어서 F.부셰에게 사사하였다. 1752년 로마대상을 받고,영국으로 유학을 한 후 파리로 돌아와서는 1765년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역사화도 그렸으나, 대부분 여인 아이의 초상, 혹은 목욕하는 여인이나 연인들을 제재로 한 풍속화를 즐겨 그렸으며, 섬세하고 미려한 관능적 정취를 짙게 보여주었다.
등이 그 대표적 화가들이다.
이후 19세기에 이르러 사실주의적 사조는 많은 풍속화를 낳았는데, 온갖 사회계층을 날카롭게 풍자한 도미에 도미에 (Honore Daumier, 1808~1879) : 5세 때 유리직공이며 시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이주하였다. 어려서부터 공증인 사무실의 급사나 서점 점원 일을 하며 고생하였으나, 화가를 지망하여 석판화 기술을 습득하였다. 1830년 《카리카튀르》지 창간에 즈음하여, 이 잡지의 만화기고가로 화단에 데뷔하였고, 1832년 국왕 루이 필리프를 공격하는 정치만화를 기고하여 투옥되었다. 1835년 언론탄압에 의한 이 잡지의 발행금지 후에는 사회 풍속 만화로 전환하여, 주로 《샤리바리》 지상에서 활약하였는데, 분노와 고통을 호소하는 민중의 진정한 모습을 때로는 휴머니스틱하게, 때로는 풍자적인 유머를 담아 그렸다. 그 후 40년간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생태를 풍자하였다.
, 농민화가인 밀레 밀레 (Jeam-Francois Millet, 1814~1875) 프랑스의 화가.
노르망디 지방 그레빌 출생. 1833~1836년 셰르부르에서 그림공부를 하다가 1837년 장학금을 얻어 파리로 진출하여 P.들라로슈의 제자가 되었다. 루브르미술관에서 푸생, 르냉, 샤르댕 등의 영향을 받았으나, 도미에의 작품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1849년 파리 교외의 바르비종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대지와 맺어져 있는 농민생활의 모습과 주변의 자연풍경을 그렸다. 종교적 정감이 감도는 서정성으로 친애감을 자아내고 오늘날까지 유럽 회화사상 유명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 노동자의 생활을 다룬 쿠르베 쿠르베 (Courbet, Gustave 1819~1877) 스위스 국경 가까운 프랑슈콩테주 오르낭 출생. 1840년 아버지의 권유로 법률연구를 위해 파리로 나왔으나 얼마 후 화가를 지망하여 화숙(畵塾)에 다니며 회화습작에 몰두하는 한편 루브르미술관에서 에스파냐와 네덜란드파의 거장들의 작품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당시의 고전주의와 같은 이상화나 낭만주의적인 공상표현을 일체 배격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묘사할 것을 주장한 그의 사상적 입장은, 회화의 주제를 눈에 보이는 것에만 한정 혁신하고 일상생활에 대한 관찰의 밀도를 촉구한 점에서 미술사상 가장 큰 의의를 남긴 것이다.
등이 각기 풍속화를 그렸다. 특히, 윌리엄 호가드의 정신적인 계승자인 도미에는 귀족과 정치인들을 풍자한 캐리커쳐 캐리커처 (caricature): 사건의 양상이나 인간의 자태 등을 그 특징을 잡아 익살스럽게 표현한 그림이나 문장. 어원은 과장된 것, 왜곡된 것 등의 뜻을 지닌 이탈리아어 caricatura에서 나온 말이다. 풍자화 희화 만화 등도 캐리커처의 일종이다. 대개 조소(嘲笑) 우의(寓意) 등을 수반한 과장된 표현으로 시국을 풍자하고 권위에 반항하며 위선을 폭로하는 등의 성격을 띤다.
를 주로 그렸다. 그의 작품<삼등열차>에서는 마치 들쥐같이 꼭 끼여 있는 서민들과 노동자 계층의 여행객들의 모습을 현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는데, 각기 사람들은 서로에게 무관심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들 풍속화의 주된 특징으로는 일상적인 서민들의 모습을 통해 해학과 풍자를 느낄 수 있으며,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의미와 현실적 사회체제의 특징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