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사 담론의 형식적 주체로서의 화자
2. 읽혀지는 목소리와 들려지는 목소리
3. 화자의 진정한 정체
4. 근본적인 두 가지 유형의 발화 형식
5. 마무리 혹은 작가의 복권
2. 읽혀지는 목소리와 들려지는 목소리
3. 화자의 진정한 정체
4. 근본적인 두 가지 유형의 발화 형식
5. 마무리 혹은 작가의 복권
본문내용
다. 이론에 함몰하는 일은 노력의 진정한 명분과 효용을 때로 회의케 만드는 의외의 결과를 초래시킬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근년에 두드러져 보이는 서사학의 정체와 답보도 그러한 경우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서사학과 서사 이론은 흔히 서사 텍스트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분석하기 위한 수단이자 도구라고 주장해 왔다. 그 같은 주장에는 모순과 함정이 숨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서사 텍스트를 단지 객관적으로 인식만 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는 충분하면서도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것은 또 다른 목적에 접근하기 위한 과정, 혹은 진정한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아야 옳다. 또 다른 혹은 진정한 목적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목적인가? 필자는 그것을 평이하게 서사 텍스트의 충실한 심미적 수용이라고 얼버무려 두겠다. 서사 이론이 서사 텍스트의 충실한 심미적 수용을 위한 수단으로 기능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기능을 압도하거나 억압하게 될 때 그 같은 이론의 존재 명분과 효용이 변호될 여지는 축소된다고 보아야 한다. 소설을 포함하는 모든 심미적 서사물은, 너무나 소박하고 뻔한 내용이라서 말하기가 몹시 주저되지만, 여타의 소통의 형식과는 종류가 다른 소통의 형식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일이다.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즐김을 매개하는 소통의 형식이다.
따라서 서사 이론이 단지 서사 텍스트의 구조를 해명하는 일로 자족해서는 충분하지 않다. 서사학과 서사 이론 역시 서사적 소통의 본질적인 명분에 기여해서 나쁠 이유가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5. 마무리 혹은 작가의 복권
필자는 이 글에서 매우 한정된 문제에 초점을 두고 논의를 진행해왔다. 한정된 문제란 바로 언어 서사에서 화자를 인식하는 문제를 가리킨다. 종래의 서사 이론은 화자를 텍스트의 형식적 자질로 보고 있지만 필자는 그 같은 형식적 관점은 실질적 관점으로 대치됨이 옳다고 주장한 셈이다. 실질적 관점에서 살필 때 화자란 다름 아닌 담론을 수행하는 주체-작가 자신임이 드러난다.
우리 마누라는 누가 보든지 뭐 이쁘다고는 안 할 것이다. 바로 계집에 환장한 놈이 있다면 모르거니와. 나도 일상 같이 지내긴 하나 아무리 잘 고쳐보아도 요만치도 이쁘지 않다.
하지만 계집이 낯짝이 이뻐 맛이냐.
제기랄 황소같이 아들만 줄대 잘 빠쳐 놓으면 그만이지.
-김유정, [안해]
인용한 것은 미메시스적 서사 담론의 우월성에 대한 신념을 일거에 무력화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감칠맛 나는 흥미진진한 김유정의 서사적 진술이다.
그런데 종래의 서사 이론을 곧이곧대로 적용하면 이 개성에 넘치는 입담은 가공된 인물 '나'의 말솜씨가 된다. 왜냐하면 이 서사적 문맥에서의 '나'는 실제 작가 '나'가 아니고 허구화된 '나'라고 보아야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용된 서사 담론을 뒤쫓는 일에서 흥취와 즐거움을 만끽한 독자가 자신의 허무와 권태를 달래주고 자신의 삶에 활력을 회복시켜준 누군가에게 넘치는 감사와 경배의 마음을 표시하고자 한다면 논리상 그 대상은 마땅히 가공의 인물인 화자 '나'가 되어야 한다. 필자는 이것은 넌센스라고 생각한다. 현대의 서사 이론은, 도대체 무슨 원한 때문인지, 한결같이 작가의 존재를 외면하고 무시하는 쪽으로만 전개되어 왔다. 이론가들은 작가를 도외시하고 능멸하는 일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드디어는 작가들을 모두 처형장으로 내몰아버리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합쳐 작가들은 모두 죽었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말장난을 위장하고 논리의 허구를 감추기 위해 만들어낸 존재가 화자라는 유령이다. 유령을 내세워야만 하는 사정의 불가피성은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다. 언어적 진술이 있는 곳에 언어적 진술의 주체가 없을 수 없다. 그리하여 작가를 추방함으로써 생긴 공백을 유령을 내세워 메꾼 것이다.
화자의 신원이 말하기의 주체가 아닌 글쓰기의 주체라는 주장은 문학의 현장에서 실권되고 추방된 작가를 서사 텍스트 생산의 주체로 복권시키고자 하는 의도와 무관하지 않다. 김유정의 소설이 흥미 있게 읽히는 것은 김유정 소설의 화자가 흥미 있게 이야기한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김유정 소설의 실질적인 담론의 주체-김유정 자신이 흥미있는 서사 담론을 수행한 결과이다.
W. 마틴은 애초에는 서간체로 시도되었으나 3인칭 서술로 바꿈으로써 {기지와 정서(Sense and Sensibility)}가 독자에게 널리 회자되게 된 사례를 들고 있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제인 오스틴이 한 역할은 단지 시점을 바꾼 것이 아니다.
그녀는 바로 그 소설을 가장 흥미 있게 읽힐 수 있도록 담론화한 장본인이다. 그는 아울러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작중 인물 허크에 의해 진술되지 않고 작가 시점으로 진술되었을 경우도 가정해 보고 있다. 그랬더라면 그 소설은 {톰소여의 모험} 만큼도 재미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는 단정한다. 제인 오스틴에게 적용되었던 논리가 마크 트웨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즉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톰소여의 모험}보다 재미있는 소설로 만든 것은 그 소설의 형식적 명분인 화자가 아니고 그 소설의 실제 작가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가령 김유정의 [안해]가 수다스럽기는 하지만 개성에 넘치는 방언(idiolect)을 구사하는 화자에 의해서가 아니고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는 발화의 방식으로 서술되었다면 그 소설의 흥미의 양상은 판이해지고 말았을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결과를 막은 것은 바로 작가 김유정이다.
사실상 화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일인칭 서술이라 불리든 삼인칭 서술이라 불리든, 혹은 개입적 서술이라 불리든 비개입적 서술이라 불리든 서사 담론을 실질적으로 수행하는 주체 곧 작가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의 지적이 제안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서사 텍스트를 소통의 형식이라는 제한된 측면에서만 문제 삼아왔던 종래의 폐쇄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서사학의 논의의 영역을 서사 텍스트의 생산과 수용의 문제로까지 확대하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되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시학이 그간 금기로 여겨왔던 비평에 대한 배타적인 관계를 청산하는 일이다.
따라서 서사 이론이 단지 서사 텍스트의 구조를 해명하는 일로 자족해서는 충분하지 않다. 서사학과 서사 이론 역시 서사적 소통의 본질적인 명분에 기여해서 나쁠 이유가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5. 마무리 혹은 작가의 복권
필자는 이 글에서 매우 한정된 문제에 초점을 두고 논의를 진행해왔다. 한정된 문제란 바로 언어 서사에서 화자를 인식하는 문제를 가리킨다. 종래의 서사 이론은 화자를 텍스트의 형식적 자질로 보고 있지만 필자는 그 같은 형식적 관점은 실질적 관점으로 대치됨이 옳다고 주장한 셈이다. 실질적 관점에서 살필 때 화자란 다름 아닌 담론을 수행하는 주체-작가 자신임이 드러난다.
우리 마누라는 누가 보든지 뭐 이쁘다고는 안 할 것이다. 바로 계집에 환장한 놈이 있다면 모르거니와. 나도 일상 같이 지내긴 하나 아무리 잘 고쳐보아도 요만치도 이쁘지 않다.
하지만 계집이 낯짝이 이뻐 맛이냐.
제기랄 황소같이 아들만 줄대 잘 빠쳐 놓으면 그만이지.
-김유정, [안해]
인용한 것은 미메시스적 서사 담론의 우월성에 대한 신념을 일거에 무력화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감칠맛 나는 흥미진진한 김유정의 서사적 진술이다.
그런데 종래의 서사 이론을 곧이곧대로 적용하면 이 개성에 넘치는 입담은 가공된 인물 '나'의 말솜씨가 된다. 왜냐하면 이 서사적 문맥에서의 '나'는 실제 작가 '나'가 아니고 허구화된 '나'라고 보아야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용된 서사 담론을 뒤쫓는 일에서 흥취와 즐거움을 만끽한 독자가 자신의 허무와 권태를 달래주고 자신의 삶에 활력을 회복시켜준 누군가에게 넘치는 감사와 경배의 마음을 표시하고자 한다면 논리상 그 대상은 마땅히 가공의 인물인 화자 '나'가 되어야 한다. 필자는 이것은 넌센스라고 생각한다. 현대의 서사 이론은, 도대체 무슨 원한 때문인지, 한결같이 작가의 존재를 외면하고 무시하는 쪽으로만 전개되어 왔다. 이론가들은 작가를 도외시하고 능멸하는 일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드디어는 작가들을 모두 처형장으로 내몰아버리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합쳐 작가들은 모두 죽었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말장난을 위장하고 논리의 허구를 감추기 위해 만들어낸 존재가 화자라는 유령이다. 유령을 내세워야만 하는 사정의 불가피성은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다. 언어적 진술이 있는 곳에 언어적 진술의 주체가 없을 수 없다. 그리하여 작가를 추방함으로써 생긴 공백을 유령을 내세워 메꾼 것이다.
화자의 신원이 말하기의 주체가 아닌 글쓰기의 주체라는 주장은 문학의 현장에서 실권되고 추방된 작가를 서사 텍스트 생산의 주체로 복권시키고자 하는 의도와 무관하지 않다. 김유정의 소설이 흥미 있게 읽히는 것은 김유정 소설의 화자가 흥미 있게 이야기한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김유정 소설의 실질적인 담론의 주체-김유정 자신이 흥미있는 서사 담론을 수행한 결과이다.
W. 마틴은 애초에는 서간체로 시도되었으나 3인칭 서술로 바꿈으로써 {기지와 정서(Sense and Sensibility)}가 독자에게 널리 회자되게 된 사례를 들고 있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제인 오스틴이 한 역할은 단지 시점을 바꾼 것이 아니다.
그녀는 바로 그 소설을 가장 흥미 있게 읽힐 수 있도록 담론화한 장본인이다. 그는 아울러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작중 인물 허크에 의해 진술되지 않고 작가 시점으로 진술되었을 경우도 가정해 보고 있다. 그랬더라면 그 소설은 {톰소여의 모험} 만큼도 재미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는 단정한다. 제인 오스틴에게 적용되었던 논리가 마크 트웨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즉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톰소여의 모험}보다 재미있는 소설로 만든 것은 그 소설의 형식적 명분인 화자가 아니고 그 소설의 실제 작가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가령 김유정의 [안해]가 수다스럽기는 하지만 개성에 넘치는 방언(idiolect)을 구사하는 화자에 의해서가 아니고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는 발화의 방식으로 서술되었다면 그 소설의 흥미의 양상은 판이해지고 말았을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결과를 막은 것은 바로 작가 김유정이다.
사실상 화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일인칭 서술이라 불리든 삼인칭 서술이라 불리든, 혹은 개입적 서술이라 불리든 비개입적 서술이라 불리든 서사 담론을 실질적으로 수행하는 주체 곧 작가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의 지적이 제안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서사 텍스트를 소통의 형식이라는 제한된 측면에서만 문제 삼아왔던 종래의 폐쇄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서사학의 논의의 영역을 서사 텍스트의 생산과 수용의 문제로까지 확대하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되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시학이 그간 금기로 여겨왔던 비평에 대한 배타적인 관계를 청산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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