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기독교의 기원
Ⅱ. 기독교의 역사
1. 고대의 기독교
2. 중세의 기독교
3. 문예부흥과 종교개혁
4. 근대의 기독교
Ⅲ. 이슬람교의 어원
Ⅳ. 이슬람교의 특징
Ⅴ. 무함마드
Ⅵ. 코란
Ⅶ. 알라
Ⅷ.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의 정의 비교
1. 일반적 관점
2. 기독교적 관점
3. 이슬람교 관점
Ⅸ. 기독교와 이슬람의 하나님 용어 비교
1. 일반적 관점
1) 하나님 용어의 사용과 그 배경
2) 어원적 배경
2. 기독교적 관점
1) 하나님 용어의 사용과 그 배경
2) 어원적 배경
3. 이슬람교 관점
1) 알라의 등장 배경
2) 어원적 배경
3) 알라의 번역
Ⅹ.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의 개념 비교
1. 기독교의 하나님
1) 삼위일체 하나님
2) 성부 하나님
3) 성자 하나님
4) 성령 하나님
2. 이슬람교의 하나님
Ⅺ. 신의 개념 차이 비교
1. 아담과 하와의 범죄
2.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인가
3.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
4. 성령
Ⅻ.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1
1. 신학적 이견(異見)
1) 동방교회의 이슬람관(觀)
2) 서방교회의 이슬람 연구
2. 정치․군사적 적대관계
1) 이슬람의 팽창
2) 십자군 원정
3) 비잔틴제국의 멸망
4) 마르틴 루터와 터키교
ⅩⅢ.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2
1. 기독교 후손과 이슬람교 후손과의 갈등의 성경적근거
2.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문제
Ⅱ. 기독교의 역사
1. 고대의 기독교
2. 중세의 기독교
3. 문예부흥과 종교개혁
4. 근대의 기독교
Ⅲ. 이슬람교의 어원
Ⅳ. 이슬람교의 특징
Ⅴ. 무함마드
Ⅵ. 코란
Ⅶ. 알라
Ⅷ.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의 정의 비교
1. 일반적 관점
2. 기독교적 관점
3. 이슬람교 관점
Ⅸ. 기독교와 이슬람의 하나님 용어 비교
1. 일반적 관점
1) 하나님 용어의 사용과 그 배경
2) 어원적 배경
2. 기독교적 관점
1) 하나님 용어의 사용과 그 배경
2) 어원적 배경
3. 이슬람교 관점
1) 알라의 등장 배경
2) 어원적 배경
3) 알라의 번역
Ⅹ.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의 개념 비교
1. 기독교의 하나님
1) 삼위일체 하나님
2) 성부 하나님
3) 성자 하나님
4) 성령 하나님
2. 이슬람교의 하나님
Ⅺ. 신의 개념 차이 비교
1. 아담과 하와의 범죄
2.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인가
3.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
4. 성령
Ⅻ.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1
1. 신학적 이견(異見)
1) 동방교회의 이슬람관(觀)
2) 서방교회의 이슬람 연구
2. 정치․군사적 적대관계
1) 이슬람의 팽창
2) 십자군 원정
3) 비잔틴제국의 멸망
4) 마르틴 루터와 터키교
ⅩⅢ.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2
1. 기독교 후손과 이슬람교 후손과의 갈등의 성경적근거
2.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문제
본문내용
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에서 낳은 이스마엘 족속은 상속권이 없고 이삭에게서 상속권이 있다. 그래서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계속적인 끊임없는 갈등이 지속된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도 그러하다. 즉, 물과 기름이 섞일수 없는 영원한 갈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성경적인 갈등의 성경적 증거이다.
2.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문제
중동지역은 7세기 이후 이슬람이 출현하면서 하나의 이슬람 공통문화권이 되었지만 7세기 이전에는 여러 다양한 기독교 문화와 부족들이 함께 존재하였던 기독교 문화권지역이다. 지리적으로도 사막이라는 공통된 환경속에서 여러 다양한 유목민족들이 공존하였던 지역이다. 유태인,팔레스타인,아랍인,아시리아인,바빌로니아인,이집트인,페르시아인,그리스인,로마인.영국인 등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지배한 복잡한 역사환경을 가지고 있다.그리고 아랍민족과 유대민족은 원래 같은 성서의 백성이었다. 이들은 모두 예언자 아브라함의 자손이었다. 구약과 코란에는 아브라함이 두 민족의 공동 조상으로 묘사되어 있다.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어 본부인 사라의 동의를 얻어 종인 하갈과 혼인하여 이스마일을 낳았다. 신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한후 사라에게 성령이 부여되어 이삭이 태어넜다. 이삭은 유대 민족의 조상으로 후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켰으며. 이스마일은 아랍 민족의 조상으로 무함마드를 탄생 시켰다.이런 역사적 유사성을 가진 두 민족이 갈등을 겪게 된 원인은 바로 서구 기독교가 제공하였다. 기원전 7세기에 앗시리아로부터 영토를 빼앗긴 뒤 1948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독립국을 건설할때까지 유대 민족은 2000년간 유랑생활을 해왔다. 그들이 유랑생활을 하며 박해,고문,차별을 받았던 지역은 기독교권 유럽이었다. 313년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부터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까지 유럽에서 유대인은 악마와 동일시되었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유대인의 위상을 향상되었으나, 유럽 기독교인의 반 유대감정은 뿌리 깊게 박혀있였다. 유대인들은 14세기에 발생한 페스트의 원인으로 간주되어 대거 학살당했으며, 마녀사냥의 1차 희생양이었다. 유대인에 대한 유럽의 편견은 히틀러의 대학살과 러시아 황제의 폭탄 테러 사건으로 점점 증폭되어 1894년 프랑스의 드레퓌시 대위 사건으로 정점에 달했다. 이런 일련의 반 유대인 감정으로 유대인들은 1897년 스위스에서 세계유대인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여기에서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시오니즘이 채택되었다. 당시 유럽의 상황에서 유대 국가 수립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은 유대인들에게좋은 기회를 제공하였다.
당시 아랍세계를 지배했던 오스만 터키는 독일에 가담하여 영국을 위협하였다. 영국은 1915년 아랍 민족을 전쟁에 끌어들였다. 하지만 이슬람 제국인 오스만 터키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아랍 민족이 이슬람 국가로서 영국에 지하드를 선포한 상태에서 종교적으로 영국을 지원하기란 힘든상황이었다. 이에 영국은 독립국가의 보장이라는 약속으로 아랍민족을 전쟁에 끌어들였으며,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파견하여 남부 전선에서 승리하였다.
한편 영국은 중부 전선에서 독일을 공략하기 위해 유대인들도 끌어들였으며, 이들에게도 독립국가 건설을 약속하였다. 이것이 바로 1917년의 발포아 선언이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1916년 사이크스-피코 조약을 체결하고 시리아와 쿠웨이트를 연결하여 북쪽은 프랑스 남쪽은 영국이 관할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팔레스타인은 영국이 차지하게 되었다. 겨룩 영국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아랍민족과 유대인 그리고 프랑스와 3중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중동 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이런 영국의 비도덕적이고 반윤리적인 행위로 중동지역에서는 폭격과 희생과 보복의 악순환이 거듭되고있다.
유대인들이 유럽에서 박해를 받았던 2000년 동안 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평화롭게 생활하고 있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럽의 유대인들은 시오니즘을 실현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으로 대거 이동하였다.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에 평화롭게 거주하던 아랍인들은 난민 신세로 전락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유대인은 1948년 미국의 후원 하에 팔레스타인땅에 독립국가 이스라엘을 건설하였다. 이로 인해 이집트로 쫓겨났던 팔레스타인 아립인들은 1차 중동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아랍은 패배하였다. 1956년 아랍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이집트의 낫세르가 2차 중동전쟁을 일으켰다.이 전쟁에서도 아랍은 패배하였다. 1967년 수에즈운하 분쟁을 계기로 3차 중동전쟁, 일명 6일 전쟁이 발생하였다. 이 전쟁에서 아랍은 참패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중동 영토 분쟁의 불씨가 된 사나이 반도, 가자지구,요르단강 서안, 그리고 골란 고원지역을 점령당했다. 이에 유엔안보리가 이스라엘의 즉각 철수를 결의했지만 이스라엘은 미국과 서구의 조직적인 지원 하에 지금까지 이를 무시하고 있다. 1974년 전쟁은 석유가 무기화 된 경제 전쟁이었다. 4차례의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아랍진영은 여지없이 자존심을 구기고 말았다. 아랍인들은 전쟁에서 패한 원인이 미국의 대 이스라엘 원조와 일방적 지원 때문이라고 간주하였으며, 이로 인한 미국과 서구에 대한 아랍인의 반감을 더욱 증폭되었다.
이러한 역사적,정치적 배경에도 불고하고, 아랍과 이스라엘간의 국제 분쟁에서 미국과 서구는 아랍.이슬람 세계에 대해서는 폭격, 경제제재,무역봉쇄, 군사적 보복 등 철저한 응징으로 대응하면서도, 50년 동안 유엔결의안을 준수하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재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아랍.이슬람 세계가 미국이나 서구에 대해 반발하고 적대감을 갖는 것이 당연한 일로 간주되고 있다. 물론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 중 극히 일부분이 행하고 있는 극단적인 테러나 폭력까지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이슬람에서 극단주의 세력은 5%이하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아랍.이슬람 세계의 거의 대부분은 미국이나 서구와 공존과 협력 그리고 평화를 원하고 있다. 평화와 형제애는 이슬람의 기본 정신이다.
2.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문제
중동지역은 7세기 이후 이슬람이 출현하면서 하나의 이슬람 공통문화권이 되었지만 7세기 이전에는 여러 다양한 기독교 문화와 부족들이 함께 존재하였던 기독교 문화권지역이다. 지리적으로도 사막이라는 공통된 환경속에서 여러 다양한 유목민족들이 공존하였던 지역이다. 유태인,팔레스타인,아랍인,아시리아인,바빌로니아인,이집트인,페르시아인,그리스인,로마인.영국인 등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지배한 복잡한 역사환경을 가지고 있다.그리고 아랍민족과 유대민족은 원래 같은 성서의 백성이었다. 이들은 모두 예언자 아브라함의 자손이었다. 구약과 코란에는 아브라함이 두 민족의 공동 조상으로 묘사되어 있다.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어 본부인 사라의 동의를 얻어 종인 하갈과 혼인하여 이스마일을 낳았다. 신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한후 사라에게 성령이 부여되어 이삭이 태어넜다. 이삭은 유대 민족의 조상으로 후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켰으며. 이스마일은 아랍 민족의 조상으로 무함마드를 탄생 시켰다.이런 역사적 유사성을 가진 두 민족이 갈등을 겪게 된 원인은 바로 서구 기독교가 제공하였다. 기원전 7세기에 앗시리아로부터 영토를 빼앗긴 뒤 1948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독립국을 건설할때까지 유대 민족은 2000년간 유랑생활을 해왔다. 그들이 유랑생활을 하며 박해,고문,차별을 받았던 지역은 기독교권 유럽이었다. 313년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부터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까지 유럽에서 유대인은 악마와 동일시되었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유대인의 위상을 향상되었으나, 유럽 기독교인의 반 유대감정은 뿌리 깊게 박혀있였다. 유대인들은 14세기에 발생한 페스트의 원인으로 간주되어 대거 학살당했으며, 마녀사냥의 1차 희생양이었다. 유대인에 대한 유럽의 편견은 히틀러의 대학살과 러시아 황제의 폭탄 테러 사건으로 점점 증폭되어 1894년 프랑스의 드레퓌시 대위 사건으로 정점에 달했다. 이런 일련의 반 유대인 감정으로 유대인들은 1897년 스위스에서 세계유대인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여기에서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시오니즘이 채택되었다. 당시 유럽의 상황에서 유대 국가 수립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은 유대인들에게좋은 기회를 제공하였다.
당시 아랍세계를 지배했던 오스만 터키는 독일에 가담하여 영국을 위협하였다. 영국은 1915년 아랍 민족을 전쟁에 끌어들였다. 하지만 이슬람 제국인 오스만 터키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아랍 민족이 이슬람 국가로서 영국에 지하드를 선포한 상태에서 종교적으로 영국을 지원하기란 힘든상황이었다. 이에 영국은 독립국가의 보장이라는 약속으로 아랍민족을 전쟁에 끌어들였으며,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파견하여 남부 전선에서 승리하였다.
한편 영국은 중부 전선에서 독일을 공략하기 위해 유대인들도 끌어들였으며, 이들에게도 독립국가 건설을 약속하였다. 이것이 바로 1917년의 발포아 선언이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1916년 사이크스-피코 조약을 체결하고 시리아와 쿠웨이트를 연결하여 북쪽은 프랑스 남쪽은 영국이 관할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팔레스타인은 영국이 차지하게 되었다. 겨룩 영국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아랍민족과 유대인 그리고 프랑스와 3중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중동 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이런 영국의 비도덕적이고 반윤리적인 행위로 중동지역에서는 폭격과 희생과 보복의 악순환이 거듭되고있다.
유대인들이 유럽에서 박해를 받았던 2000년 동안 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평화롭게 생활하고 있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럽의 유대인들은 시오니즘을 실현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으로 대거 이동하였다.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에 평화롭게 거주하던 아랍인들은 난민 신세로 전락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유대인은 1948년 미국의 후원 하에 팔레스타인땅에 독립국가 이스라엘을 건설하였다. 이로 인해 이집트로 쫓겨났던 팔레스타인 아립인들은 1차 중동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아랍은 패배하였다. 1956년 아랍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이집트의 낫세르가 2차 중동전쟁을 일으켰다.이 전쟁에서도 아랍은 패배하였다. 1967년 수에즈운하 분쟁을 계기로 3차 중동전쟁, 일명 6일 전쟁이 발생하였다. 이 전쟁에서 아랍은 참패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중동 영토 분쟁의 불씨가 된 사나이 반도, 가자지구,요르단강 서안, 그리고 골란 고원지역을 점령당했다. 이에 유엔안보리가 이스라엘의 즉각 철수를 결의했지만 이스라엘은 미국과 서구의 조직적인 지원 하에 지금까지 이를 무시하고 있다. 1974년 전쟁은 석유가 무기화 된 경제 전쟁이었다. 4차례의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아랍진영은 여지없이 자존심을 구기고 말았다. 아랍인들은 전쟁에서 패한 원인이 미국의 대 이스라엘 원조와 일방적 지원 때문이라고 간주하였으며, 이로 인한 미국과 서구에 대한 아랍인의 반감을 더욱 증폭되었다.
이러한 역사적,정치적 배경에도 불고하고, 아랍과 이스라엘간의 국제 분쟁에서 미국과 서구는 아랍.이슬람 세계에 대해서는 폭격, 경제제재,무역봉쇄, 군사적 보복 등 철저한 응징으로 대응하면서도, 50년 동안 유엔결의안을 준수하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재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아랍.이슬람 세계가 미국이나 서구에 대해 반발하고 적대감을 갖는 것이 당연한 일로 간주되고 있다. 물론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 중 극히 일부분이 행하고 있는 극단적인 테러나 폭력까지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이슬람에서 극단주의 세력은 5%이하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아랍.이슬람 세계의 거의 대부분은 미국이나 서구와 공존과 협력 그리고 평화를 원하고 있다. 평화와 형제애는 이슬람의 기본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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