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국립 3.15 묘지 입구에서>
<국립묘지에서 찍은 사진 - 학생 시위 장면>
<시위에 참가한 여학생들>
<어깨 동무를 매고서 시위를 하는 학생들>
<국립묘지의 비>
<국립묘지에서 찍은 사진 - 학생 시위 장면>
<시위에 참가한 여학생들>
<어깨 동무를 매고서 시위를 하는 학생들>
<국립묘지의 비>
본문내용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가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어머니 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요. 온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하여 주세요.”
고등학생들은 당시 전국적으로 이로 말할 수 없었다. 1960년 2월 28일, 경북고등학교를 비롯한 대구 시내고교생들, 대구고, 경북 사대부고, 대구 상고, 대구여고는
인류 역사 이래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가. 근세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느 역사책 속에 끼어 있었던가... 우리는 배움에 불타는 신성한 각오와 장차 동아를 짊어지고 나갈 꿋꿋한 역군이요 사회악에 물들지 않은 백합같이 순결한 청춘이요.!!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이러한 발표문과 함께 대전에서는 대전 상고 300여명이 , 수원에서는 수원농고 300여명이, 충주에서는 충주고 1,2학년 300여명이 시위를 벌였고 부산 해동고, 동래고 ,혜화여고 문경고,영남상고, 데레사 여고의 송도고, 포항고, 마산고 중앙고 창신고 휘문고 남녀 학생들이 팔짱을 끼고, 혹은 어깨동무를 한 채 지칠 줄 모르게 시위와 흩어짐을 반복했다.
<시위에 참가한 여학생들>
후에 대학들은 여러 날 전부터 학교별 은밀한 시위를 준비해왔다. 서울에는 연세대, 서울대, 건국대, 중앙대, 경희대, 성균관대, 동국대 등등의 학교들이 시위에 참가했다.
시인 신동문은 ‘아! 신화같이 전진하는 다비데군들’ 이라는 시에서 그때의 광경을 묘사한다.
마지막 발악하는
총구의 몸부림
광무하는 칼날에도
일사분란 해일처럼 해일처럼
밀고가는 스크림
승리의 기를 꽂은
악의 심장 위소를 향하여
아- 신화같이
전진하는 다비데군들
<어깨 동무를 매고서 시위를 하는 학생들>
내가 살펴본 이러한 학생들의 시위는 정말로 상상하지도 못할 것들이었다.
81년에 태어나 이러한 격렬한 시위를 보지 못했기에 상상 못하는 건 당연하다.
오늘날에 한명의 대학생으로서 많이 부끄럽다 그러나, 여기서 확인해야 할 점은 3.15 의거부터 4.19 까지의 짧지만 기나긴 장정동안 철저히 목소리를 외쳤던 많은 시민들과 함께한 이들이 바로 우리네 학생들이었다는 사실인 것이다.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 ‘이승만 독재정권’, ‘학생운동’, ‘민주주의는 죽었다’ 이러한 말들은 낯설기만 했다. 스치듯이, 고등학교 국사시간 중학교 때도 의식은 있었으나 느끼지 못한 까막눈의 현실은 2005년의 그 기억을 뼈저리게 되살리게 되었다. 또한 마산의 중고등학교 학생들, 시민들 심지어 초등학생까지도 이 어찌 글로 표현 할 수 있으리라.
<국립묘지의 비>
내가 그 당시에 태어났더라면, 머리카락 같은 존재도 될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모여 온전한 모발이 서듯이 거기서 미약한 한 사람 한 사람이었지만 끝내 우리에게 민주주의를 안겨준 이들 너무나도 고마우며 애도함을 바치고 싶다. 3.15운동과 같은 이러한 일들은 아마도 우리가 나라의 주인이라는 자긍심과 올바른 민주주의 내세우기 위한 국민들의 사명이 있었기에 꿈의 실현이 가능했으리라 본다.........
* 참고 : 1960년 4대 정부통령선거(3.15) -> 4.19 시민 혁명 시작 -> 전국 대학교 교수단 시국 선언문 발표(4.25) -> 이승만 하야(4.26) -> 과도 내각 구성 (4.28) -> 대한교원노종조합연합회 결성(5.22) -> 이승만 하와이로 망명(5.29) -> 전국은행노동조합연합회 결성(7.23) -> 민의원참의원 총선거(7.29)
고등학생들은 당시 전국적으로 이로 말할 수 없었다. 1960년 2월 28일, 경북고등학교를 비롯한 대구 시내고교생들, 대구고, 경북 사대부고, 대구 상고, 대구여고는
인류 역사 이래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가. 근세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느 역사책 속에 끼어 있었던가... 우리는 배움에 불타는 신성한 각오와 장차 동아를 짊어지고 나갈 꿋꿋한 역군이요 사회악에 물들지 않은 백합같이 순결한 청춘이요.!!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이러한 발표문과 함께 대전에서는 대전 상고 300여명이 , 수원에서는 수원농고 300여명이, 충주에서는 충주고 1,2학년 300여명이 시위를 벌였고 부산 해동고, 동래고 ,혜화여고 문경고,영남상고, 데레사 여고의 송도고, 포항고, 마산고 중앙고 창신고 휘문고 남녀 학생들이 팔짱을 끼고, 혹은 어깨동무를 한 채 지칠 줄 모르게 시위와 흩어짐을 반복했다.
<시위에 참가한 여학생들>
후에 대학들은 여러 날 전부터 학교별 은밀한 시위를 준비해왔다. 서울에는 연세대, 서울대, 건국대, 중앙대, 경희대, 성균관대, 동국대 등등의 학교들이 시위에 참가했다.
시인 신동문은 ‘아! 신화같이 전진하는 다비데군들’ 이라는 시에서 그때의 광경을 묘사한다.
마지막 발악하는
총구의 몸부림
광무하는 칼날에도
일사분란 해일처럼 해일처럼
밀고가는 스크림
승리의 기를 꽂은
악의 심장 위소를 향하여
아- 신화같이
전진하는 다비데군들
<어깨 동무를 매고서 시위를 하는 학생들>
내가 살펴본 이러한 학생들의 시위는 정말로 상상하지도 못할 것들이었다.
81년에 태어나 이러한 격렬한 시위를 보지 못했기에 상상 못하는 건 당연하다.
오늘날에 한명의 대학생으로서 많이 부끄럽다 그러나, 여기서 확인해야 할 점은 3.15 의거부터 4.19 까지의 짧지만 기나긴 장정동안 철저히 목소리를 외쳤던 많은 시민들과 함께한 이들이 바로 우리네 학생들이었다는 사실인 것이다.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 ‘이승만 독재정권’, ‘학생운동’, ‘민주주의는 죽었다’ 이러한 말들은 낯설기만 했다. 스치듯이, 고등학교 국사시간 중학교 때도 의식은 있었으나 느끼지 못한 까막눈의 현실은 2005년의 그 기억을 뼈저리게 되살리게 되었다. 또한 마산의 중고등학교 학생들, 시민들 심지어 초등학생까지도 이 어찌 글로 표현 할 수 있으리라.
<국립묘지의 비>
내가 그 당시에 태어났더라면, 머리카락 같은 존재도 될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모여 온전한 모발이 서듯이 거기서 미약한 한 사람 한 사람이었지만 끝내 우리에게 민주주의를 안겨준 이들 너무나도 고마우며 애도함을 바치고 싶다. 3.15운동과 같은 이러한 일들은 아마도 우리가 나라의 주인이라는 자긍심과 올바른 민주주의 내세우기 위한 국민들의 사명이 있었기에 꿈의 실현이 가능했으리라 본다.........
* 참고 : 1960년 4대 정부통령선거(3.15) -> 4.19 시민 혁명 시작 -> 전국 대학교 교수단 시국 선언문 발표(4.25) -> 이승만 하야(4.26) -> 과도 내각 구성 (4.28) -> 대한교원노종조합연합회 결성(5.22) -> 이승만 하와이로 망명(5.29) -> 전국은행노동조합연합회 결성(7.23) -> 민의원참의원 총선거(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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