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경제의 대혼란
Ⅱ.중국 문제 Ⅲ. 태평양전쟁
1. 만주사변 1. 제 2차세계대전과 일본
2. 군국주의의 등장 2. 태평양전쟁
3. 중일전쟁 3. 일본의 패전
4. 문화․사상의 통제 맺음말
Ⅱ.중국 문제 Ⅲ. 태평양전쟁
1. 만주사변 1. 제 2차세계대전과 일본
2. 군국주의의 등장 2. 태평양전쟁
3. 중일전쟁 3. 일본의 패전
4. 문화․사상의 통제 맺음말
본문내용
주장했던 스즈키 간타로가 신임수상으로 임명되었다. 7월 미국의 트루먼대통령과 영국의 처칠수상, 소련의 스탈린은 베를린 교외에 있는 포츠담에서 회담을 갖고 일본에 대하여 '무조건항복'을 권고하였다. 1944년 말 이래 미군 함대에 대한 공중 반격의 유일한 가능성은 가미카제(神風)로 알려진 특수 공격대에 달려있었다. 일본정부가 포츠담선언에 대해서 고민하던 중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9일에는 나가사키에 투하하였다. 두 도시는 순식간에 파괴되고 히로시마에서는 20여만명, 나가사키에서는 14만여명이 희생되었다. 8월 8일에 소련은 대일 선전포고를 하였다. 일본 지도자들로 하여금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게끔 촉구하고자 했기 때문일 뿐 아니라 일본 본토에서 획득물을 얻을 길을 열어놓기 위한 행위였다.
이와 같은 타격에도 불구하고 육군 대신과 육해군 참모총장은 강화 요구에 계속 저항하였다. 이에 천황이 개입하여 8월 15일 무조건 항복 결정이 도쿄에서 발표되었다.
이리하여 장기간에 걸친 전쟁의 시대는 끝났다. 일본이 패전에 이르기까지 한국·중국을 비롯한 타국민, 타민족에게 준 고통과 희생은 막대하였다. 15년간의 전쟁으로 다대(多大)한 희생을 입은 아시아 제민족의 희생자수는 20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일본국민이 받은 손해도 엄청났다. 태평양전쟁만으로도 군인·군속의 사망자가 155만명, 부상·행방불명 31만명, 일반국민의 사망도 30만명을 넘었다. 전쟁 말기의 식량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전후 일본국민의 상당수는 기아상태에 빠졌다.
맺음말
1989년 1월 히로히토천황의 죽음은 문자 그대로 한 시대의 종언이었다. 히로히토 천황의 치세와 동일시되었던 시대명(時代名)인 '쇼와(昭和)'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그의 시호(諡號)가 되었다. 대략 평화의 달성이라고 번역되는 '헤이세이(平成)'가 히로히토의 아들 아키히토(明仁)의 시대명으로 채택되었다. 히로히토는 태평양전쟁에 참전한 주요 국가 원수들 중 마지막 생존자였기 때문에 그가 무대에서 사라지고, 그가 관련되었던 쇼와 시대가 사라짐으로써, 많은 일본인들이 잊어버리고 싶어했던 한 시대는 막을 고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세계 곳곳에서는 쓰라린 기억들이 되살아났고, 일본과 맞서 싸웠던 많은 사람들은 자기 나라에서 천황 장례식에 고위급 조문 사절을 파견한 것에 불만을 토로하였다.
지금은 일본의 경제력이 군사력을 대신해서 세계 곳곳에 미치고 있다. 또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한 군사력 또한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고 있다. 아시아국가 뿐만 아니라 세계의 여러 국가들이 긴장하게되는 상황이 또다시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피터 두으스 저, 김용덕 역,《일본근대사》, 지식산업사, 1983.
김희영 엮음,《이야기 일본사》, 청아출판사, 1995.
연민수 편저,《일본역사》, 보고사, 1998.
W.G. 비즐리, 장인성 옮김,《일본 근현대 정치사》, 을유문화사, 1999.
이노우에 키요시, 차광수 역,《일본인이 쓴 일본의 역사》下, 대광서림, 1995.
이와 같은 타격에도 불구하고 육군 대신과 육해군 참모총장은 강화 요구에 계속 저항하였다. 이에 천황이 개입하여 8월 15일 무조건 항복 결정이 도쿄에서 발표되었다.
이리하여 장기간에 걸친 전쟁의 시대는 끝났다. 일본이 패전에 이르기까지 한국·중국을 비롯한 타국민, 타민족에게 준 고통과 희생은 막대하였다. 15년간의 전쟁으로 다대(多大)한 희생을 입은 아시아 제민족의 희생자수는 20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일본국민이 받은 손해도 엄청났다. 태평양전쟁만으로도 군인·군속의 사망자가 155만명, 부상·행방불명 31만명, 일반국민의 사망도 30만명을 넘었다. 전쟁 말기의 식량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전후 일본국민의 상당수는 기아상태에 빠졌다.
맺음말
1989년 1월 히로히토천황의 죽음은 문자 그대로 한 시대의 종언이었다. 히로히토 천황의 치세와 동일시되었던 시대명(時代名)인 '쇼와(昭和)'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그의 시호(諡號)가 되었다. 대략 평화의 달성이라고 번역되는 '헤이세이(平成)'가 히로히토의 아들 아키히토(明仁)의 시대명으로 채택되었다. 히로히토는 태평양전쟁에 참전한 주요 국가 원수들 중 마지막 생존자였기 때문에 그가 무대에서 사라지고, 그가 관련되었던 쇼와 시대가 사라짐으로써, 많은 일본인들이 잊어버리고 싶어했던 한 시대는 막을 고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세계 곳곳에서는 쓰라린 기억들이 되살아났고, 일본과 맞서 싸웠던 많은 사람들은 자기 나라에서 천황 장례식에 고위급 조문 사절을 파견한 것에 불만을 토로하였다.
지금은 일본의 경제력이 군사력을 대신해서 세계 곳곳에 미치고 있다. 또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한 군사력 또한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고 있다. 아시아국가 뿐만 아니라 세계의 여러 국가들이 긴장하게되는 상황이 또다시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피터 두으스 저, 김용덕 역,《일본근대사》, 지식산업사, 1983.
김희영 엮음,《이야기 일본사》, 청아출판사, 1995.
연민수 편저,《일본역사》, 보고사, 1998.
W.G. 비즐리, 장인성 옮김,《일본 근현대 정치사》, 을유문화사, 1999.
이노우에 키요시, 차광수 역,《일본인이 쓴 일본의 역사》下, 대광서림,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