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사태의 역사적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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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素是貪官汚吏)’, ‘부패관료반대(腐敗官僚反對)’, ‘등소평은 인민을 위해 쉬시오(老鄧 老鄧爲了人民悠休息)’, ‘이붕은 하야하라(下野李鵬)’ 등이다. 그런데 이러한 구호의 내용은 5ㆍ4운동 시기에 지적된 문제점과 유사한 것이다. 정치적 민주주의의 실현, 근대화의 달성, 남녀평등 등에서는 불행히도 5ㆍ4운동 시대의 문제점이 아직도 유보되고 있다는 데 동정을 금할 수가 없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당말의 황소(黃巢)가 내건 격문에서도 관리탐관, 부역가중(賦役加重)이 문제였다.
천안문 사건에 참가한 백만에 달하는 인파는 놀랄 만한 숫자이다. 그러나 등소평은 이들 시위군중이 11억 인구 중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크지 않은 것으로 보려하였다. 백만인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자본주의체제를 부르짖는 반혁명분자들을 처단하고 말겠다는 으름장이었다.
천안문 광장에 모인 인파를 두고 하는 그들의 이야기는 확실히 많은 중국 인구에 대한 숫자놀음으로 통하고 있다. 처음 자제력으로 인내하였던 경찰병력도 시위군중 못지 않은 숫자가 동원되어 대처하였다. 참으로 엄청난 숫자가 뒤엉켜도 천안문 광장은 넓고 크게 보였다. 천안문 광장이 존속하는 한 중국의 민주화항쟁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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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2.16
  • 저작시기2010.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83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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