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 숟가락하나 줄거리 요약및 작가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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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지상에 숟가락하나 줄거리 요약및 작가소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되었다. 나는 이듬해 부쩍부쩍 크기 시작했다.
성장에 바빴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시간이 아이곁을 흘러간것이 아니라 아이 편에서 능동적으로 달려가 시간이 맞았을 것이다.
전쟁이 여러달째 계속되면서 읍내는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소형 전투기들이 벌이는 기총소사 연습광경이다. 전력 사용량이 늘어난 것도 또하나의 변화였다. 이제 피난민들은 학교뿐만 아니라 동네에서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은 어른들과 달리 피난온 아이들과 잘 어울려 놀았다. 송이와 형식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표준어를 써서 우리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제 과거는 어른들의 우울한 침묵속에나 있을 뿐이었다. 과거의 흔적은 점차 사라지고 우리들은 흔적중 탄피를 모으곤 했다. 미개의 밤은 언제나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특히 아기 무덤에서 들려오는 고양이 울음소리는 소름끼쳤다. 어머니를 마중나갔는데 빨리 들어오시지 않아 걱정이되어 한걸음 한걸음 어머니 있는곳으로 발걸음을 내딛기도했다.
나의 어렸을적 기억은 모두 진실은 아니다. 이 시점에서 그 기억을 다 살린다는 것은 무지 어려운 일이다. 이제 내 몸의 세포하나하나가 노화되고 있다. 쉽게 아물지 않는 상처를 봐서도 노화를 알 수 있다. 몸이 좋지 않은데도 나는 취객의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술은 내 피를 따뜻하게 데워주고 옛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몇 년전 고향에 내려갔을때 돌패기를 만났다. 어렸을 적 같이 놀던 때를 생각하니 지금 돌패기의 모습은 늙어 쓸쓸함까지 묻어났다. 제주도는 자연이 풍부한곳으로 대지가 강한 만큼 인간의 자부심 또한 완강했다. 자연은 내게 이중의 성격, 우울증을 달랠수 없었던 지난날의 내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하구쪽 선반물에서 놀던 우리는 용두암 근처의 용연으로 진출하였는데 용연으로 가는 선반물의 풍경에 정신이 팔리곤 했다. 한내의 병문내의 선반물처럼 하구에 담수와 해수가 만나는 크고 깊은 못을 용연이라 했다. 성장함에 따라 놀이 무대는 병문내 웅덩이 물에서 하구의 선반물로 마침내 용연이 마련해 놓은 성장의 여러 단계를 밟아가기 시작했다.
그 시절 물놀이에 미쳐 종일 바닷가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그런데 다이빙만은 젬병이였다.
다이빙을 성공하기위해서 갖은 노력을 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궁핍하던 그 시절 늦여름이면 조밭에 가뭄이 들고 더위 또한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지겨운 더위의 가뭄 끝에 드디어 비가 온다. 매말랐던 우리들은 비바람에 희열을 느끼며 그 자연현상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놀이 감이 되었다. 폭풍우가 지나간 후 아름다운 아침 간밤의 바람은 사라져버리고 햇쌀로 인해 가슴속의 우울한 그림자가 사라졌다.
폭풍의 밤이 무서웠던 어린 시절 밤이 물러간 뒤 새아침은 주위의 자연의 울부짖음으로써 내게 다가왔다. 삶이란 궁극적으로 아침에 의해 격려 받고 아침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리라. 큰 바람이 치고 난 이튿날의 기쁨은 정오쯤부터 시작되는 파도타기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런데 즐거운 파도타기의 한쪽에 큰 불행이 있었다. 너무 지나치게 놀은 나머지 놀던 아이 중 장수가 파도에 휩쓸려 익사하고만 것이다. 무서움과 함께 자책감이 떨었다.
장수를 잃은 충격으로 그 후 얼마 안되어 송이네 식구는 부산으로 이사를 가버렸다.
어린아이는 슬픔을 금방 잊어버리게 되는 법이다. 그새 동무의 죽음을 잊은채 나는 하루하루 하염없이 놀거리를 찾아 헤매이었다.
그 이후에도 죽는 아이들이 있었다. 뱀에 물려서 죽기도하고 .. 우리는 뱀에게 잔인무도하게 복수를 하고 또다시 자연을 벗삼아 동무의 죽음을 잊은채 뛰어놀았다.
단순한 아이들.. 아마도 그땐 죽음의 의미도 모르고 슬퍼할 줄도 몰랐을 것이다.
우리는 거의 격투기를 방불케 하는 항복받기 놀이를 하였다. 그리고 전투놀이도 빼놓을 수 없겠다. 성격이 괴팍한지라 동무들이랑 놀다가 크게 싸우기도 하고 그러한 성격적 결함을 지닌 나에게 참을성을 가르쳐 준 것이 바로 노동이었다. 아기도 돌보고 밭일도 도우고 밭일하는 것조차도 나에게 놀이 감이 되었다. 팥 벌레랑도 놀고 부지깽이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어머니를 따라다니면서 밭일을 배우던 그 무렵 함께 밭 밟는 일을 하던 망아지..그리고 외할아버지께서 말 다루시던 모습과 가꾸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나의 학교생활을 생각하면 으레 떠오르는 것이 마분지 고책이다. 마분지 공책이야말로 나의 모습이었으리라. 가난한 나머지 준비물을 잘 챙겨가지 못했는데 가난하다고해서 기죽지는 않았다. 공부도 잘하고 반장노릇도 했으니까..
오랫동안 부재중이던 아버지로부터 오학년 무렵 편지가 왔다. 편지를 동무들에게 자랑하곤 했는데 그 자랑스런 헌병 중위가 엉뚱히 놀림감이 되었다. 빈병의 헌병을 우리아버지의 헌병으로 오인한 사건이다. 내가 아이들에게 신세를 지는 처지라 화가 나도 참고.. 그러니까 내가 공부에 취미를 붙이게 된 것도 아이들 때문이리라.
우리는 그렇게 공부도 같이 했지만 놀기도 같이 놀았다. 경찰서는 물론 우체국, 은행, 병원, 혹시나의 요행으로 떠돌던 극장 앞 거의 마을 전체가 우리들의 놀이터인 샘이다.
가난한 어머니의 관심사는 오로지 먹을 것과 직결된 실질적인 것뿐이었다. 어머니의 생활자체가 일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한 가정을 책임지시는 어머니의 노고를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다. 또 하나의 짐 아기.. 아기는 울음이 심했고 잠 투정 또한 심했다.
내가 오학년 때 병명모르는 열병에 시달려 혼수상태에 이르렀다. 열병의 휴유증으로 나는 한쪽귀가 들리지 않는 외짝귀가 되었다. 어쨌든 평생 나를 따라다닌 소심증과 우울증은 귀를 잃고 난 그때부터 조장되었으리라. 그 해 겨울 추위를 많이 타는 나에게 재속의 불씨와 어머니의 손길이 담긴 사랑은 겨울을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우리 식구가 외할아버지을 따라 한내 건너편의 정드르 마을로 이사 간 것도 그 해 겨울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웬깅이네도 거기를 떠났다. 정드르 마을은 한내의 동편 평평한 고지대에 위치 해 있었고 그 아래 바닷가에 용연과 용두암이 있었다. 그곳은 거센 북풍이 부는 황량한 곳이었다. 육학년 그 해의 봄 지난 가을의 흉작으로 가근이 심했다. 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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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5.06
  • 저작시기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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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08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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