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어거스틴의 은총론 (도입, 어거스틴의 생애, 사상은 안써도 상관없지만 내용을 이해할 것)
2 중세의 보편 논쟁과 교권 확보의 과정을 논하라 ( 보편논쟁과 교리, 확보가정)
3. 중세 후기 유명론적 구원론과 루터의 은총론적 구원론을 비교
4. 칼빈
5. 회중교회의 신학적 발전 과정
6. 근대 선교의 발전 과정
7. 근대 신학의 발전 과정
2 중세의 보편 논쟁과 교권 확보의 과정을 논하라 ( 보편논쟁과 교리, 확보가정)
3. 중세 후기 유명론적 구원론과 루터의 은총론적 구원론을 비교
4. 칼빈
5. 회중교회의 신학적 발전 과정
6. 근대 선교의 발전 과정
7. 근대 신학의 발전 과정
본문내용
켜 온데 대하여 반기를 들었다. 그리고 종교를 이러한 눈으로 보는 사람들을 향해서 교양있는 경멸자라고 야유하였다. 종교는 과학이나 도덕성에 관한 모든 주장이 아니다. 종교는 이제 감정이다. 종교는 완전자와의 연합의 감정이며 이러한 감정에서 오는 완전성에 대한 느낌이다. 그것은 완전자에 대한 직접적인 의식이며, 일련의 지적인 과정을 거쳐서 주장하는 교리나 혹은 도덕성의 체계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쉴라이에르마허는 기독교를 이성과 윤리로 봄으로써 자연종교의 하나로 전락시키려는 합리주의자들에게 쐐기를 박았다. 그는 이성과 윤리 중심의 신학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감정을 강조함으로써 신과 인간을 나누어 놓은 경계선을 뚫고서 신과 인간의 합일의 길을 터 놓았다. 따라서 그가 주장하는 감정의 신학도 인간의 길을 인정하는 면이 적지 않았다.
키에르케고르는 헤결의 변증법적인 낙관론을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는 화해의 개념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출발하였다. 본질의 세계에서는 화해가 가능할 수 있으나 현실적인 실존이 세계에서는 화해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내적인 삶 혹은 본질에 있어서 화해가 가능할 수 있으나 역설과 정념으로 인간의 현실적인 상황에 있어서 화해가 없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의 현실성을 불안이라는 단어로 기술하였다. 인간은 제한되고 참된 실존에 이르지 못하는 불안이 있다. 동시에 자아실현과 자아동일성을 상실할 가능성을 아는 데서 오는 불안이 있다. 이 불안은 쌓여서 절망에 이르게 한다. 불안과 절망에서 오는 죽음을 이겨 낼 수 있는 방법은 인간이 처해 있는 심미적, 윤리적, 그리고 종교적 단계를 점진적 밟아 감으로써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도약에 의해서 이룰 수 있다. 도약은 신앙이다.
그의 공헌은 역사와 신앙, 그리고 윤리적 질서와 종교적 질서 사이의 불연속성을 주의 깊에 파헤친 점이다. 또 신앙의 반대는 덕 아니라 죄라고 함으로써 지금까지의 합리주의적 도덕주의를 무너뜨린 것이다. 또 정통주의적 교리만으로는 신앙이라 할 수 없으며 하나님과의 각 개인의 관계를 중요시 하였다. 마지막으로 간접적인 전달이론, 그리고 그러한 전달의 신학적이며, 심리학적인 접목으로 기독교 신앙을 드라마, 소설, 매개수단으로 표현 할 수 있게 하였다.
부정적인 면은 과도한 개인주의 였다. 그래서 교회의 자리가 지워졌으며, 신자의 사회적인 자리를 잃게 되었다. 둘째, 산앙의 서술화는 기독교의 은총의 개념을 약화시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상황에서 오는 인간의 너무나도 나약한 비 인간화를 이데올리기가 무기처럼 사용하여 왔다고 보았다. 그것은 교회와 결탁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는 반 교회적인 태도를 지향함으로써 노동자들을 지배계급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의지의 철학이 등장하였다. 계보의 창설자는 쇼펜하우어, 그 제자 니체, 베르그송, 하이데거, 샤르트로, 화이트헤드로 이어진다.
쇼펜하우어는 주의주의 의지, 곧 무의시적인 의지가 의지하는 것의 실현을 향해서 나아가지만 거기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한다. 의지는 더 높은 의지를 지향하기에 만족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의지를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은 동양의 불교에서 말하는 무의지, 자기부정을 통해서 의지를 잠재울 수 있다고 하였으며, 불교에서의 선에 해당하는 자아수양을 음악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하였다. 주의주의는 주지주의에서 말하는 낙관적인 인간 승리가 없고, 패배주의가 짙게 깔려 있으며, 실존주의적인 비판주의에 물들어 있다.
니체는 의지라는 단어를 힘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힘이란 존재의 자앙긍정이며, 살려는 힘을 긍정하려는 의지이다. 니체는 삶의 현상을 보면서 분노하였다. 계급구조와 청교도적인 도덕주의의 인습에 빠져서 지배자의 억압을 정당시한 것을 보며 분노하였다. 그래서 그는 신은 죽었다라는 말을 표현하며 기독교의 신 개념을 무너뜨리기 위해 표현하였다. 신의 자리에 인간이 앉게 된 것이다. 초인(심신이 강한 사람)만이 권력에의 의지를 실현한 사람이며, 참 지도자로서의 자격을 갖는다고 하였다.
칸트이후 서구 유럽의 기독교는 감정으로, 인간의 실존으로, 인간의 의지로 다니면서 칸트를 뛰어 넘으려고 했지만 다시 되 돌아가는 것이 현명해 보였다. 신 칸트 학파는 쉴라이에르마허와 헤겔의 신비주의적 종합도 거절하고, 키에르케고르, 쇼펜하우어, 니체의 경험주의적 개별주의도 거절하고서 칸트로 돌아가자고 하였다. 그것은 신학에 있어서 역사적 탐구를 시작하였다. 객관적이며, 과학적인 연구로써 신학을 옹호하고, 도덕적 원리의 도움을 입어서 기독교를 와해상태로 구해보려는 것인데 바로 리츨 학파이다.
리츨학파는 칸트에서 리츨, 하르낙으로 이어진 학파를 말한다. 리츨은 기독교은 구속과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두개의 초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이두개의 초점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나누일 수 없으며, 구속은 신학의 영역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윤리의 영역이었다. 구속은 의인과 화해를 포함하고 있는데, 화해는 죄의 용서에 근거한 새로운 삶까지 말하였다. 그는 첫째,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진노와 정의를 배격할 정도였다. 둘째, 죄와 은총의 중요성을 감소시켜 버렸다. 셋째, 기독교의 본질을 역사적 연구로 접근할 수 있다. 넷째, 도덕을 종교이 자리에 올려 놓음으로써 문화와 기독교를 일치시키는 잘못을 범하는 사람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하르낙은 교리사를 저술하였으며, 기독교의 교리의 제정과정을 역사적으로 파헤침으로써 사람들을 미신적인 맹신으로부터 건져내려고 하였다. 그는 기독교의 변질을 촉진시킨 운동이 교리적 결정이며, 영지주의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기독교가 영지주의를 어떻게 거부했는지를 밝혔다. 하지만 지성인들에게 받아들이게 하려고 지성화를 시도했으며, 기독교는 곧바로 지성화와 동일하다고 하였다. 이것은 기독교의 헬라화라고 말하였을 때보다 더 큰 비판을 받았다. 헬라화된 예수에 관한 복음은 필요 없고, 헬라화 이전의 예수의 복음을 회복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후에 양식비평의 가능성과 성경의 비 신화화를 부르짖는 불트만의 접근을 가능케 했으며, 동시에 역사적 예수 탐구의 길을 열어 놓았다.
쉴라이에르마허는 기독교를 이성과 윤리로 봄으로써 자연종교의 하나로 전락시키려는 합리주의자들에게 쐐기를 박았다. 그는 이성과 윤리 중심의 신학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감정을 강조함으로써 신과 인간을 나누어 놓은 경계선을 뚫고서 신과 인간의 합일의 길을 터 놓았다. 따라서 그가 주장하는 감정의 신학도 인간의 길을 인정하는 면이 적지 않았다.
키에르케고르는 헤결의 변증법적인 낙관론을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는 화해의 개념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출발하였다. 본질의 세계에서는 화해가 가능할 수 있으나 현실적인 실존이 세계에서는 화해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내적인 삶 혹은 본질에 있어서 화해가 가능할 수 있으나 역설과 정념으로 인간의 현실적인 상황에 있어서 화해가 없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의 현실성을 불안이라는 단어로 기술하였다. 인간은 제한되고 참된 실존에 이르지 못하는 불안이 있다. 동시에 자아실현과 자아동일성을 상실할 가능성을 아는 데서 오는 불안이 있다. 이 불안은 쌓여서 절망에 이르게 한다. 불안과 절망에서 오는 죽음을 이겨 낼 수 있는 방법은 인간이 처해 있는 심미적, 윤리적, 그리고 종교적 단계를 점진적 밟아 감으로써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도약에 의해서 이룰 수 있다. 도약은 신앙이다.
그의 공헌은 역사와 신앙, 그리고 윤리적 질서와 종교적 질서 사이의 불연속성을 주의 깊에 파헤친 점이다. 또 신앙의 반대는 덕 아니라 죄라고 함으로써 지금까지의 합리주의적 도덕주의를 무너뜨린 것이다. 또 정통주의적 교리만으로는 신앙이라 할 수 없으며 하나님과의 각 개인의 관계를 중요시 하였다. 마지막으로 간접적인 전달이론, 그리고 그러한 전달의 신학적이며, 심리학적인 접목으로 기독교 신앙을 드라마, 소설, 매개수단으로 표현 할 수 있게 하였다.
부정적인 면은 과도한 개인주의 였다. 그래서 교회의 자리가 지워졌으며, 신자의 사회적인 자리를 잃게 되었다. 둘째, 산앙의 서술화는 기독교의 은총의 개념을 약화시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상황에서 오는 인간의 너무나도 나약한 비 인간화를 이데올리기가 무기처럼 사용하여 왔다고 보았다. 그것은 교회와 결탁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는 반 교회적인 태도를 지향함으로써 노동자들을 지배계급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의지의 철학이 등장하였다. 계보의 창설자는 쇼펜하우어, 그 제자 니체, 베르그송, 하이데거, 샤르트로, 화이트헤드로 이어진다.
쇼펜하우어는 주의주의 의지, 곧 무의시적인 의지가 의지하는 것의 실현을 향해서 나아가지만 거기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한다. 의지는 더 높은 의지를 지향하기에 만족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의지를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은 동양의 불교에서 말하는 무의지, 자기부정을 통해서 의지를 잠재울 수 있다고 하였으며, 불교에서의 선에 해당하는 자아수양을 음악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하였다. 주의주의는 주지주의에서 말하는 낙관적인 인간 승리가 없고, 패배주의가 짙게 깔려 있으며, 실존주의적인 비판주의에 물들어 있다.
니체는 의지라는 단어를 힘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힘이란 존재의 자앙긍정이며, 살려는 힘을 긍정하려는 의지이다. 니체는 삶의 현상을 보면서 분노하였다. 계급구조와 청교도적인 도덕주의의 인습에 빠져서 지배자의 억압을 정당시한 것을 보며 분노하였다. 그래서 그는 신은 죽었다라는 말을 표현하며 기독교의 신 개념을 무너뜨리기 위해 표현하였다. 신의 자리에 인간이 앉게 된 것이다. 초인(심신이 강한 사람)만이 권력에의 의지를 실현한 사람이며, 참 지도자로서의 자격을 갖는다고 하였다.
칸트이후 서구 유럽의 기독교는 감정으로, 인간의 실존으로, 인간의 의지로 다니면서 칸트를 뛰어 넘으려고 했지만 다시 되 돌아가는 것이 현명해 보였다. 신 칸트 학파는 쉴라이에르마허와 헤겔의 신비주의적 종합도 거절하고, 키에르케고르, 쇼펜하우어, 니체의 경험주의적 개별주의도 거절하고서 칸트로 돌아가자고 하였다. 그것은 신학에 있어서 역사적 탐구를 시작하였다. 객관적이며, 과학적인 연구로써 신학을 옹호하고, 도덕적 원리의 도움을 입어서 기독교를 와해상태로 구해보려는 것인데 바로 리츨 학파이다.
리츨학파는 칸트에서 리츨, 하르낙으로 이어진 학파를 말한다. 리츨은 기독교은 구속과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두개의 초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이두개의 초점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나누일 수 없으며, 구속은 신학의 영역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윤리의 영역이었다. 구속은 의인과 화해를 포함하고 있는데, 화해는 죄의 용서에 근거한 새로운 삶까지 말하였다. 그는 첫째,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진노와 정의를 배격할 정도였다. 둘째, 죄와 은총의 중요성을 감소시켜 버렸다. 셋째, 기독교의 본질을 역사적 연구로 접근할 수 있다. 넷째, 도덕을 종교이 자리에 올려 놓음으로써 문화와 기독교를 일치시키는 잘못을 범하는 사람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하르낙은 교리사를 저술하였으며, 기독교의 교리의 제정과정을 역사적으로 파헤침으로써 사람들을 미신적인 맹신으로부터 건져내려고 하였다. 그는 기독교의 변질을 촉진시킨 운동이 교리적 결정이며, 영지주의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기독교가 영지주의를 어떻게 거부했는지를 밝혔다. 하지만 지성인들에게 받아들이게 하려고 지성화를 시도했으며, 기독교는 곧바로 지성화와 동일하다고 하였다. 이것은 기독교의 헬라화라고 말하였을 때보다 더 큰 비판을 받았다. 헬라화된 예수에 관한 복음은 필요 없고, 헬라화 이전의 예수의 복음을 회복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후에 양식비평의 가능성과 성경의 비 신화화를 부르짖는 불트만의 접근을 가능케 했으며, 동시에 역사적 예수 탐구의 길을 열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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