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반미가 왜 문제인가?
1) 반미의 개념
2) 미국에 대한 인식의 양면성
3) 반미운동의 전개
2. 시대적 구분을 통한 반미운동의 형성과 변천과정
1) 50년대
2) 60년대
3) 70년대
4) 80년대
5) 90년대와 현재
3. 반미감정의 해소 방안과 우리의 발전 방향
1) 반미의 개념
2) 미국에 대한 인식의 양면성
3) 반미운동의 전개
2. 시대적 구분을 통한 반미운동의 형성과 변천과정
1) 50년대
2) 60년대
3) 70년대
4) 80년대
5) 90년대와 현재
3. 반미감정의 해소 방안과 우리의 발전 방향
본문내용
다. 85년 들어 본격화된 수입개방저지투쟁은 모내기를 마치면서 경남 고성을 비롯한 거의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었고 농민들의 큰 재산 중의하나인 소값이 폭락하면서 소들의 시위도 벌어졌다. 7월 26일 전북 진안에서는 500 여명의 농민들이 경찰의 저지선을 일곱 차례나 뚫어 그 동안 맺힌 한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주었다. 이듬해까지 계속된 수입개방저지투쟁은 86년 4월 미대사관 앞 항의 시위로까지 발전했다. 미대사관 앞 항의 시위는 미국의 경제침략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이었다.
농민들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경제 침략은 이미 1천만 농민의 생존 문제를 넘어 전민족의 자주와 민중 생존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고 규정하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경제침략 분쇄와 민족자주 수호”, “양담배 수입하는 매국 정권타도와 민족자주 정권 수립” 이라는 구호를 공공연히 제기하였다.
반미는 곧 빨갱이로 통하는 시대였지만 민중의 생존권과 직결된 반미구호는 전국민적 호응속에서 진행될 수 있었다. 농민들의 수입개방저지투쟁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속성을 다시 한번 각인 시켜준 투쟁이었으며 미국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버리지 않는 한 필연적으로 한국 민중의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투쟁이었다.
5) 90년대와 현재
80년대 까지는 반미 투쟁이 운동권에서만 제기 되었다면 90년대에 들어 와서 점차적으로 공론화가 시작 되었다. 90년대 초의 미군기지 반환 운동은 ‘반미운동의 대중화’의 첫 걸음이라고 할수 있다. 이점에서 정치적 반미운동의 문제와 한계를 넘어선 새로운 반미운동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2000년대에 들어 와서는 더욱 문화적으로 더욱 쟁점화 되기 시작하였다. 기성세대를 넘어선 신세대들의 성장으로 의식의 자유화가 가능해졌음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승희 추모시위
91년 5월 19일. 전남대 여학생 박승희가 20일 간의 병상 생활 끝에 작고했다. 박승희는 그해 4월 29일 전남대 교정에서 열린 ‘고 강경대 열사의 추모 및 노태우정권 퇴진결의 대회’ 에 참여해 반미구호를 외치다가 돌에 맞아 몸을 불살랐다. 강경대는 그보다 사흘 전 반정부 시위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졌다.
강경대, 박승희는 20살 동갑내기 이었다. 박승희는 병상에 누워 분신과 죽음사이에서도 몸 상태가 조금 나아진다 싶으면 손으로 ‘미국놈들 몰아내자’ 라고 썼다.
이러한 박승희와 강경대를 추모하기 위해서 광주에서는 대대적으로 박승희 추모 시위가 열린다. 이시기에 열사했던 박승희와 강경대는 단지 비틀린 한국현대사의 희생자였던 것 만이아니라 그 비틀림을 펼쳐 보려고 노력했던 능동적인 시대정신의 한 주체이기도 하다.
노근리양민 학살대책위원회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이 충북 영동군 노근리 경부선 철도 밑 굴다리에서 400여명을 대상으로 자행 되었다. 미군들은 마을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 무차별적으로 사살하였다. 반세기가 지난 1999년 되어서 그 동안에 감쳐 두었던 부분들이 공개 되기 시작했다. 생존자들의 진술이 이어졌고 또한 터널 안에서 발견되는 생생한 총탄자국이 이를 증명 해주었다. 미 당국은 정확한 사건 규명을 회피하였고 그리하여 각계의 저명한 학자들과 시민단체들이 진상규명을 요청하며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각 통신사를 통해 외국에 알려 졌으며 결국 미국은 노근리 조사단을 꾸려 한국에서의 조사를 시작했다.
이 사건은 그동안 독재정권하에서 감추어 왔던 미군들의 만행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또한 이를 계기로 그동안 보수적이었던 학계도 반미운동을 실천하게 되었다.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안톤오노의 반칙사건
미국의 솔트레이크에서 열린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1500m 남자 경기에서 우리나라의
김동성선수가 2바퀴를 남겨놓고 1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뒤 따라 오던 미국의 오노선수가 김동성선수와 부딪혀 헐리우드 액션을 취하면서 김동성선수의 진로방해를 이끌어 냈다. 1위로 들어온 김동성 선수는 금메달을 오노선수에게 넘겨주고 실격처리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 동안 신세대들에게는 관심 밖이었던 반미운동이 문화적으로 다가 갔다. 인터넷에서는 오노패러디가 넘실 댔으며 이를 계기로 미국영화 안보기, 햄버거 안 먹기 등의 일련의 운동들이 신세대를 축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정치적으로만 느껴오던 반미관계가 이제는 신세대들의 문화적 자부심으로 말미암아 문화적인 충돌로 이어 진 사건이다.
3. 반미감정의 해소 방안과 우리의 발전 방향
반미감정이 한미간의 불평등한 관계에 관한 인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반미운동이 이러한 불평등한 관계한 대한 개선을 지향하고 있는 한 그것은 반미감정이나 반미운동이라고 규정하고 단정지을 수 없다.
지금 까지 밖으로 표출되지 않았던 이러한 반미운동들이 정치적으로 든지 문화적으로든지 표출이 되면서 현재의 대한민국은 굉장히 불안하고 위기라고 일컬어 진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 당연한 것 이다.
반미운동들은 각각의 정황적인 사건들에 대하여 얼마동안 한시적이고 일회적으로 진행이 되어서는 안될 것 이다. 중요한 것은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 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설득력 있게 다가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정확한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사태를 정확하게 평가하고 지향해야 할 것이다. 또한 더 이상 미국을 ‘은혜로운 시혜자’로 바라보거나 그러기를 기대하는 미성숙한 관점도 조금씩 버려가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도 정보를 공개하고 민주적인 토론의 장을 마련하는데 성의를 보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통하여 우리는 더욱 성숙하고 발전하게 될 것이다.
[참고 문헌]
1. 반미가 왜 문제인가? 당대 /홍성태 (2005)
2. 한미동맹 성격변화연구: 구성주의 시각으로, 가톨릭대 국제대학원/조영화 (2005)
3. 80년대 반미 자주화 운동사 /박소정 (1998)
4. 반미감정의 실체와 해소방안, 충남대학교 사회학과/박노영 (2003)
5. 한국의 반미주의: 한국인들의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 원광대학교 정치 외교학과/ 이재봉 (2003)
6. 한미동맹의 재인식, 국방부/조병희 (2004)
농민들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경제 침략은 이미 1천만 농민의 생존 문제를 넘어 전민족의 자주와 민중 생존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고 규정하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경제침략 분쇄와 민족자주 수호”, “양담배 수입하는 매국 정권타도와 민족자주 정권 수립” 이라는 구호를 공공연히 제기하였다.
반미는 곧 빨갱이로 통하는 시대였지만 민중의 생존권과 직결된 반미구호는 전국민적 호응속에서 진행될 수 있었다. 농민들의 수입개방저지투쟁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속성을 다시 한번 각인 시켜준 투쟁이었으며 미국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버리지 않는 한 필연적으로 한국 민중의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투쟁이었다.
5) 90년대와 현재
80년대 까지는 반미 투쟁이 운동권에서만 제기 되었다면 90년대에 들어 와서 점차적으로 공론화가 시작 되었다. 90년대 초의 미군기지 반환 운동은 ‘반미운동의 대중화’의 첫 걸음이라고 할수 있다. 이점에서 정치적 반미운동의 문제와 한계를 넘어선 새로운 반미운동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2000년대에 들어 와서는 더욱 문화적으로 더욱 쟁점화 되기 시작하였다. 기성세대를 넘어선 신세대들의 성장으로 의식의 자유화가 가능해졌음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승희 추모시위
91년 5월 19일. 전남대 여학생 박승희가 20일 간의 병상 생활 끝에 작고했다. 박승희는 그해 4월 29일 전남대 교정에서 열린 ‘고 강경대 열사의 추모 및 노태우정권 퇴진결의 대회’ 에 참여해 반미구호를 외치다가 돌에 맞아 몸을 불살랐다. 강경대는 그보다 사흘 전 반정부 시위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졌다.
강경대, 박승희는 20살 동갑내기 이었다. 박승희는 병상에 누워 분신과 죽음사이에서도 몸 상태가 조금 나아진다 싶으면 손으로 ‘미국놈들 몰아내자’ 라고 썼다.
이러한 박승희와 강경대를 추모하기 위해서 광주에서는 대대적으로 박승희 추모 시위가 열린다. 이시기에 열사했던 박승희와 강경대는 단지 비틀린 한국현대사의 희생자였던 것 만이아니라 그 비틀림을 펼쳐 보려고 노력했던 능동적인 시대정신의 한 주체이기도 하다.
노근리양민 학살대책위원회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이 충북 영동군 노근리 경부선 철도 밑 굴다리에서 400여명을 대상으로 자행 되었다. 미군들은 마을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 무차별적으로 사살하였다. 반세기가 지난 1999년 되어서 그 동안에 감쳐 두었던 부분들이 공개 되기 시작했다. 생존자들의 진술이 이어졌고 또한 터널 안에서 발견되는 생생한 총탄자국이 이를 증명 해주었다. 미 당국은 정확한 사건 규명을 회피하였고 그리하여 각계의 저명한 학자들과 시민단체들이 진상규명을 요청하며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각 통신사를 통해 외국에 알려 졌으며 결국 미국은 노근리 조사단을 꾸려 한국에서의 조사를 시작했다.
이 사건은 그동안 독재정권하에서 감추어 왔던 미군들의 만행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또한 이를 계기로 그동안 보수적이었던 학계도 반미운동을 실천하게 되었다.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안톤오노의 반칙사건
미국의 솔트레이크에서 열린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1500m 남자 경기에서 우리나라의
김동성선수가 2바퀴를 남겨놓고 1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뒤 따라 오던 미국의 오노선수가 김동성선수와 부딪혀 헐리우드 액션을 취하면서 김동성선수의 진로방해를 이끌어 냈다. 1위로 들어온 김동성 선수는 금메달을 오노선수에게 넘겨주고 실격처리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 동안 신세대들에게는 관심 밖이었던 반미운동이 문화적으로 다가 갔다. 인터넷에서는 오노패러디가 넘실 댔으며 이를 계기로 미국영화 안보기, 햄버거 안 먹기 등의 일련의 운동들이 신세대를 축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정치적으로만 느껴오던 반미관계가 이제는 신세대들의 문화적 자부심으로 말미암아 문화적인 충돌로 이어 진 사건이다.
3. 반미감정의 해소 방안과 우리의 발전 방향
반미감정이 한미간의 불평등한 관계에 관한 인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반미운동이 이러한 불평등한 관계한 대한 개선을 지향하고 있는 한 그것은 반미감정이나 반미운동이라고 규정하고 단정지을 수 없다.
지금 까지 밖으로 표출되지 않았던 이러한 반미운동들이 정치적으로 든지 문화적으로든지 표출이 되면서 현재의 대한민국은 굉장히 불안하고 위기라고 일컬어 진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 당연한 것 이다.
반미운동들은 각각의 정황적인 사건들에 대하여 얼마동안 한시적이고 일회적으로 진행이 되어서는 안될 것 이다. 중요한 것은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 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설득력 있게 다가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정확한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사태를 정확하게 평가하고 지향해야 할 것이다. 또한 더 이상 미국을 ‘은혜로운 시혜자’로 바라보거나 그러기를 기대하는 미성숙한 관점도 조금씩 버려가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도 정보를 공개하고 민주적인 토론의 장을 마련하는데 성의를 보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통하여 우리는 더욱 성숙하고 발전하게 될 것이다.
[참고 문헌]
1. 반미가 왜 문제인가? 당대 /홍성태 (2005)
2. 한미동맹 성격변화연구: 구성주의 시각으로, 가톨릭대 국제대학원/조영화 (2005)
3. 80년대 반미 자주화 운동사 /박소정 (1998)
4. 반미감정의 실체와 해소방안, 충남대학교 사회학과/박노영 (2003)
5. 한국의 반미주의: 한국인들의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 원광대학교 정치 외교학과/ 이재봉 (2003)
6. 한미동맹의 재인식, 국방부/조병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